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허락해 줄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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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허락해 줄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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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허락해 줄 겁니까?
2023.03.10.
“건방진 놈.”
낮게 웃음을 터뜨린 대훈이 일어섰다. 책상을 크게 돌아 나와 안락의자에 앉은 그가 서재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저, 식사는…….”
“음.”
고개를 끄덕이는 대훈을 확인한 과천댁이 반색하며 몸을 돌렸다. 매 끼니 버려지는 음식이 많았을 터다. 일이 터진 이후로 입맛을 잃은 탓이었다.
그런데 강태서와 통화하고 나니 허기가 돌았다. 아무래도 지금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았다는 안도감 때문인 듯했다.
점심 식사가 차려지는 걸 기다리던 대훈이 안락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고 어젯밤 저를 찾아온 정재훈을 떠올리는 그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어나 보지.”
“갑자기 온갖 사건이 손쓸 새 없이 연이어 터지고, 검찰이나 언론 쪽 관계자는 모두 회장님 연락을 피하지 않습니까? 일을 터뜨렸다는 제보자는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을 겁니다.”
“……자네 지금.”
누구 놀리러 왔냐고 되묻는 표정의 대훈은 비스듬히 눈썹을 들어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지금 그 상황, 저 역시 낯설지 않습니다. 저 역시 같은 방법으로 당했고, 수습 중입니다만 쉽지 않습니다.”
“……같은 방법?”
“촘촘히 얽은 그물로 덮쳐 오는 것 같은 상황이어서 헤어나기도 힘드실 겁니다. 제가 당한 장난질도 그랬습니다. 설계자가 같은 겁니다. 강태서 짓이 분명합니다. 강태서가 지금 막대한 정보력과 자금을 가지고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강태서가 제게 원한 가질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유리와의 약혼은 깨졌고, 더는 얽힐 일이 없는 사이였다. 강태서가 이렇게까지 현양 건설을 흔들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재인이, 윤재인 말입니다.”
“그 아이는 왜…….”
“강태서가 지금 윤재인을 데리고 있습니다.”
마치 납치라도 했다는 듯 말하는 정재훈을 보며 대훈은 실소를 참아 냈다. 그제야 아내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강태서가 뭔가 알고 있다는 듯 말하며 유리의 결혼에 대해 불안해했다. 좀 살피라고 재촉하며 죽은 윤세나에게까지 샘을 부렸다.
이런 거였나. 유리가 뭘 어떻게 해도 휘어잡지 못한 그 사내를, 윤재인이 사로잡은 모양이었다. 그 얌전하던 아이가 강태서를 만나 그 곁에 있는 이유가 뭘까. 그저 선남선녀끼리 이끌린 것이라고 단순히 봐도 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저를 미워하는 딸아이를 대신해서 강태서가 나선 것이 분명했다. 고작 여자 따위가 뭐라고. 대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훈은 제가 윤세나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가 윤세나를 버린 것이다. 제 아이를 가진 여자를 내치고 이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것은 대훈 일생에 큰 희생이었다. 성공을 위해 손에서 놓아야 했던 달콤한 것이 아깝기는 해도, 대훈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던 자신을 대견하게 여겼다.
그런데 사업한다는 놈이 베갯머리송사에 넘어가 이런 짓이나 벌이다니, 그놈도 결국에는 한심한 놈이었다. 한때 사랑이라는 허상에 빠져 집안을 등지려던 제 아비처럼 어처구니없는 놈이었다.
“그 새끼가 재인이를 꼬신 게 틀림없습니다. 더러운 말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순진한 재인이를…….”
저를 찾아와 눈을 번뜩이는 정재훈은 이미 반쯤 미쳐 보였다.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허공을 짚는 두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어쩌다 저런 게 꼬여서는. 속으로 혀를 찬 대훈이 생각에 잠겼다.
이유가 뭐든 간에, 딸아이가 강선 그룹의 후계자를 꼬여 냈다는 것은 대훈에게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을 두고 지저분한 소문이 도는 것도, 부러운 시선이 닿는 것도, 다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잘만 이용하면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장난질 치고 있는 하룻강아지의 약점을 손에 쥘 수 있는 상황이다. 대훈은 일단 제 발로 달려온 멍청이를 손에 넣고 주무르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 저었다.
“자네, 사람이 경솔하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네. 강선 그룹이 쓸데없이 왜 나나 자네를 건드린단 말인가.”
“정말입니다. 워낙 철저하게 일을 벌인 탓에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저와 현양 건설, 현양 재단을 겨누는 것은 강태서 말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강선 그룹과는 무관한 일일 겁니다. 이건 모두 재인이한테 눈이 돈 그 새끼가 개인적으로…….”
“흠, 말조심하게. 그런 말이나 듣자고 한 것은 아니니.”
불편한 척 미간을 찌푸리자 답답함을 느낀 재훈의 얼굴이 검붉어졌다. 초조한 얼굴로 다리를 떨어 대던 재훈이 그에게 내민 것은 뜻밖의 것이었다.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급한 불은 끄실 수 있을 겁니다.”
“자네…….”
“저는 다 필요 없습니다. 재인이만 제게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주안 그룹을 일궈 낸 회장이 채 마르지 않은 무덤 흙을 박차고 나올 일이었다.
하나뿐인 손자의 성정이 유약하고 심지가 굳지 못해 걱정이라고 들었는데, 결국에는 손녀들 놔두고 손자 재훈에게 가장 알짜배기 지분을 남겨 준 모양이다.
그리고 그 손자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들고 대훈을 찾아왔다.
“허어……. 자네.”
“제 진심입니다. 저는 처가 말뚝에 절하는 사위가 될 겁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기쁘게 받아 주세요.”
“…….”
“아버님.”
