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뜻깊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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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뜻깊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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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뜻깊은 시간
2023.02.21.
“이렇게 귀한 자리에 저희 초청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관장님 덕에 작품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정말이지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재벌가 안주인들로 이루어진 <모란회>의 이번 모임 장소는 강선 아트 센터였다.
임 관장이 주도하는 다과회는 문턱 높기로 유명했고, 소수 인원만 초대받았기에 이렇듯 한꺼번에 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초대받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월요일 아침 일찍부터 모여 아트 센터를 돌며 작품을 감상했다. 이어진 다과회에서 임 관장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승희만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갑자기 연락 주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약속된 게 있었을 텐데, 미안합니다.”
“어머,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너무 반가웠다는 뜻입니다. 관장님, 오해 마세요.”
<모란회> 회장은 지난 금요일 오후에 임 관장의 연락을 받았다.
월요일에 있을 다과회에 <모란회> 회원 전원을 초대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흔치 않은 기회였기에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모란회> 회원은 각자의 일정을 정리하고 모였다.
그중에는 현양 재단 이사장, 지승희도 있었다. 승희는 고민 끝에 오랜 수족이었던 최 비서에게 지방에 내려가 있으라고 했다. 강태서에게 최 비서와의 관계를 들킨 이상 몸을 사리는 게 맞다는 판단에서였다.
게다가 딸 유리는 강태서의 진짜 약혼녀가 제가 아니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 방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다. 간혹 울부짖듯 소리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지는 듯도 했지만, 승희 역시 속 시끄러운 상황에서 딸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다.
가뜩이나 머리 복잡하던 차에 <모란회> 회장의 연락을 받았다.
호들갑 떠는 그녀의 전화를 받은 후 이 자리에 올지, 말지 수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현양 그룹과 강선 그룹이 혼맥으로 엮일 거라 믿는 사람들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오고 말았다.
승희는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기로 한 제 결정을 후회하는 중이었다.
과천댁에게 유리가 어디 나가지 않게 잘 살피라고 부탁하고 나온 것도 신경 쓰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임 관장과의 자리가 불편했다. 이런 가시방석이 또 없었다.
“이렇게 저희가 관장님과 좋은 시간 가질 수 있는 건, 아무래도 우리 지승희 이사장 덕인 거죠?”
“결혼식을 아트 센터에서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까 보니 정원이 너무나 아름답더라구요.”
남의 속도 모르고 떠들어 대는 여자들이 승희를 흘끔거리며 웃었다. 이럴 땐 침묵이 정답이다. 승희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 맛도 모르겠는 차만 입에 댔다.
“좋은 일하는 분들이니 전부터 한번 초대해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아이, 말씀 편하게 하셔요. 관장님,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희는 다 알아요. 이렇게 사돈 기를 세워 주신다니, 지 이사장 좋겠어요.”
승희가 슬쩍 고개 저으며 미소 지을 때였다.
“사돈이라니.”
조금 전의 인자한 목소리가 거짓말인 것처럼 단호한 목소리였다. 찻잔을 내려놓은 임 관장이 저를 향하는 열 쌍의 눈을 훑었다.
“그런 말 쉽게 하는 거 아닙니다.”
“아니, 저는……. 태서 군이랑 유리 양이 올해 안에 날을 잡을 거라고 들어서…….”
“누가 누구랑 날을 잡아요. 우리 태서가?”
눈치를 살피기 급급하던 사람들의 눈이 삽시간에 휘둥그레졌다.
“강선 그룹이랑 현양 건설, 돌아가신 선대 회장님들끼리 손자 손녀 혼약 맺어 주기로 하셨다고…….”
“아, 그 얘기.”
웃으며 찻잔에 차를 채우는 임 관장으로 인해 긴장감이 풀렸다. 그러면 그렇지. 다시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얼어 있는 것은 지승희뿐이었다.
“갓 기저귀 뗀 손자와 태어나지도 않은 손녀를 두고 영감들이 농담하신 게지.”
“……네?”
“30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누가 그걸 약혼이라고 믿고 결혼까지 생각하겠나.”
임 관장이 엷게 미소 지으며 던진 말에 다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럽니까.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이 웃자고 던진 말을 지키자고 서로 관심도 없는 젊은이들을 강제로 짝으로 맺어 준다고? 그거야말로 우스운 일이지, 안 그래요?”
“그……렇죠.”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식으로 결혼을 하나요. 그거야 남편 얼굴도 모르고 시집왔던 나 때 일이지.”
모두가 입을 말아 문 가운데, 평소 눈치 없기로 유명한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관장님. 태서 군과 유리 양은 파혼인 건가요?”
