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 쓸데없는 짓 (69/123)


69. 쓸데없는 짓
2023.02.24.


재단과 관련된 기사로 가득한 태블릿 화면을 거칠게 넘기던 대훈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들고 있던 태블릿을 바닥에 내던졌다. 터지듯 액정이 깨져 망가진 태블릿을 내려다보는 김 실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아직도 기사가 안 내려가!”

“죄송합니다. 기사 내보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기도 하고, SNS를 통해 번지는 속도가 무척 빠릅니다. 통제가 어렵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일 처리 이렇게밖에 못 하나?”

평소 알고 지내던 언론사 사장과 기자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엊그제만 하더라도 같이 골프 치며 대훈에게 들어선 대운을 축하하고 부러워하던 이들이었다.

언론을 무마시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선을 넘었다는 것을, 대훈도 알고 있었다. 현양 재단 이사장 지승희의 밑에서 오랜 시간 일했던 직원 하나가 해외로 튄 상황이었다.

재단 이사장의 후원금 및 국가 보조금 횡령, 현양 건설의 비자금 세탁 등과 관련된 자료를 모두 언론에 넘기고 사라진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잖아!”


―……나는, 나는 몰라요!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알아? 빨리 담당자랑 관련자 모두 확인해! 더 새어 나갈 게 있는지 확인하란 말이야!”


―지금 재단 사무실 앞에 기자들이 쫙 깔렸다는데 거길 어떻게 가! 여보. 난 일단 집으로 갈게요. 지금 모란회 모임 나와 있던 참이라 일단 자리부터 피해야겠어.

 
아내 승희에게 전화해 따진 것이 조금 전이다. 아내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듯 당황하여 덜덜 떨리는 목소리도 숨기지 못했다.

혹시 아내와 관련된 처가 쪽에서 일을 벌인 것인지를 잠시 가늠했던 대훈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뒀다. 그래도 화가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쓸데없는 짓 하고 돌아다닐 시간에 일 처리 똑바로 하라고 했지? 몇 안 되는 직원 입단속 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당신 때문에 그 일 시작한 거잖아! 왜 책임은 다 나한테 떠넘겨?


“됐고! 지금 당장 집에 가서 어디 나다닐 생각 하지 마. 유리에 대한 기사도 났으니 괜한 말 더 돌지 않게 잘 보고. 그러게! 애 회사는 꼬박꼬박 출근시키라고 했잖아! 백수로 노느니 책상에 앉아만 있으라는데 그것도 어려워?”


―유리가 지금 계속 제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건 알기나 해요? 아빠라는 사람이 애 걱정은 안 하고!

 
악에 받친 아내가 뭐라고 대꾸하든 말든, 대훈은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직원과 언론사 간의 녹취록에는 재단의 후원 사업 팀장 조유리의 불성실함에 대한 폭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더 큰 건에 묻히는 바람에 지금은 오너 패밀리의 갑질에 대한 비난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도움이라고는 안 되지, 쯧.”

못마땅한 마음에 혀를 찬 대훈이 지그시 주먹을 쥐었다. 현양 건설이 현양 재단을 세운 후 이를 통해 비자금을 모으고 세탁해 온 건 자그마치 30년 가까이 된 일이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세간의 의심을 사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틈에 새어 나가 하루아침에 이렇게나 일이 커진 것인지, 대훈은 핏발이 선 눈을 들어 어질러진 바닥을 노려보았다. 잘 나가다가 암초를 만난 그의 심경만큼이나 사무실 꼴이 어지러웠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악재가 쏟아지고 있었다. 현양 건설이 화미 아파트 및 그 일대 재개발, 재건축 사업권을 따내자마자 벌어진 일에 기가 막혔다.


“황 차관은?”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박 검사한테라도 전화해 봐.”

“……죄송합니다.”

이미 검찰청 관련자에게 전화를 돌렸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음을 암시하는 김 실장의 표정에 대훈이 눈을 감았다. 미간에 깊게 팬 홈을 문지르던 대훈이 쓰게 웃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잘만 처먹던 놈들이.”

