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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무슨 자격으로 (72/123)


#72. 무슨 자격으로
2023.03.07.


불도 켜지 않은 서재에서 홀로 독주를 들이켜는 대훈의 미간에 깊은 금이 팬 채였다. 제 전성기의 신호탄이 될 거라 여겼던 일주일이 악몽처럼 흐른 뒤였다.


“후…….”

한숨을 탄식처럼 내뱉으며 커튼이 쳐진 창을 응시하는 그의 눈에 담긴 피로감이 짙었다.

한밤중에도 불을 켜지 않는 이유는 혹시라도 집 앞에 진 치고 있을지도 모를 귀찮은 것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대훈은 어제부터 칩거 중이었다.

그동안 찍소리도 못 하던 것들이 밀린 자재 대금을 달라며 연일 독촉해 댔다. 회사 건물 앞에서 단체로 농성하고 현양 건설의 갑질을 규탄하며 온갖 언론을 불러들여 인터뷰해 댔다.

그 와중에 또 일이 터졌다. 시멘트를 납품하는 회사 직원이 현양 건설에서 요구하는 단가를 맞추기 위해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생산할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한 것이다.

여기에 철근 납품 업체의 부도가 현양 건설의 대금 미납으로 인한 것으로 드러나며 지탄받았다.

그러자 부실시공이 도마 위에 올랐고, 해당 연도에 지어진 아파트 입주자들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했다. 대훈의 기업 경영 윤리를 문제 삼은 몇몇 주주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다.


“망할 것들이…….”

이렇게 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악재가 끊임없이 겹쳤다. 별것 아닌 것까지 크게 보도해 대는 언론 역시 찝찝했다. 마치, 누군가 이 상황을 그려 낸 것처럼.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짧은 기간 안에 현양 건설의 주식이 정체가 불분명한 몇 곳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동안 왜 몰랐을까. 그토록 냉철하게 지켜 왔던 현양 건설인데 어쩌다 이렇게 되고 만 걸까.

한순간의 영광에 취했다. 다가올 빛이 너무나 눈이 부셔서, 그 찬란함을 만끽하겠다며 눈을 감아 버린 것이다. 그러느라 누군가 제 주머니에서 돈 털어 가는 것을 몰랐다. 때 이른 자만이었다.


“흠…….”

불편한 심기가 여실히 드러나는 탁음이 고요한 서재를 채웠다. 눈 감은 대훈이 뼈아프게 지난날을 곱씹었다.

주가가 상승세를 타기 직전, 주식을 잔뜩 매수하는 세력이 있었음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연일 상한가를 갱신하던 때, 갑작스럽게 대량으로 매도하는 세력에 대한 보고 역시 받았다. 모두 외국인이었다.

평소의 그라면 의아하게 여겼을 텐데, 황홀감에 빠져 살피지 않았다. 순풍 만난 배의 노를 젓기 바빠서 수상한 상황을 몇 번이나 그냥 넘긴 것이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더 오를 게 분명한데 팔아 치웠다는 게…….”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놈들인 게지. 이제 곧 현양 건설의 황금빛 미래가 펼쳐질 텐데.”


“옳으신 말씀입니다.”


“운이 없는 놈들이야.”

 
하지만 기사가 터졌고,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화미 아파트 재건축과 강남 일대 재개발을 들먹이며 현양 건설의 건재함을 외쳤지만, 되돌아온 것은 코웃음뿐이었다.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은행별 대출 만기일이 줄지어 다가오고 있었고, 미국의 투자 업체 두 곳에서 지분 가치의 하락을 들먹이며 이른 계약 파기를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금액을 토해 내야 했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주변에는 어떻게든 뜯어먹으려고 눈을 부라리는 것들뿐, 손 내밀어 오는 이 하나 없는 상황에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꾹꾹, 신경질적으로 의자 팔걸이 가죽을 짓누르고 있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일주일 내내 쉬지 않고 울려 댔던 회사 업무용 핸드폰과는 다르게, 개인적인 용도로 쓰는 핸드폰은 내내 조용했던 터라 조대훈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또 무슨 일이야.”

