소설리스트

77. 매일 업어 줘야겠네. (77/123)


#77. 매일 업어 줘야겠네.
2023.03.24.


기다림의 끝은 처참했다. 잠깐의 미소, 스치듯 이마에 닿는 입맞춤이 좋아서 우유에 약이 들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마셨다.

무슨 약인지 궁금한 것도 참았다. 그렇게 잠든 사이 엄마는 죽었다. 태서는 엄마가 죽은 욕실 앞에서 꼬박 반나절을 혼자 떨게 된 것이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더라도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늘 집안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자랐던 태서는 크게 떼쓰거나 투정 부리는 일이 없었다. 그런 아이를 고용인까지 데리고 키우면서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약까지 먹였을까, 싶었다.

하지만 어린 태서가 생각하기에도 친모는 정상이 아니었다.

유리로 된 실처럼 유약한 정신으로 제 몸 하나 추스르기 힘들었을 테니, 곁에 둔 아이가 버겁지 않았을 리 없다. 하지만 모르는 척하자니 아이는 남편이 저를 돌아봐 줄 아주 작은 가능성이었기에 그럴 수 없었으리라.


“어쩌면 엄마는 그때 내가 죽기를 바란 건지도 모르겠어요.”

오래도록 옛 생각에 잠겨 있던 태서가 가만히 속삭였다. 여전히 재인을 품에 꼭 안은 채였다.

태서는 엄마가 저를 죽이고 자살하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모가 제게 먹일 수면제의 치사량을 정확하게 계산하지 않았던 탓에 서른 시간 만에 깨어나게 된 것이라 여겼다. 사실 그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아이가 남편의 관심을 받을 수단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친모가 저를 쓸모없게 여겼을 테니.

그래서 태서는 그 후로 아무리 아파도 의사 처방 없이는 그 흔한 진통제 한 알 먹지 못하게 되었다.

제게 남은 트라우마는 그 정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오래도록 곪은 속을 숨기고 멀쩡한 척했는데, 생각보다도 더 곪아 있었던 모양이다.

먼저 좋아한다, 고 말한 재인은 태서에게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답을 바라지 않고 한 말이었다.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라던 그녀에게 태서는 결국 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매일 업어 줘야겠네.”

 
간질간질하게 목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키고 겨우 뱉은 말이 그따위다. 태서가 쓴웃음을 삼키며 잠든 재인을 안은 팔에 힘주었다.

헤어질 생각도 했으면서, 좋아한다니.

내색하지 않고 넘긴 불안함은 재인의 고백에 순식간에 부피를 키웠다. 제 친모가 보여 주던 집착의 면모가 제게도 있었던 것이다. 태서는 재인의 온기를 느끼며 짙어지는 두통을 잊으려 노력했다.

트라우마로 인해 좋아한다는 말도 못 하는 주제에. 그러면서도 저를 향하는 재인의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아 불안해하는 등신이라니.

오늘은 어린 날, 추위에 떨며 욕실 문 앞에서 엄마를 기다리던 밤의 꿈을 꿀 것만 같다. 태서는 잠들지 않기 위해 다시 재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으응…….”

잠결에 저를 밀어내는 재인의 몸짓에도 굴하지 않고 뽀얀 살결을 머금었다. 한껏 물고 빤 탓에 얼룩덜룩해진 곳에 다시금 제 흔적을 덧씌웠다.

신사인 척해도, 배려하는 척해도 결국은 어미를 닮았던 것인가. 우리가 헤어지다니, 그럴 일은 없다.

춥기만 하던 날들을 보내온 제가 어떻게 알게 된 온기인데. 그녀가 겁먹고 도망가지 않게 발톱을 숨길 것이다. 제 이런 못난 모습은 절대 보이지 않으리라.

태서는 짙어지는 집착을 뚜렷하게 응시하며 입술을 벌렸다. 혀에 닿는 여린 살은 달았지만, 그의 속은 썼다.

날 떠나지 말아요. 내가 당신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될게요.

윤재인에게 최후의 수단으로 남고 싶은 태서는 차오르는 집착의 욕구를 애써 눌렀다.

그렇다 하더라도 비틀린 저 자신을 다시금 마주하게 된 밤이었다. 사실은 엉망으로 망가져 있다는 것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하지만 잃지 않으려면 숨겨야 한다.


