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 터뜨리세요 (74/123)


#74. 터뜨리세요
2023.03.14.



“뜨거운 걸 못 마시는 건 네 엄마를 닮았구나.”

탁자 위에 놓인 찻잔만 바라보고 있던 재인이 시선을 들었다. 즐겨 마시는 허브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찻잔을 손에 쥔 대훈은 즐거운 추억이라도 떠올리는 듯 여유롭게 미소 지은 채였다.


“네 엄마도 차를 앞에 두곤 한참을 기다렸지. 미지근하게 식은 후에야 입에 대곤 했어.”

재인은 엄마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떠드는 남자가 우스웠다. 엄마는 허브차를 싫어할 뿐, 뜨거운 걸 못 마시는 게 아니었다.

뜨거울 때 마셔야 맛있다며 핫초콜릿이 담긴 잔을 빠르게 비워 내던 엄마가 들으면 어이없어 웃을 일이었다.

재인 역시 앞에 놓인 차가 뜨거워 마시지 않은 게 아니었다. 보기만 해도 신물이 나는 인간을 앞에 두고 무언가를 입에 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였다.


“엄마 닮아 다행이죠.”

아빠인 당신을 닮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재인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들었는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는 대훈의 손길이 거칠었다.


“부르셨으면 말씀하세요.”

“오랜만에 만난 아비한테 말버릇하고는. 네 엄마가 그렇게 가르친 게냐?”

“네.”

“……뭐야?”

“저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을 존중할 필요는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당돌하면서도 침착한 재인의 태도에 대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문득 윤세나의 예전 모습을 보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맹랑한 딸아이가 조금 귀엽게 느껴져 웃음이 났다. 하지만 이어진 재인의 말은 그의 웃음을 앗아 가기 충분했다.


“그리고 아비라뇨. 제게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세상에 아비 없이 태어나는 자식은 없다.”

“없이 태어나서 없이 자라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딱히 필요성을 느낀 적도 없고요.”

“아무리 부정한들 천륜은 못 끊어 내는 법이야.”

재인이 쓰게 웃었다. 예전에는 곁에 두고도 고아로 만들더니, 이제 와 천륜을 운운하는 작태가 우습기 그지없었다.

재인은 태서에게서 상황을 전해 들은 후 제가 먼저 대훈을 만나 보겠다 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말이 통할 리 없다. 곁에 내려놓았던 외투를 정리해 든 재인이 일어섰다.


“괜한 걸음을 한 것 같습니다.”

“급하게 굴 것 없다.”

“저는 급해서요. 좋은 추억도 없는 곳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재인이 앉아 있는 곳은 대훈의 서재였다. 문밖에는 지승희가 눈을 번뜩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하지만 엿듣지는 못할 것이다. 문 바로 앞에 강태서가 지키고 서 있으니. 재인이 막 뒤돌려던 참이었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쯧.”

“…….”

“신중하게 굴어라. 함부로 몸…….”

“무슨 자격으로 제게 그런 말을 하세요?”

더 더러운 말을 듣기 전에 재인이 나서서 대훈의 말을 끊었다. 화를 내기에도 아까운 인간이라 생각했지만, 더는 모욕을 참아 줄 생각이 없었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집으로 들어오너라.”

“…….”

“얌전히 결혼 준비나 해.”

“정재훈한테 뭘 받아 드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딴 거한테 내 딸은 아깝지.”

저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한 “내 딸” 소리에 재인이 치를 떠는 사이, 대훈은 너그럽게 웃으며 소파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괜찮은 놈을 골랐더구나.”

태서를 두고 하는 말임을 깨달은 재인의 눈동자가 분노에 휩싸였다.


“아비는 딸아이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지. 허락하마.”

“……제정신이세요?”

“네 엄마도 기뻐할 게다. 이참에 시카고에 사람을 보내야겠다. 네 엄마도 한국으로 옮겨 와야겠어.”

“하…….”

죽은 엄마까지 들먹이며 제 속을 긁는 친부의 행태에 절로 실소가 터졌다.