전화를 걸어온 상대가 김 실장임을 확인한 대훈의 목소리에 짜증이 실려 있었다.

늦은 시각, 전화해 오는 상황이 달가울 리 없다. 지난 며칠 계속 그래 왔으니 또 무슨 사달이 터진 모양이라는 추측은 자연스러웠다.


―주안엔터테인먼트 정재훈 대표가 회장님 만나 뵙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벌써 세 번째 연락이 왔는데, 어쩔까요.

그렇지 않아도 머리 복잡한 와중에 그딴 새끼 상대할 시간 없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는 생각에 대훈이 입을 다물었다. 며칠 전 사망한 주안 그룹 회장의 유산 분배가 신속하게 끝났다던 것이 떠올랐다.


“……조용히 데려와.”

대훈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판에 모자란 놈 하나 구워삶는 것이 내키지 않을 리 없다. 더군다나 제 딸아이에게 미쳐서 앞뒤 분간 못 할 만큼 눈 벌게진 놈이라면.


“그리고 그 애 어쩌고 있는지도 알아봐.”

―윤재인 말씀이십니까?

“그래. 조만간 만나야겠어. 저번처럼 맹랑하게 굴 수 있으니.”

놈이 죽고 못 사는 미끼를 쥐고 있어야겠다. 한동안 바빠 잠시 잊고 있던 딸아이를 생각하는 대훈의 주변으로 무거운 공기가 침잠했다.


 

* * *



“몸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는데, 저는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업무용 핸드폰을 든 태서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사무실로 쓰는 정륜동 주택의 1층, 장 실장에게 젓가락을 건네받는 재인에게 먼저 먹으라고 눈짓하고는 조용히 테드가 지내는 곳으로 향한 것이다.

조대훈과 통화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조금 전, 모두 모여 함께 점심을 먹으려던 때였다.

강선 건설 본부장실 비서실로 계속 출근 중인 한 비서가 장 실장에게 연락해 왔다. 어지간하면 제 선에서 쳐냈을 장 실장이 상황을 확인한 뒤 태서에게 다급하게 속삭였다.


“통화해 보셔야겠습니다. 그…….”


“말씀하세요.”

 
테드, 앰버와 웃으며 초밥 포장을 뜯는 재인의 눈치를 슬쩍 살핀 장 실장이 고민하다 핸드폰을 꺼냈다. 빠르게 메시지 창에 적어 내민 것을 확인한 태서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재인 씨가 여기에 있는 것을 조대훈 회장이 확인한 것 같습니다. 딸아이가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는지, 아비로서 걱정된다며 연락 기다린다고 합니다.>

장 실장이 넘긴 업무용 핸드폰 화면에는 이미 조대훈의 개인 전화번호가 떠 있는 상태였다.

태서는 평소처럼 업무 때문에 전화하는 척하며 재인의 시야 밖으로 발을 움직였다. 재인에게 숨길 것은 없지만, 그녀를 귀찮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살피지 못하는 딸아이를 자네가 챙기고 있다는데. 아비가 되어 인사하는 게 도리에 맞지 않겠나.

뻔뻔한 태도에 절로 웃음이 샜다. 짧은 말에 반박하고 싶은 곳이 수두룩했지만, 태서는 손끝으로 눈썹을 꾹꾹 누르며 쌓이는 화를 눌렀다.


“회장님께 인사받을 생각으로 하는 일은 아닙니다.”

이미 다 알고 전화한 게 분명한 상황에서 발뺌할 생각은 없었다. 태서는 어질러진 테드의 생활 공간 중에서 유일하게 원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테라스로 향했다.

창문을 닫아 소리가 새어 나갈 것을 차단한 후 어깨를 쭉 폈다. 쌀쌀한 날씨가 와닿지 않는 것은 속에 불길이 일기 때문이리라.


―어디 그럴 수야 있나. 신세를 지고 있네. 자네에게 면목이 없어.

