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지금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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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지금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2023.02.28.
승희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다시금 통화를 시도했다. 오늘만 해도 벌써 백 번은 더 한 것 같은데 상대는 도무지 받질 않는다.
“최지환, 이 인간……!”
승희는 열 살 어린 비서 최지환과 20년 동안이나 불륜 관계를 지속해 왔다.
사랑 같은 어린애 놀음을 한 것은 아니었다. 연예인 스폰을 하기엔 남편의 눈이 겁이 나던 차에 곁에 있던 젊은 비서가 쓸 만했던 것뿐이다.
비서였기에 늘 함께해도 남편의 의심을 살 일이 없었고, 세간에 말이 돌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일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쌓이는 욕구나 스트레스를 풀기에 꽤 괜찮은 외모를 지녔고, 눈치도 빨라 흡족하게 굴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강태서에게 최지환과의 관계를 들켰다. 고심 끝에 최지환에게 지방으로 내려가 있으라고 했다. 그런데 자리 잡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고, 제발 버리지 말아 달라던 인간이 연락이 안 된다.
“어디 처박혀 있는 거야……?”
처음에는 불편해서 연락했다. 불륜 관계를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사이, 생각지도 못한 일이 터졌다. 여태껏 잘만 해 왔던 재단 일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설마…….”
아주 잠깐 최지환, 이 인간이 재단 일과 관련해서 무언가를 눈치채고 잠적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의심이 곧 사그라들었다.
약삭빠르기는 해도 그럴 만큼 똑똑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겁도 많은 인간이니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 리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손바닥에 박힌 손톱이 아픈 것도 모르고 연락이 닿지 않는 인간을 욕하고 있는데,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눈을 반짝 뜬 승희가 서둘러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지만,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또…….”
남편의 전화였다. 받아 봤자 좋은 소리 들을 리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핸드폰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일 터져서 바쁘다는 사람이 자꾸만 전화해서 호통을 쳐 대니 골이 딱딱 아팠다.
돈세탁이나 횡령이나, 여태껏 잘만 해 왔던 일이었다. 왜 갑자기 일이 터진 걸까.
남편은 검찰과 언론에 오래도록 돈을 먹여 왔다. 그런데 어째서 막지 못하는 걸까. 아무런 전조 없이 터져 버린 상황에 기가 막힐 뿐이었다.
뒤집힌 채 징징 울려 대는 핸드폰을 노려보던 승희가 입술을 질근 씹었다. 고민 끝에 핸드폰을 집어 든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화면을 밀어 전화를 받았다.
“말해요.”
―뭘 하는데 이제야 전화를 받아! 최 비서 연락됐어? 아직이야?
“왜 나한테 소리쳐요? 지금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생각해 보면 남편이 제게 이래서는 안 되었다. 지금 이 사달이 난 건 모두 남편의 탓이었기 때문이다.
조대훈은 지승희의 친정에서 오래도록 운영했던 재단을 물려받아 현양 재단을 세웠다.
도움이 필요한 아동과 청소년을 지원하는 것은 겉으로 보여 주기 위함일 뿐, 실제로는 재단 사업을 통해 들어온 돈을 횡령하고 세탁하여 비자금을 만들었다.
재단 이사장 자리에 지승희를 앉혀 놓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조대훈이다. 그러니 승희가 생각하기에 지금의 모든 화살이 저를 향하는 것은 억울했다. 저는 대훈이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인데.
“잘못될 거 없다며? 그냥 자리에 앉아 도장이나 찍고 사람들 만나 명함이나 돌리라며!”
―아랫사람 관리도 똑바로 못 한 주제에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나한테 화풀이할 생각 하지 말고 왜 전화했는지, 그거나 얘기해요.”
한때는 이 남자를 열렬히 사랑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걸고 결혼했다. 재벌가의 외동딸로 태어난 그녀에게 수많은 선택지가 주어졌지만, 승희는 대훈을 택했고 그의 손에 친정의 전 재산을 쥐여 준 것이다.
일밖에 모르고 차갑기는 해도, 제게만 그런 것이 아니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결혼 후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한눈팔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딸아이를 낳고 몇 년이 지나 알게 된 사실은 끔찍했다.
승희는 한국 무용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밤낮으로 연습하던 노력파 승희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윤세나는 손쉽게 그녀를 앞질렀다. 미웠다. 때로는 윤세나의 손목 발목을 꺾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만큼 미웠다.
그런 윤세나와 남편 사이에 딸이 있는 줄은 몰랐다. 배신감에 몸부림치던 새벽, 남편이 윤세나의 사진을 회한이 가득한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집착과 미련이 그득한,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눈빛이었다.
“당신, 아직도 윤세나한테 미련 가지고 있니? 그래? 그렇게 애틋하면 같이 살지, 미국엔 왜 보냈어? 이렇게 사진이나 들여다보고 있을 거면서!”
“헛소리 그만해! 또 술 마셨어?”
“이제 알겠어. 당신, 윤세나한테 버림받은 거구나?”
“……그 입 다물어.”
“당신은 당신이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봐. 하긴, 그럴 만해. 당신은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아는 사람이니까.”
“닥치라고 했어!”
악에 받쳐 남편과 몸싸움을 벌여 가며 대립했던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로 승희는 남편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그래서 곁에 두었던 최 비서와 관계를 시작했고, 남편과는 비즈니스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사랑했던 시간보다 미워했던 시간이 더 길다. 승희는 제가 가진 모든 걸 내어 준 게 아까워서 그의 곁에 남았을 뿐이다. 그러니 남편의 분노가 저를 향하는 것을 잠자코 받아 줄 생각은 없었다.