“태서 씨……?”

“응.”

“나, 졸려요…….”

“더 자요.”

“이러면 못 자잖아…….”

이제 조금 후면 날이 밝을 것이다. 겨울밤이 길다고 하지만, 그에게는 짧았다. 말로 전하지 못한 제 마음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모자란 밤이었다.


 

* * *



“이게 무슨!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꽤 오래 자리보전하던 것을 떨치고 일어난 광순은 근처 내과에 가서 수액을 맞고 나온 참이었다. 석동이 돈 십오억을 날려 먹은 이후로 내내 골골대던 그녀가 겨우 정신을 차리자마자 향한 곳은 남광빌딩이었다.

오래도록 살피지 않은 건물을 돌아볼 목적도 있었지만, 다른 목적이 더 컸다.

광순은 제가 아들의 병원에 주기적으로 가서 잔소리를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치위생사나 간호사, 데스크 직원이 돈 받아 가는 값을 하도록 채찍질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직원들 세워 두고 사사건건 참견하며 갑질하는 게 즐겁기도 했지만, 혹시라도 제 아들에게 꼬리 치는 같잖은 것들은 없는지, 돈값 못 하고 저들끼리 수다나 떨지는 않는지, 매의 눈으로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른 빌딩 앞에 안전모를 쓴 무리가 2층을 가리키며 모여 있었다. 트럭에 딸린 크레인 위에 올라간 사람들은 <강남오석동치과> 간판을 떼서 내리는 중이었다.


“당신들! 당신들 뭔데 우리 병원 간판을 떼?”

생각지 못한 광경을 목격한 광순이 인부들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간판 바꿔 단 게 불과 몇 달 전이니, 공사가 필요하지도 않을 터다.


“왜 남의 간판을 허락도 없이!”

“아, 왜 이러세요!”

“누구 허락받고 간판을 떼? 어?”

잘 잡히지도 않는 안전모 대신 인부 한 명의 멱살을 잡은 광순이 눈을 치켜떴다. 인부의 어깨 너머로 다른 인부들이 새 간판을 잡고 바꿔 달 준비하는 것을 본 것이다.

<강남더고운미소치과>

그리고 치과 간판 아래쪽에 접힌 대형 현수막에 귀하디귀한 아들 사진이 반쯤 접혀 보였다. 그 아래로 적힌 문구를 확인한 광순의 눈이 뒤집혔다.

<부원장 오석동>


“부원장? 부원장이라니! 우리 원장님이 왜 부원장이야!”

“할머님, 이러지 마시고 비켜서세요. 위험합니다!”

광순은 저를 저지하는 인부들에게 밀려 멍하니 새 간판이 달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2층의 창틀도 새로 단 듯하고, 고작 일주일 조금 넘는 사이 밖에서 보는 분위기가 전혀 달라져 있었다.

어느새 뚝딱, 새 간판이 달리고, 건물 빈 곳에 대형 현수막이 내걸렸다.

<교정과 전문의 대표 원장 최준범>

<구강외과 전문의 부원장 한예서>

<보철과 전문의 부원장 장한나>

<보존 치료과 전문의 부원장 오석동>

간판과 현수막을 면면히 살핀 광순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 아들의 이름 앞에 부원장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것도 못마땅한데, 웬 젊은 여자가 아들보다도 먼저 이름을 올리다니. 그것도 둘씩이나.

광순은 부리나케 핸드폰을 꺼내 아들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우리 원장님>

요 며칠, 아들은 평소와 별다르지 않았다. 다만 아픈 엄마가 걱정된다며 당분간 집에만 계시라 신신당부했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광순의 앙상한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 * *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조용히 안 해?”

“어떻게, 어떻게 그 애를 또다시 집에 들일 생각을 해? 뭐? 친자 입양? 당신이 미쳤지? 양심이라는 게 없니?”

대훈이 재인을 제 딸로 친자 입양하려 했음을 뒤늦게 알게 된 승희가 고래고래 악썼다.

더는 남편에게 실망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저에게는 상의 한마디 없이 혼자 그렇게 결정한 남편을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당신이 어떻게 이래? 평생 나 아닌 다른 여자 마음에 담고 산 거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그 사이에서 난 애를 기어코 당신 밑으로 들여야겠어?”