대훈은 절로 번지는 미소를 겨우 참아 가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좋게 생각해 보겠다며, 딸아이와도 얘기해 봐야 하지 않겠냐며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모름지기 여자는 남편에게 사랑받고 살아야 하는 법이지.”
“제가, 제가 재인이를 아끼고 사랑해 줄 자신이 있습니다.”
“삭막한 세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한결같은 마음을 간직한 자네를 보니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군. 늘 외롭게 지냈을 그 아이에게도 안정적인 가정이 필요하겠지.”
불안해하는 재훈을 다독여 안심시킨 후 돌려보냈다. 그 후 대훈은 밤새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눈에 거슬려 치워 버리려던 딸아이가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좋은 패가 된 상황에 신중을 기한 것이다.
“미친놈에게 주기엔 아깝지.”
그리고 생각을 정하자마자 강태서의 비서에게 연락했다. 조금 전의 통화로 속을 뒤집어 놓았으니, 저도 생각이 있는 놈이라면 고개 숙이고 달려올 것이다.
그날을 생각하는 대훈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정재훈에게서 받을 건 받을 것이다. 제발 받아 달라고 사정하는 놈을 거절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놈이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대훈은 적당히 재훈의 기분을 맞춰 주며 이득을 취한 뒤 내칠 생각이었다. 음습한 구석이 있는 정재훈은 사윗감으로 적절하지 않다.
딸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강태서의 곁에 섰든, 지금 대훈은 그 아이를 칭찬하고 싶어졌다. 제게 있는 줄도 몰랐던 부성애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 * *
“식사 안 해요?”
“아…….”
생각에 잠겨 있느라 누군가 테라스로 들어서는 것도 몰랐다. 난간을 짚은 채 허리를 조금 숙이고 있던 태서는 제 등 뒤에서 빼꼼 얼굴을 내미는 재인을 발견했다.
그러자 굳어 있던 얼굴이 거짓말처럼 풀어진다. 태서가 몸을 돌려 두 팔을 벌리자 재인이 잠시 뒤를 돌아보고는 순순히 안겨 왔다.
으스러져라, 힘주어 안다가도 이내 팔에 힘을 풀어 살살 보듬듯 어른다.
태서가 시선을 내리자 저를 올려다보는 재인이 눈을 들어 웃었다. 품에 폭 파묻힌 작은 존재가 더없이 소중하고 귀해서 태서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한숨과 함께 흘려보냈다.
“초밥, 되게 맛있던데. 장 실장님이 추천한 맛집은 이제 믿을 수밖에 없겠어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어.”
“많이 먹었어요?”
“배부르게 먹었어요. 근데 태서 씨도 배고플 테니까. 통화가 길어지나 싶어서 와 봤는데, 뭐 하고 있었어요? 일이 잘 안 풀려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태서가 손을 들어 재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이내 말랑말랑한 귓불을, 발긋한 귓바퀴를 쓰다듬다 눈가를 매만지고 결을 따라 눈썹을 쓴다.
애틋함이 묻어나는 손길에 재인이 미소 지으며 눈 감자 그녀를 보듬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오르는 감정을 참아 내지 못한 탓에 어쩔 수 없이 이마에, 눈꺼풀에, 콧잔등에 입맞춤을 쏟아 내는 그는 햇살처럼 터지는 재인의 웃음 앞에 무장 해제되고 말았다.
“내려가서 얼른 밥 먹어요. 배고프잖아.”
“밥보다 다른 게 더 고픈데.”
“…….”
“뭘 어떻게 하면 이렇게 예쁩니까?”
진지하게 묻는 태서를 빤히 올려다보던 재인이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안겨 왔다. 태서는 그녀를 품에 안고 오래도록 숨을 들이켰다. 윤재인의 향기가 제 안을 채우는 것이 못 견디게 좋았다.
“무슨 일 있어요?”
“음…….”
태서는 재인의 까만 눈을 진득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그녀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혼자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은 의미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강태서가 따라야 할 유일한 상사는 윤재인뿐이다.
그러니까 그녀 역시 상황을 알아야 했다. 큰 결정에 앞서 그녀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것은 강태서가 윤재인을 존중하는 방법이었다.
착한 윤재인의 마음이 약해진다면 설득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설득에 능했고, 강단 있게 밀어붙일 줄도 알았다.
또 윤재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만, 그녀를 지치게 만들어 제가 원하는 바를 이뤄 내는 방법도 있다.
처음으로 서로를 품었던 주말, 태서는 지쳐 뻗은 재인의 어깨에 입 맞추며 노곤해진 그녀가 한없이 말랑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뭘 물어도 ‘응.’이라고 대답해 오는 그녀가 한없이 사랑스러워 ‘응.’이라고 대답하는 입술을 끝도 없이 감쳐물었다.
그 덕에 재인의 입술이 퉁퉁 부었지만, 태서는 그마저 기꺼워 투덜거리는 그녀의 입술에 다시 한번 입 맞췄더랬다.
그리고 그녀가 제게 무척이나 너그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저와 마주 보며 웃어 준다는 것은 아주 황홀한 일이었다.
처음 알게 된 황홀감은 낯설었지만, 절대로 놓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태서는 저를 향하는 미소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미소를 지키는 것이 지금의 태서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렇게나 예쁜 사람을 함부로 손에 쥐고 장기 말처럼 이용해 먹으려는 인간을 생각하자 절로 턱에 힘이 들어간다.
자근자근 밟고 잘근잘근 씹어서 형체도 없이 만들어 버리고 싶은, 포악한 맹수의 본능에 태서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태서 씨……?”
“물어뜯어 짓씹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흥분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허락해 줄 겁니까?”
“그게 무슨…….”
동그란 눈을 깜빡이는 재인을 향해 태서가 웃어 보였다. 윤재인에게만 길든 맹수의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