―관련 자료는 다 처리했어?
“직원이 하드 디스크 다 수거해서 불태웠대요. 장부는 은행에 옮겨 놨고.”
―확실해? 여기서 또 문제 생기면 일 더 커져. 우스운 꼴 되는 거 싫으면 확실하게 처리해.
“뭘 확실하게 처리해요? 직접 확인이라도 하란 말이야? 내가 지금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거 알면서, 직접 확인을 어떻게 해요? 그렇게 불안하면 당신이 직접 하든지!”
―그러니까 최 비서 연락됐는지 묻잖아. 그렇게 붙어 있더니 급할 땐 어디 두고!
“……붙어 있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붙어먹었다고 해야 하나?
끔뻑.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떴다. 남편의 말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 제가 들은 말이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라며 침묵했다.
―당신이랑 20년이나 붙어먹은 최 비서,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어? 혹시 당신이 최 비서 숨긴 거 아니야? 일 저지른 최 비서 감싸 주려는 거 아니냐는 말이야.
차라리 화를 낼 땐 불같기라도 했다. 제 불륜 사실을 정확히 짚어 말하는 남편의 목소리는 냉정하기만 했다. 마치,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당신, 알고 있었어?”
충격에 빠진 승희의 숨이 가빠졌다. 삐이,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듯도 했다. 새삼스럽게 남편이 무서워졌다.
―열 살이나 젊은 남자랑 붙어먹으려거든 돈을 더 주든, 덜 부려 먹든 했어야지. 상황 터지자마자 내뺀 거 보면 당신도 헛짓했어.
“언제부터…….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지금 그런 게 중요하나? 정말 그놈이 관련 자료 다 언론이랑 검찰 쪽에 넘긴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
부정하려던 승희가 입을 다물었다. 일이 터지기 전, 최 비서를 지방으로 보낸 것은 지승희, 그녀 자신이었다. 관계를 알아챈 강태서가 염려되어 결정한 것이다. 그러니 최 비서는 이번 일과 무관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남편이 제 불륜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강태서가 제 불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남편이 아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강선 그룹과의 혼맥을 중시하는 남편이 알면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붙어먹은 역사가 있어서 그러나? 당신, 남편 앞에서 내연남을 잘도 두둔하네?
“……그렇게 말하지 마. 나도 살아야 했어!”
―당신이 그놈이랑 뭘 하든 상관없어. 다만 더는 일 커지지 않게 확실히 하란 말이야. 알겠어?
“……알겠어요.”
―검찰 쪽 움직임이 빨라. 곧 압수 수색 떨어질 거야. 관련자 소환할 거고. 그러니까 없앨 거 빨리 없애. 새어 나가지 않도록 유의하고.
“뭐? 관련자 소환? 그러면, 그러면 나는?”
―일단 집에 있어. 내일 아침에 장 박사가 갈 거니까 알아 둬.
기자들이 저 아래 골목부터 진을 치고 있는 마당에 굳이 주치의를 집으로 들일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녀가 몸이 좋지 않은 상태임을 대외적으로 어필하기 위한 것이었다.
불안함이 극에 달한 승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이 순간 의지할 곳이 남편뿐이라는 사실이 기가 차면서도 슬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괜찮은 거, 맞지? 여보. 우리 괜찮은 거지?”
―그만 끊어. 혹시라도 외부 전화 받을 생각 말고.
떨리는 그녀의 음성을 안심시키는 위로의 말은 없었다.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손에 쥔 승희의 얼굴이 창백했다.
* * *
유리는 침대 위에 무릎을 세워 앉은 채 방문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아까 엄마가 당분간 꼼짝 말고 집 안에만 있으라며 잠긴 문 앞에서 당부하고 갔을 때부터 계속 이 자세였다.
“내가 아니야……?”
강태서의 약혼자가 제가 아니라 윤재인이라는 사실을 들었던 토요일 이후, 몇 번이나 곱씹은 말을 또다시 중얼거리는 유리의 손톱은 온통 뾰족뾰족하게 물어뜯긴 채였다.
사흘째 방 안에만 있었다. 그사이 끼니때마다 과천댁이 문 앞에서 그녀를 불렀고, 엄마가 두 번 문을 두드렸다.
청소하겠다고 찾아온 고용인은 유리의 패악에 기가 질렸는지, 한번 방문을 두드린 이후로 얼씬거리지도 않는다.
“내가, 아니야?”
허공에 대고 물어봤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방 안은 이미 유리가 몇 번이나 물건을 집어 던지고 부순 끝에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너희 엄마, 아프다며? 너, 너희 엄마 병원비 구걸하려고 한국 들어온 거라며?”
“…….”
“어떡해? 세상에 네 존재를 기뻐하는 사람이라고는 너희 엄마 하나일 텐데. 너희 엄마 죽으면 그때는 네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만 있게 되는 거네?”
“말조심해.”
윤재인이 늘 착 가라앉아 있던 시선을 들어 저를 노려볼 때면 희열이 솟았다. 그야말로 괴롭힐 맛이 났다. 하지만 죄책감이라고는 없었다.
저딴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남자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윤재인만 보면 눈을 못 뗐다.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학교의 선생님도, 같이 한국 무용을 전공하는 여자애들도 윤재인의 실력을 찬양했다. 늘 우러름을 받으며 자라 온 유리에게는 무척이나 못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니 괴롭힐 수밖에 없었다. 친부가 인정하지 않는 존재 따위가, 친모가 함부로 몸 굴려 태어난 주제 따위가 잘났다고 도도하게 구는 것은 옳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