이렇게 되면 검찰에서 언론에서 떠들어 대는 것을 트집 잡아 들이닥치는 것은 시간문제다. 평소에 돈을 처바를 때 조금 더 공을 들였어야 했나. 대훈이 헛웃음을 뱉으며 대응책을 강구하던 때였다.

갑자기 울리는 진동에 대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김 실장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응. 그게 무슨……! 갑자기 왜!”

“또 무슨 일이야!”

상사의 앞인 것도 잊고 큰 소리를 내는 김 실장을 향해 대훈이 짜증 섞인 호통을 쳤다. 통화를 끝낸 김 실장이 참담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어진 김 실장의 말에 대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마에는 핏줄이 툭툭 도드라지고 검붉어진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새끼 당장 잡아 와!”

“소재 파악하겠습니다.”

급히 사무실 밖으로 사라지는 김 실장을 확인한 대훈이 내선 전화를 눌렀다.


“다 들어오라고 해!”

임원과 각 팀의 팀장을 불러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현양 건설의 하청 업체 중의 하나로, 오래도록 전기 공사를 맡아 온 양일 전기의 임원급 직원이 현양 건설의 갑질을 폭로하고 잠적한 것이다.

거기다 최근에 이슈가 있었던 대형 건설사 재하청 업체의 도산이 현양 건설의 1차 하청 업체 임금 체불과 선지급금 거부로 인해 촉발된 것이라는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또 이번에 시공을 마친 현양 아파트 현장에 10톤이 넘는 건축 쓰레기가 매립된 것을 기자들이 파고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하청 계약을 한 조경 업체가 입을 턴 모양이다.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다들 뭘 한 거야!”

갑작스럽게 기사화되어 포털을 도배하는 일들은 사실 새롭지 않았다.

업계에 만연한 갑질 중 하나였고, 이 정도의 갑질은 언론사에서 그동안 크게 관심 두지 않고 있었다. 대훈이 언론사 대표와 친하게 지내며 막은 탓도 있지만, 그의 생각에는 이렇게까지 크게 주목을 받을 일이 아니었다.

물론 하청 업체마다 죽겠다고 앓는 소리를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다 들어주면서 회사 꾸려 나갈 사업가가 어디 있단 말인가.

건물을 지으려면 철강, 전기, 조경, 시멘트, 그 외 온갖 자재와 관련된 기술자가 필요했다. 일거리 달라는 곳은 많았다. 수틀리면 바꿔 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시장 원리에 따라 원청인 현양 건설은 더 싼 값을 제시하는 하청 업체와 계약했고, 그 결과 기술 수준이나 자재 질이 떨어지는 곳으로의 재하청이 만연했다.

하지만 이 역시, 건설판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러니 작금의 이 사태는 모두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일을 벌인 게 분명했다.


“흐음…….”

눈 감은 대훈의 입술 새로 긴 탄식이 흩어졌다. 짐작이 가는 대상이 많아 문제였다.

현양 건설의 오랜 갑질에 불만을 가진 하청 업체 사장들이 마음을 모았을 수도 있다. 노조 측도 문제가 있지만, 그들에게는 이런 일을 벌일 만큼의 힘이 없다.

재개발 사업 입찰을 놓고 날 선 신경전을 벌였던 성선 건설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시작이 깡패 집단이었던 만큼 머리보다는 힘을 썼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설마 마지막까지 입찰 경쟁을 벌였던 강선 건설이 벌인 일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그들은 스스로 입찰을 포기했고, 굳이 이런 일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조금 전에 만난 강태서도 작금의 사태에 대해 전혀 모르는 듯했다.


“도대체 어떤 새끼야!”

퍽,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튀었다. 이내 시큼한 향이 사무실에 번졌다. 오늘 주식 장 마감과 함께 터뜨리려고 아껴 뒀던 최고급 샴페인이 병째 날아가 벽에 처박힌 것이다.

지난주에 이어 주가가 연이어 상한가에 도달할 것을 기대했던 것이 오늘 아침이다. 하지만 지금은 곤두박질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했다. 어쩌면 이미 하한가를 찍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되면 은행과 투자처에서 연락이 올 것이다. 안전을 중요하게 여기는 은행에서는 대출 기한을 연장해 주려 들지 않을 테고, 투자처 역시 투자금 회수를 위해 그의 숨통을 죄어 올 것이다.


