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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좋아한다는 말 (76/123)


#76. 좋아한다는 말
2023.03.21.


재인이 잠들었다. 조금은 거칠고 집요하게 그녀를 몰아붙인 태서에게 너무하다며 입술을 삐죽이다가 기절하듯 잠이 든 것이다.

새벽 달빛에 드러난 새하얀 어깨를 내려다보던 태서가 손을 뻗었다. 훈기가 가득한 방이었기에 추울까 덮어 주는 것이 아니었다. 재인에게 제가 아닌 그 누구의 손도, 시선도 닿는 것이 싫었다.

그게 달빛이라고 하더라도.


“…….”

집착이라는 단어를 그 누구보다도 경멸했던 그였다.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입술을 꽉 깨물어 삼킨 태서가 다시 재인의 곁에 누웠다. 미동도 하지 않고 잠든 그녀를 안아 제 품에 가둔 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다섯 시간 전, 집으로 이어진 길을 걷던 태서는 재인을 업은 채였다. 달은 밝았고, 바람은 잔잔했다. 늦은 밤의 골목길은 조용했고, 조금 술에 취한 재인은 처음 업혀 본 설렘에 아이처럼 발을 동동거렸다.

업힌 게 좋았는지 등과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웃다가, 제 목 주변을 두른 팔에 힘을 꼭 줬다가, 가만히 기대어 오기도 하는 재인이 예뻐 태서는 말을 아꼈다.

집을 향해 걷고는 있지만, 집에 도착해도 그냥 지나쳐 좀 더 걸을 생각이었다.

그만큼 태서는 그 시간이 좋았다. 그에게 서로의 침묵이 부담스럽지 않은 관계는 처음이었고, 태서는 고요를 메운 행복을 만끽하고 싶었다.


“태서 씨.”


“응.”

 
듣고 있다는 의미로 태서가 짧게 답했다. 어느새 졸음이 묻어나는 재인의 목소리는 달콤하기만 했다. 그녀가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태서의 심장 박동은 빨라진다. 벅찬 설렘이었다.


“내가 태서 씨 좋아한다고 말했어요?”


“…….”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어. 했어요?”

 
가만가만 건넨 질문에 태서는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조금 전까지 빠르게 뛰던 심장을 누군가 콱, 틀어쥔 것 같았다.


“……말한 적은 없고.”

 
겨우 대답한 그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술기운에 눈 감은 재인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듣는 것은 달랐다.


“좋아해요.”

 
재인의 짧은 속삭임에 태서가 눈 감았다. 언뜻,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였지만,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재인을 업고 언덕길을 오를 때도 멀쩡하던 숨이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태서는 제 안의 바다가 급격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풍랑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메말라 있던 그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고 자꾸만 왈칵왈칵 차오르게 한 것이 윤재인이었다.

감정은 어느새 바다를 이루더니 지금처럼 격랑에 휩싸이기도 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처럼, 감정의 깊이 역시 알 수 없었다. 바다의 모습이 다양하듯, 감정 역시 다양했다.

기쁨과 불안, 환희와 의심, 행복과 집착이 한데 어우러져 물결치며 그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태서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재인을 고쳐 업었다. 하지만 여전히 발걸음을 뗄 수는 없었다.


“내가 말 안 했구나. 한 줄 알았어요.”


“……한 줄 알았다면서 왜 또 했습니까?”


“하고 싶어서요……?”

 
자연스럽게 대답하고 뺨을 비벼 오는 재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좋아한다는 말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윤재인은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그저 제 감정을 솔직하게 말한 것뿐이다.

사랑하는 법을 배운 적 없어서 사랑하는 것에 서툴 거라던 여자가 이렇게나 사랑스럽다.

태서는 당장 말하고 싶었다. 좋아한다는 말, 네 글자로는 부족한 제 마음을 그가 아는 모든 단어를 총동원해서라도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 안에 넘실대는 말을, 태서는 내뱉지 못했다. 입도 열지 못했다.


 


“내게는 네 아빠뿐이야.”

 
태서의 죽은 친모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나, 취했을 때나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좋아했어. 사랑했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어. 평생 변하지 않을 거야.”

 
남편에게는 말도 붙이지 못하는 그녀는 남편을 꼭 닮은 아들에게 하루에도 수십 번 제 마음을 고백했다. 그것도 한국에서가 아닌, 멀리 떨어진 영국에서였다.


“그래서 널 가졌고, 낳았지. 네 아빠를 그대로 닮은 너를.”

 
그렇게 말하는 엄마는 늘 태서의 눈썹 뼈를 어루만졌다. 도드라진 눈썹 뼈에서 우뚝하게 솟은 콧대까지. 태서가 친부인 강신재를 가장 많이 닮은 부분이었다.

엄마, 엄마는 나도 좋아하는 거지요? 나도 사랑하는 거지요?

애틋함과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저를 매만지는 엄마에게, 어린 태서는 단 한 번도 묻지 못했다.

남편에 대해 품은 진득한 마음을 수도 없이 고백하는 그녀는, 정작 태서에게는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친부를 그대로 닮은 태서의 얼굴과 골격이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다가도 태서가 엄마, 하고 부르면 텅 빈 눈빛이 되돌아왔다.

가끔은 원망 가득한 시선으로 쏘아볼 때도 있었다. 술에 취한 날에 엄마는 어린 태서를 붙들고 울곤 했다.


“보고 싶어…….”


“…….”


