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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쓰레기랑 다를 게 뭐야 (71/123)


#71. 쓰레기랑 다를 게 뭐야
2023.03.03.


제 아빠의 오점, 제 엄마의 악몽인 윤재인을 괴롭히는 건 정의로운 일이기도 했다.


“넌 좀 머리가 나쁜 것 같아. 네 주제가 그따위인데 왜 그렇게 뻣뻣하게 굴어? 기어도 모자랄 판에.”


“그래서, 내가 기길 바라고 무용복을 찢었니?”


“뭐 어때? 어차피 우리 엄마가 또 사 줄 건데. 네 돈으로 사는 것도 아니잖아? 윤재인, 네가 모르나 본데 네가 가진 건 다 우리 엄마 아빠 돈으로 산 거야. 네 건 내 거나 마찬가지란 뜻이야. 내가 내 거 내 마음대로 한 건데, 왜? 문제 있어?”

 
어떻게 하면 윤재인에게 망신을 줄까, 어떻게 해야 윤재인을 울게 할까 골몰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날이 실력이 늘고 예뻐지는 여자애가 미웠다. 학교와 연습실에서 저를 따르는 무리를 부추겨 그 여자애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으로는 모자랐다.

괴롭힘은 집에서도 이어졌다. 계단 밑에 있던 작은 방 앞에 쓰레기를 잔뜩 던져 놓고 고용인이 치우지 못하게 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 방 앞에 쌓인 쓰레기를 묵묵히 치우는 윤재인을 구경하며 엄마와 티타임을 즐겼다.


“더러워. 냄새나는 것 같아.”


“쉿, 점잖지 못하게. 차나 마셔. 이번에 아빠가 영국에서 사 오신 거야.”


“엄마. 난 쟤가 외로워 보여서 친구들 던져 준 거야. 쟤가 쓰레기랑 다를 게 뭐야?”


“앞으로는 그냥 놔둬. 유리야, 곱고 좋은 것만 봐야지. 쓰레기를 뭐 하러 만지고 봐?”


“주제도 모르고 공주처럼 구는 게 같잖아서 그랬어. 더러운 걸 저렇게나 잘 치우면서 정작 더러운 제 몸뚱이는 왜 안 치우나 몰라. 짜증 나. 눈에 안 보이면 좋겠어.”

 
그 말에 고상하게 차를 마시던 엄마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엄마는 유리가 윤재인을 괴롭히는 것을 묵인했고, 때로는 부추기기도 했다.

아무리 더럽다고 깎아내려도 윤재인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끝없이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지만, 울기는커녕 대꾸조차 하지 않는 윤재인이 싫었다.

그런데 그 윤재인이 강태서의 약혼자라니. 생에 가장 갖고 싶었던 남자가 원래는 윤재인 거였다니. 쓰레기 따위가. 고작 그따위가.


“내가 못 가지면, 아무도 못 가져.”

유리가 부르튼 입술을 짓씹으며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깨진 유리가 뒹구는 바닥에 내던져 놓았던 핸드폰을 향해 슬리퍼 신은 발을 옮겼다.


 

* * *

고양이의 밥을 챙긴 뒤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온 재인이 막 씻고 나와 핸드폰을 들었다. 그사이 태서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는 재인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같이 점심 먹어요. 먹고 싶은 거 생각해서 얘기해 줘요. 한 시간 안에 갈게요.>

문자가 온 건 20분 전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재인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순두부찌개 먹고 싶어요. 시켜 놓을까요?>

답을 보낸 재인이 젖은 머리카락을 감싼 수건을 매만지려는데 바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근처에 맛집 있어요. 포장해 갈게요.>

재인은 밥 다 먹고 거실에 누워 잠든 고양이를 들어 안았다.


“네 방에 들어갈 시간이야.”

잠에 취해 가르랑거리는 고양이를 방으로 옮긴 뒤 빠르게 거실을 환기하고 다시 샤워했다. 고양이와 고양이 알레르기 있는 사람과의 기묘한 동거는 이런 식으로 평화롭게 유지되는 중이었다.

머리를 말린 재인의 손이 다시 핸드폰으로 향했다. 태서와 함께할 때를 제외하고는, 되도록 혼자 외출하지 않고 있었다. 태서의 부탁이기도 했지만, 상황을 아는 재인 역시 위험에 빠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에만 있다 보니 아무래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시간이 늘었다. 재인은 포털 사이트를 열어 현양 건설과 현양 재단을 검색했다.

현양 재단의 비리가 터진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다.

재단 이사장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서 나오지 않고 있고, 재단 측 직원들은 모르는 일이라며, 언론의 관심을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르면 이번 주 내로 검찰에서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할 거라는 말이 돌았다.


“우습네……. 대단한 사람들인 줄 알았지. 이렇게 휘청일 거였으면서.”

지원 대상 아동 학대와 관련하여 취재한 기사를 읽던 재인이 얼굴을 굳혔다.

억울하다고,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는 현양 재단의 직원은 재인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예전에 친부의 집에 살던 때, 그녀와 함께 재단의 지원을 받던 학생들이 치를 떨며 싫어하던 사람이었다. 대학생 재인을 향해 끈적한 눈빛을 보내던 사람이기도 했다.


“사무장이 뭐래?”


“……밥 빌어먹고 싶지 않으면 눈 똑바로 뜨래. 그러더니 갑자기 웃더라. 원래 밥 빌어먹는 거지새끼들이라는 걸 잊었다면서.”


“……나쁘다. 솔직히 말해서, 그 사람이 우리한테 자기 돈 주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한데…….”

 
한숨을 내쉬며 서로를 위로하던 아이들 대부분은 부모가 없었다. 대외적으로 재인이 고아였던 것처럼.