“그만하세요.”

“나보다 먼저 그 녀석이 장난질을 그만해야겠지. 네가 부추긴 게지?”

“장난질에 회사가 넘어갈 정도면 그 회사 대표가 운영을 장난처럼 한 거죠.”

“말 가려 하거라. 네가 이렇게 돼먹지 못하게 군다면 나도 다 생각이 있어.”

저와 강태서의 관계를 눈치챈 대훈의 속셈은 뻔했다. 한때 대한민국을 달궜던 윤세나와의 스캔들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재인을 뒤늦게 친자로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것, 알고 있다. 네 엄마 역시 뒤늦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 원치 않을 테지.”

“함부로 엄마를 입에 담지 말아요.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다 너 하기에 달렸어. 계속해서 나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 테냐, 아니면 세상에 내 딸로 알려져 강태서와 결혼할 테냐.”

“당신, 정말 끔찍해.”

“강태서 역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테지. 유리와 오랜 시간 동안 약혼 얘기가 오고 갔던 건 알 사람들은 아는 사실이고. 이복 자매를 두 손에 쥐고 저울질한 재벌 3세라니, 사람들이 떠들어 대기 좋겠어.”

대훈은 기자 회견을 열어 거짓 눈물을 흘려 댈 생각인 모양이다.

온갖 핑계를 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고 뒤늦게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쇼를 해 댈 것이다. 그러면서 태서를 저 유리한 대로 이용해 먹으려는 것이다.

꼿꼿하게 선 재인의 몸이 분노에 휩싸여 부들부들 떨렸다. 피가 들끓는 심정에 잠시 어지러움을 느낀 재인이 눈을 감았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는 동안 여기 오는 내내 들었던 태서의 말을 떠올렸다.


“조대훈은 어떻든 재인 씨를 이용하려 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 부녀 관계와 더불어 나와의 관계를 폭로하겠다며 협박해 올 게 분명합니다.”


“그 말은…….”


“재인 씨가 바라지 않는 상황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차가워진 재인의 손을 그러쥐는 커다란 손은 따뜻했다. 재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태서를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떻게 하고 싶어요?”


“모르겠어요. 지금은 그저 너무 화가 나서…….”


“그 사람 딸, 하기 싫댔잖아요.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없는 거죠?”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태서에게 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태서가 빙긋이 웃으며 재인의 뺨을 매만졌다.


“혹시, 나랑 헤어질 생각 하는 겁니까?”

 
속셈을 간파당한 재인이 시선을 피했다. 상황을 파악한 후 재인은 그 길밖에 없다고 여겼다.

조대훈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은 없었다. 엄마의 평온한 안식을 지키고 태서의 명예를 지키려면 조대훈에게 저는 태서와 아무 사이도 아님을 선언해야 했다. 그가 재인을 이용해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도록.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지저분한 추문을 달게 될 태서를, 재인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강태서는 오직 윤재인 하나 때문에 이 일에 뛰어든 사람이니,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서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그런 거면 나, 좀 섭섭한데.”


“하지만, 하지만 태서 씨…….”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헤어지는 걸 생각합니까. 내가 그렇게나 별로예요?”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요. 난 태서 씨가 나 때문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 원하지 않아요.”


“나는 재인 씨 때문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싶습니다. 생각만 해도 짜릿한데?”

 
제 긴장과 불안을 풀어 주려는 듯, 태서가 조금은 짓궂게 웃으며 재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댔다. 하지만 재인은 두 손을 들어 그의 가슴팍을 짚어 슬쩍 밀었다.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잖아요. 태서 씨, 내 말 좀 들어 봐요. 조대훈은 분명히…….”


“나에 대한 마음이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까? 날 얼마나 능력 없는 놈으로 봤으면 재인 씨가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게 아니라!”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는 이 상황을 역으로 이용할 겁니다.”


“어떻게요?”


“날 믿어요. 나랑 헤어지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난 아직도 윤재인이랑 해야 할 게 많은 사람이니까. 그리고, 절대로 그 사람 딸 되지 말아요. 나도 그 사람 마음에 안 듭니다.”