“왜, 왜 난 안 돼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얼마나 사랑하는데!”

 
엄마가 속삭이는 달콤한 말은 모두 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 엄마에게 자신은 남편의 사랑과 관심을 받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똑똑한 태서는 그리 오래지 않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고작 열 살의 태서는 보았다.

사람들이 욕실 문을 열었을 때 덮치듯 번지던 피 냄새를 기억한다. 분주한 사람들 사이로 붉은 물이 가득하던 욕조를, 그 안에 잠겨 있던 새하얀 드레스 차림의 창백한 엄마를 기억한다.

세뇌하듯 들었던 좋아한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은 태서의 안에 피처럼 붉게 남았다.

그 감정은 욕조에 말라붙은 피처럼 찐득하고도 비린 것이었다. 엄마의 고백은 쓸쓸하고 슬펐으며, 고백하던 눈빛은 차갑고 서러웠다.

그랬기에 태서에게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감정은 알고 싶지 않던 감정이었다. 저와는 상관이 없을 거라 여기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재인을 통해 새롭게 배웠다. 어느새 제 하루를 차지해 가는 그녀를, 젖어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윤재인을 통해 알게 된 감정을 의심하지 않았고, 확신에 차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좇은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저를 좋아한다는 재인의 고백을 듣고도 태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향하는 제 마음이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뭔가가 꽉 틀어막고 있는 듯이.


“어떻게 하고 싶어요?”


“모르겠어요. 지금은 그저 너무 화가 나서…….”


“그 사람 딸, 하기 싫댔잖아요.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없는 거죠?”

 
조대훈을 만나러 가기 전, 테드가 머무는 숙소의 테라스에서 제 물음에 고개 끄덕이던 재인을 기억한다. 입술을 감쳐문 채 슬쩍 고개 들어 먼 곳을 바라보는 그녀는 제 눈빛을 피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을 거치지 않은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의 머릿속에 든 의심 그대로였다.


“혹시, 나랑 헤어질 생각 하는 겁니까?”

 
제게 피해 주지 않으려는 재인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재인이 제게 품은 마음의 크기가, 그렇게 쉽게 헤어짐을 생각할 정도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쉽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재인 역시 저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운했다. 아니, 서운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너무 화가 나서 잡고 있던 목제 난간에 손톱자국이 깊이 났을 정도였다.

태서는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제가 겪었던 일로 인해 심하게 비틀려 있다는 것을.


“자. 이제 자야지?”

 
영국에 살던 때부터 매일 저녁 여덟 시면 엄마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내밀었다.


“마시기 싫어요. 써요.”


“마셔.”

 
부연 설명 없이 차가운 명령에 어린 태서는 시무룩한 얼굴로 우유를 마셨다. 그리고 푹 잠들었다.

일곱 살쯤에 쓰게 느껴지는 우유가 먹기 싫어서 마시는 척하고 몰래 버린 적이 있었다. 그날은 자는 척하고 침대에 누워 오래도록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엄마가 제게 주는 우유에 푹 자게 만드는 무언가가 들어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걸 알고도 태서는 엄마가 주는 우유를 마다하지 않았다.


“잘했어. 잘 자.”

 
우유를 다 마신 후에 볼 수 있는 엄마의 미소가 좋아서였다. 이불을 덮어 준 엄마는 빈 잔을 들고 일어서기 전, 태서의 이마에 입 맞췄다.

그건 엄마가 아들에게 해 주는 유일한 입맞춤이었고, 어린 태서는 엄마의 입술이 머물렀던 제 이마를 살살 만지다 잠들곤 했다.

그렇게 태서는 무려 5년 동안이나 수면제를 복용했다.

그러다 엄마의 감정 기복이 유독 심하던 어느 겨울날, 엄마는 평소보다 더욱 쓰게 느껴지는 우유를 내밀었다.

맛을 본 후 잠깐 멈칫했던 태서는 저를 바라보고 있는 엄마를 발견하고는 눈을 꼭 감고 꿀꺽꿀꺽 잔을 비워 냈다.


“이제 자.”


“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는데요? 오늘은 토요일이잖아요. 토요일은 영화 보는 날이잖아요.”


“오늘은 엄마가 피곤해. 그만 자.”


“그런데 엄마, 오늘 정말 예뻐요. 공주님 같아요.”


“……잘 자.”

 
제게 입맞춤도 남기지 않고 돌아서던 엄마가 입고 있던 새하얀 드레스가 웨딩드레스였다는 것을, 태서는 알지 못했다.

화려한 레이스로 이루어진 드레스의 잔상을 되새기던 태서는 곧 잠들었고, 주말이 다 지나서야 일어났다.


“엄마……?”

 
TV를 켜고 나서야 하루가 다 지나도록 꼬박 잤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요일 늦은 밤, 집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잠에서 깨자마자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물을 마신 태서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엄마를 찾았다. 그러다 엄마 침실에 붙은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알아챘다.


“엄마, 여기 있어요?”

 
꽉 닫힌 욕실 문의 아래쪽 틈을 통해 조명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보드라운 발 매트 위에 누운 태서는 욕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몸을 웅크렸다. 보일러가 고장 나기라도 했는지, 무척이나 추워서 몸이 달달 떨렸지만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엄마, 나도 따뜻한 물에 씻고 싶어요…….”

 
태서가 밤새 욕실 문 앞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가느다란 물줄기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어린 태서는 냉기 가득한 욕실 앞에서 나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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