“그렇지 않아도 정신 사나운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현양 재단에 대한 검찰 수사가 코앞이었다. 검찰이 현양 재단과 현양 건설 모두에게 칼을 들이댈 거라는 얘기가 돌고 있었다.

지승희도, 조대훈도 집 안에서만 칩거 중이었고 시기를 놓쳐 해외로 보내지 못한 유리는 제 방에만 처박혀 있었다.

세상 부러울 것 없이 모두를 발아래 둔 것처럼 여기던 게 얼마 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몰려드는 기자들이 무서워 집에 불도 제대로 켜지 못한다.

고용인들 중 몇몇은 집안 분위기를 살피다가 나오지를 않고 있고, 집 앞에서 시위 중인 하청 업체 직원들 때문에 장 보러 가는 것마저 불편해진 과천댁은 반찬 가짓수를 줄여도 되느냐 물어 왔다.

꼴이 이렇게 되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주가는 연일 하한가를 찍고 있고, 곧 있을 임시 총회에서 회장 해임안이 상정될 거라는 얘기도 들려왔다. 온갖 곳에서 금전적으로 압박해 오고 사태의 책임을 물어 오는 가운데 회사 가치는 반토막 났다.


“정신 사나워?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당신이 회사 경영 똑바로 못 한 탓이잖아!”

신문과 뉴스에 현양 건설과 현양 재단과 관련 사건이 계속 보도되는 중이었다.

현양 건설이 이대로 무너질 것인지를 놓고 토론을 벌이는가 하면 어느 방송국의 예능 다큐 프로그램에서는 현양 건설 오너가의 이중생활에 대해 심층 취재까지 했다.

그 덕에 모두가 숨죽이는 가운데 김 실장만이 분주하게 집과 회사를 오가는 중이었다. 승희 역시 벌써 며칠째 머리도 다듬지 못하고 있었다. 제때 관리받지 못해 웃자란 손톱이 눈에 거슬렸다.

해외로 빼돌린 비자금이 있어도 함부로 찾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온 나라가 현양 그룹을 손가락질하는 마당에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다. 그야말로 집 안에 갇힌 꼴이었다.


“당신 엄마가 당신 앞으로 해 준 돈 있는 거 알아. 그거 줘 봐.”

“……미쳤어? 우리 아빠가 물려준 돈, 그건 다 어쨌어? 다 어디로 흘러갔냔 말이야!”

승희는 꺼칠하게 수염을 기른 남편을 쏘아보며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하지만 아내를 달래 줄 마음이 없는 대훈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붙어먹던 최 비서 없으니 당신 꼴도 우습군.”

“뭐, 뭐야?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양심이 없는 건 당신 아닌가?”

“하?”

오래도록 불륜을 저질러 온 상대가 있다고는 해도,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까지 낳은 남편에게 양심이 없다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대훈은 윤세나와 바람피운 것이 아니라 결혼 전 관계였다고 하겠지만, 아이의 존재를 숨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남편은 저에게 이렇게 양심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는 게 승희의 생각이었다.


“당신은 내가 누굴 만나 뭘 하든지 관심도 없다던 사람 아니야?”

부정하지 않겠다는 듯 가만히 듣고만 있는 대훈을 보는 승희의 눈에 불이 붙는 듯했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내 양심을 운운해? 저는 고아로 만들었던 딸 앞세워 장사할 생각이나 하면서?”

“장사라니.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하나?”

“장사가 아니면? 뭐, 늦게라도 다 큰 딸을 신경 써 주는 거라고 말하고 싶니?”

“그래. 재인이는 내 딸이니 내가 신경을 써야지.”

“내 딸? 당신 지금 내 딸이라고 했어? 우리 유리는! 우리 유리는 쳐다도 안 보면서! 마음 다치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우리 유리는!”

“우리 유리?”

어느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흔들며 승희가 고함을 질렀다. 당장이라도 눈에 보이는 건 뭐라도 집어 들어 던질 기세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훈이 승희 앞으로 성큼, 한 발짝 다가섰다.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운 눈빛에 비웃음을 가득 담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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