 
태서가 재인을 안은 채 투덜거렸다. 조대훈이 이렇게까지 인류애를 상실시킬 줄은 몰랐지만, 어떤 식으로든 협박해 올 것을 염두하고 있었다고 했다.

결국 상황은 태서가 말해 준 그대로였다. 엄마와 저를 외면한 아버지라는 작자의 민낯은 이다지도 역겨웠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인데, 양심이 있으면 그렇게까지는 안 하겠지. 그렇게 기대한 제가 바보였다. 재인은 저를 장기 알 삼아 위기를 모면하려는 친부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터뜨리세요.”

“……뭐?”

“터뜨리시라고 했어요. 제가 당신 딸인 거, 마음껏 떠들고 다니시라고 했어요. 저를 내세워 장사하시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다만.”

재인은 소파에 앉은 채 굳어 버린 대훈을 향해 차게 식은 눈을 내리떴다. 태서는 아직 터뜨리지 않은 조대훈의 약점이 많다고 했다.

현양 건설의 주식을 사들이고 있고 관련자를 포섭 중이니 곧 있을 현양 건설 임시 총회에 조대훈 회장의 해임안이 올라올 것이라 했다.

그러니 친자 입양을 거절하고 당당히 맞서라고 했다. 여태껏 당신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아왔듯, 앞으로도 당신의 딸이 될 생각 없으니 헛꿈 꾸지 말고 있는 딸 간수나 잘하라고 충고하라고 했다.

재인은 그의 지원이 든든했다. 조금은 부담을 가졌던 게 사실이었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저만큼 분노하며 이를 가는 태서를 보며 용기가 솟았다. 상황에 떠밀려 원치 않게 용서하지 않을 용기였다.


“각오하셔야 할 거예요.”

“…….”

“당신이 날 어떻게 고아로 만들었는지, 당신과 당신 곁의 사람들이 날 어떻게 학대했는지. 내가 나서서 세상에 밝힐 거니까.”

“학대는 무슨!”

“때리고 굶기고 가두는 것만 학대인 줄 아세요? 방치하고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도 학대예요. 그 분야에서 얼마나 뛰어나셨는지는 본인이 더 잘 아시겠죠.”

“고작 생각해 낸 게 그딴 헛소리야?”

일어나 역정을 내는 대훈이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재인은 문 앞에 바짝 붙어 선 채 흔들림 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일말의 연민은 사라진 후였다. 복수를 결심하고도 주저했던 지난날이 부질없었다.


“내가 당신 딸이 되면 태서 씨를 이용해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본데, 천만에요. 난 당신 딸이 되어서 내 친부란 사람이 얼마나 비정한 인간인지를 밝힐 거예요. 사람들이 당신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도록,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네까짓 게 무슨 수로!”

“내가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신을 무너뜨려 주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못 할 것 같나요? 나를 위해 뭐든 감수하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고작 이딴 협박에 겁먹을 것 같아요?”

“뭐, 뭐야?”

“나를 이용해 그 사람을 막으려 하셨겠지만, 아뇨. 난 더 부추길 거예요. 그 사람이 현양 건설을 갈기갈기 찢어 공중분해 하도록. 당신이 지키려는 그 모든 것이 휴지 조각이 되도록.”

“네가, 네가 지금!”

“좋은 패를 쥐었다고 생각했겠죠. 난 당신의 패가 될 생각이 없어요. 당신이 뭘 어떡하든, 나는 온 힘을 다해 당신 무너뜨릴 거야. 철저하게 끌어내릴 거야.”

핏발 선 눈을 부릅뜬 채 저를 응시하는 대훈에게 재인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더 미워할 수 있는지, 기대되네요.”

“…….”

“행복한 게 최고의 복수라던데. 아뇨. 난 행복한 와중에 당신의 몰락을 보며 더 행복할 거예요.”

“…….”

“난 준비됐어요.”

당당하게 복수의 본격적인 시작을 선언하는 재인의 미소가 차갑게 빛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