슬슬 신경을 긁는 대훈의 화법에 태서는 당장이라도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두 입술을 꾹 씹어 닫아 대꾸하지 않은 것이다.


―어쩌겠나. 상황이 이런 것을. 하지만 언제까지 신세를 지고 있을 수는 없지. 사람을 보낼 테니 그 아이, 돌려보내게.

“……돌려보낸다는 말은 쓰기엔, 거기가 제자리가 아닙니다만.”

―아비 정이 그리워 한국을 찾은 아이일세. 제 엄마 죽은 뒤 혼자 되어 이렇게 찾아왔으니 늦게라도 아비 노릇을 해야지.

“아버지, 없다던데.”

―…….

“그딴 거, 없다고 했습니다만.”

―자네.

“잘못 알고 계신 듯하니 제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마시고, 회장님의 하나뿐인 따님 잘 챙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기사가 계속 나던데요.”

재벌가의 갑질에 대한 폭로가 연일 터지는 상황 그 한가운데 조유리가 있었다.

이미 언론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그녀가 몇 시간이나 회사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렇게 직함만 유지한 채 급여 명목으로 얼마를 받아 갔는지, 모두 밝혀냈다.

회사에 머무는 시간이 한 달에 스무 시간도 채 되지 않은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회사에는 밥만 먹으러 가는 게 아니냐.’라고 떠들어 댔다. 태서는 그것을 비꼰 것이다.

화를 참는지, 핸드폰 너머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태서는 재인이 저와 함께 있음을 알게 된 조대훈이 무슨 요구를 해 올지 생각하며 말을 아꼈다. 지금 제 침묵이 그의 화를 돋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재 어미 죽고 홀로 외로웠을 걸세. 마침 좋은 혼처가 나타났으니, 맺어 줘야지.

“무슨 자격으로 말씀이십니까. 한때의 후원자 자격이라 하더라도, 지금 무척이나 바쁘신 것으로 아는데요.”

―아비 자격이지. 열 일 제쳐 두고 딸아이를 우선으로 생각하려 하네. 내 과오를 인정하고 그 아이에 대해 밝힐 생각이야.

“…….”

―천륜을 저버리면 되겠나. 그 아이나 나나, 결국엔 천륜으로 묶인 것을.

덧붙인 말에 태서의 턱이 비틀렸다. 기가 막혀 새어 나온 한숨에 어이없는 웃음이 더해졌다. 그 끝에 작게 내뱉은 욕을 짓씹는 태서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짙은 남색 풀오버 니트 아래로 탄탄한 가슴 근육이 크게 오르내렸다. 태서는 저절로 꽉 쥐어지는 주먹을 들어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크고 낮게 숨 쉬며 멀리 보이는 잿빛 구름을 노려보았다.

천륜을 저버리면 되겠냐고 묻는 조대훈은 저뿐만 아니라 윤재인 역시 그럴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세상에 그녀를 제 딸이라고 밝히겠다는 것은 사람들의 비난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었다. 윤재인을 가지고 장사하겠다는 뜻이었다.

그 끔찍한 발상이 역겨워 구토감이 치밀었다. 재인이 이 상황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씁쓸해할지, 미루어 짐작하는 태서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다.


 


―마침 그 아이를 아껴 주겠다는 젊은이도 나타나고 하니 잘되었지 뭔가. 결혼 전에 다른 남자와 지낸 것도 책잡지 않겠다고도 하더군. 저는 그 아이를 향한 마음이 여전히 깊고 짙다는데, 내가 보기에도 8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어 보이더군. 가진 것을 다 내놓겠다지 뭔가.

대훈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를 깨달은 태서의 눈빛이 붉게 타올랐다. 늙은 구렁이의 헛소리에 이가 갈렸다. 핸드폰 너머에서 지독한 악취가 넘어오는 것 같다.


―아니면 어떻게, 이번에야말로 자네가 내 사위가 되어 볼 텐가?

웃음기 머금은 대훈의 제안에 태서가 손을 뻗었다. 멱살 대신 목제 난간을 꽉 쥔 손등 위로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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