“젠장할…….”

일이 점점 커진다. 하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일을 무마하는 동시에 눈치채지 못하게 일을 벌인 놈을 찾아야 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감히 조대훈을 우습게 보고 덤빈 게 분명하다.

나지막하게 욕설을 삼킨 대훈이 고개를 젖혔다. 아까부터 손톱 거스러미처럼, 손가락에 박힌 가시처럼 성가시게 갉작거리는 존재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생각에 잠긴 대훈의 사무실로 곧 각 부서의 장이 모여들었다.


 

* * *



“여사님이 많이 편찮으세요?”

“네.”

“그래도 전화 한 통은 해야 하는데……. 아니, 내가 우리 원장님 못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절차가 그래요. 대리인으로 오신 거니까, 아무래도 건물 명의자분이랑 통화 한 통은 해야.”

“서류 다 준비해 왔잖아요. 괜히 번거롭게 하지 마세요. 밤새 앓으시다가 조금 전에 약 드시고 주무시는 거 보고 왔는데.”

“아니, 그래도……. 매수하시는 분도 확실한 게 좋지 않아요?”

“그렇죠.”

“그럼, 전화드릴게요……?”

광순에게 전화 거는 공인 중개사를 바라보는 석동이 침을 꼴깍 삼켰다. 저도 모르게 달달 떨리는 앙상한 다리에 손을 얹어 누르는 모습이 태풍 만난 사마귀 같았다.


“예, 여사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아뇨. 다른 게 아니고 원장님께서 대리인으로 오셔 가지구요. 건물 2층 매…….”

“저 좀 바꿔 주세요.”

공인 중개사가 매매라는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석동이 전화기를 낚아챘다.


“어, 엄마. 자다가 깼어?”

―응……. 달게 잤네. 내가 가도 된다니까. 병원 일 바쁠 텐데.

“아냐. 간단한 일이니까 나한테 맡기고 엄마는 좀 더 쉬셔야지.”

석동이 공인 중개사와 선배를 흘끔거리다 등을 돌렸다.


―3층 스터디 카페 재계약, 그 조건에 한다지?

“어, 그럼.”

<강남오석동치과>가 있는 남광 빌딩의 2층 전체 매매가 아닌, 3층 요가원 옆의 스터디 카페 계약 기간이 다 되어 세를 올려 받는 줄 알고 서류를 준비해 준 광순이었다.

눈 침침한 노모를 대신해서 계약서 및 대리인 관련 서류 작성을 도운 석동이 계약서상의 층수 등을 조작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3층 스터디 카페는 세를 올려 받지 않고 그대로 계약하기로 했다. 공인 중개사도 거치지 않고 간단하게 계약을 연장한 터라 복잡한 서류도 필요치 않았다.


“여기서 간단하게 명의자 확인만 한다니까, 엄마는 확인만 하고 다시 주무세요.”

―그래.

“내가 바로 스피커 폰으로 돌려줄게.”

석동이 조심스럽게 스피커폰으로 돌린 후 전화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여사님, 그러면 이 계약 진행해요?”

―우리 원장님이 갔으면 그냥 해 주면 될 걸, 번거롭게. 어차피 내가 가진 거 다 나중에 우리 원장님 게 될 건데.

“그래도 제가 지켜야 하는 절차가 있어서요.”

―우리 원장님 대학 어디 나왔는지 몰라? 뭘 허투루 할 사람이 아니야. 우리 원장님이 서류 다 준비해 갔으니까 해 달라는 대로 해요. 부족한 거 있으면 말하구.

“예, 알겠어요. 어서 나으셔요.”

통화가 끊기자 푹 삶은 시래기처럼 누렇게 떠 있던 석동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자, 그러면 여기에 도장 찍으시고. 요즘 재개발 소식에 이 근처 죄다 많이 올랐는데. 매수자분 싸게 잘 사시는 거예요.”

“예.”

마침내 도장이 찍혔다. 석동은 모친 이름으로 된 제가 쓰는 계좌에 찍힌 금액을 보고 미소 지었다. 벌써부터 머리카락이 풍성해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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