“그런데 그건 뭐야?”


“아, 이거. 재단 사무실에서 나오다가 유리 만났거든. 사무장님이 말 심하게 한 거 알고 있다면서, 마음에 담지 말라고 주더라.”


“그 종이 가방, 명품 브랜드잖아! 빨리 열어 봐!”

 
종이 가방에서 나온 것은 명품 지갑이었다. 아마도 습관처럼 쇼핑하고 묵혀 뒀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발견한 것일 터다.

조유리는 드레스 룸에 포장도 뜯지 않은 명품 지갑과 참 장식, 열쇠고리 등을 쌓아 두었다. 그러다 마음 내키면 적선하듯 주변에 주곤 했다.

유리는 그러면서 즐거워하는 듯했다. 재인을 제외한 모두에게 예쁘고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했다. 그래서 재인의 주변 누구나 유리를 좋게 봤다.


“아, 나 아까는 속상해서 유리한테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빨리 고맙다고 해. 나, 유리 연락처 알아.”


“나도 알아. 전화할까? 귀찮을 수 있으니까 문자가 낫겠지?”


“응. 문자 보내. 유리는 어쩜 그렇게 천사 같을까? 예쁘지, 착하지, 거기다 집도 부자고. 유리 보면 진짜 다 가진 것 같아. 진짜로 우아하고 상냥한 공주님 같지 않아?”

 
또래 아이들이 유리를 향한 찬양하는 것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재인은 그때마다 속으로 유리를 비웃었다. 재인이 아는 조유리의 본성은 절대로 착하고 우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본성 숨기고 사느라 얼마나 힘들까…….”

유리가 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 무시와 멸시, 비난은 익숙했다. 그게 제게만 향하는 거라는 건 조금 우스웠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괴롭힘에도 굴하지 않았던 건, 유리가 제게 느끼는 증오의 감정에 질투가 섞여 있음을 알아서였다.

유리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재인을 못살게 굴었다. 옷을 더럽히거나 찢고, 책이나 가방, 신발을 못 쓰게 만드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친해진 친구는 어떻게든 사이를 떨어뜨려 놓았고, 저와는 상관이 없는 척, 재단을 통해 그 친구에게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유리가 재인에게 호감을 지닌 모두에게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재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남학생들은 오히려 부추기곤 했다. 한번은 유리가 유달리 재인에게 집요하게 구는 남학생을 집으로 초대하기까지 했다.


“여기가 윤재인 방이야.”


“아……. 여기가……?”


“너 온 거 알면 재인이가 깜짝 놀라겠다. 너무 좋아할 거야. 차 가져다줄게. 편하게 쉬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제 방을 나서던 유리와 마주쳤지만, 유리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일찍 왔네?”


“네가 왜 내 방에서 나와? 지금 내 방에 있는 건 누구고?”


“네 손님. 그런데 바로 들어가지 마. 네 베개에 얼굴 묻고 행복을 만끽할 시간은 줘야지.”


“…….”


“걔네 집에서도 우리 재단에 후원금 냈어. 넌 그 후원금 받아 연습실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거고. 그러니까 이 정도 팬 서비스는 해 줘도 되는 거잖아?”


“조유리, 너 이번에는 선 넘었어.”


“웃기네. 네가 그은 선 따위 누가 무서워하기나 한대? 뭐 해? 가서 네 손님 즐겁게 맞이해야지. 난 너희가 즐거운 시간 보낼 수 있도록 비켜 줄게.”

 
재인을 마치 업소에 나가는 여자 대하듯 말하던 유리는 고작 열아홉 살이었다. 처음에는 아빠와 다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저를 향하는 증오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유리의 괴롭힘을 조금은 이해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지는 폭언과 수위를 높여 가는 괴롭힘을 버텨 내며, 재인은 깨달았다.

조유리는 재인이 그녀의 친부와 관계된 것과는 상관없이 저를 싫어하는 거였다. 유리가 저를 향해 내비치는 증오와 혐오의 색은 아주 분명했다.

재인이 망가지기를 바라면서 아슬아슬한 덫을 놓는 유리로 인해 위험에 빠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직 누구에게도 얘기해 본 적은 없지만, 재인은 정재훈이 자신을 납치했던 때도 유리가 관여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음습하고 집요하기는 해도 부끄러움 많이 타던 정재훈이 갑자기 납치라는 큰일을 벌인 건 누군가의 부추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리는 뒤에서 사람 조종하기를 즐겼으니, 어느 정도 타당한 추측이었다.


 


“후우…….”

태서의 주도하에 복수가 시작되었다. 속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왜 자꾸 거북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재인은 읽은 기사 아래 이어진 현양 재단의 후원 사업 팀장인 조유리의 불성실함에 관한 기사는 열어 보지도 않고 핸드폰 화면을 꺼트렸다.

현양 재단의 현양 재단에서 시작된 불씨는 현양 건설로 옮겨 가는 중이었다. 수백억 원대의 돈세탁 정황이 포착되었고, 그렇게 조성된 비자금 일부가 현양 건설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이에 현양 건설의 주가는 나날이 하한가를 갱신하고 있었다. 화미 아파트 재건축 조합 측의 불안과 불만이 연일 포털 사이트를 도배했다.

이러다 보상도 제대로 못 받는 거 아니냐며, 현양 건설의 상황을 걱정하고 능력을 의심하는 말이 돌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기가 무섭게 현양 재단과 건설에 관한 비리가 하나둘 밝혀지는 중이었다.

지금쯤 미간에 금이 가도록 찡그리고 있을 조대훈을 생각하던 재인이 고개 저었다. 그딴 인간에게 연민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조대훈은 제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 내다 1층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고개 들었다. 굳어 있던 입매를 풀어 반가운 사람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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