“파혼이라니. 파혼이라고 할 것도 없죠. 약혼식을 한 적도 없는데. 그런 말은 유리 양에게 좋지 않아요. 현양 건설의 귀한 따님인데 괜한 말 돌까 염려됩니다.”
“어머나…….”
임 관장의 짧은 말에는 태서와 유리의 약혼이 사실이 아니라는 뜻과 함께 괜한 말 돌게 하지 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평소 강선 그룹의 안사돈 자리는 제 것이라고 거들먹거리던 승희를 순식간에 우스운 꼴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얼굴이 따끔따끔하도록 벌겋게 달아오른 승희가 입술을 꾹 짓씹었다. 승희를 흘끗거리던 여자들이 눈짓을 주고받고는 임 관장을 향해 고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해요. 저희가 큰 오해를 했네요.”
“그동안 헛소문에 마음 쓰셨겠어요. 어휴, 이렇게라도 바로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러게요. 누가 그런 헛소문을 낸 건지. 왜 진작 아니라고 말씀 안 하셨어요?”
“그런 시답잖은 일에 일일이 대응하기엔, 나나 태서 아범이나 다 바쁩니다. 태서도 여태 공부하느라 바빴고.”
“하긴…….”
승희를 제외한 아홉 명은 임 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승희는 따뜻한 다실의 중간에 앉은 채 홀로 딴 세상에 떨어져 있는 듯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맞잡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제 태서도 나이가 차서. 혹시라도 저 좋다는 사람 만날 때 문제가 될 수 있으니 한 번은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승희 이사장, 어디 불편한가요?”
“……아뇨, 아닙니다.”
“나는 지 이사장이 먼저 나서서 아니라고 해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소문에 있어서는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민감할 것 같아서요.”
“……예.”
“그런데 지 이사장이나 조 회장이 워낙에 점잖아 조용히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것 같아서.”
“……예.”
“마침 지 이사장도 이 자리에 있고 하니, 이 늙은이가 먼저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합니다. 괜찮죠?”
“예, 예…….”
넋이 나간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승희의 얼굴은 시뻘겋다 못해 아예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임홍진 관장을 제외한 그 누구도 승희의 얼굴빛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지금은 오직 임 관장에게 잘 보여야 할 때였다. 평소 강선 그룹을 들먹이며 여왕벌 노릇을 하던 승희를 비웃는 건 나중으로 미뤄야 마땅했다.
승희는 저를 무시하는 사람들 사이에 앉은 채 거칠어지는 숨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재벌가 딸로 태어나 현양 건설의 안주인이 되어 재단의 이사장을 맡기까지, 나름 꽃길만 걸어온 그녀였다. 이렇게 없는 사람 취급은 처음이었기에 당황스러웠다.
“그런데요, 관장님. 태서 군 결혼은 안 시키실 생각이세요? 태서 군 훤칠하고 잘생겼다는 소리를 하도 들어서요. 딸 가진 엄마로서 솔직히 욕심나는 게 사실이에요.”
“어머, 송 원장. 이러기예요? 관장님, 저희 딸이 올해 유학 끝내고 돌아와요. 미술사 전공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강선 아트 센터에 이력서를 넣어 보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기회가 되면 한번 봐 주시면 좋겠어요.”
“글쎄……. 사람 만나는 건 태서가 알아서 할 일이라. 나는 그저 태서가 데려오는 사람을 곱게 맞이할 수밖에요.”
“어머나, 너무 좋은 시할머님이세요. 그런데 우리 태서 군은 이상형이 어떻게 된다던가요?”
비어 있는 것이 확인된 강선 건설의 안사돈 자리를 탐내는 눈들이 반짝였다. 그 소요 속에서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있던 승희는 핸드백에서 울리는 진동에 깜짝 놀라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지방에 내려간 최 비서가 거취를 정하고 연락해 주기로 했다. 승희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어 화면을 살폈다. 기다리는 최 비서가 아닌, 남편의 이름을 확인한 승희가 짓씹던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죄송합니다. 급한 전화가 와서요.”
아트 센터에서의 매너를 지켜야 한다며 핸드폰을 무음 상태로 바꿔 놓은 여자들이 승희를 못마땅한 눈으로 흘겼다.
“괜찮습니다.”
나가서 편하게 전화받으라는 듯, 임 관장이 눈짓하자 지승희는 핸드폰을 들고 일어섰다. 평소 같으면 무시했을 남편의 전화를 핑계 삼아 모멸스러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다과회에 이어 근처 식당에서 점심까지 먹은 후에야 끝날 자리였지만, 승희는 가방까지 챙겨 들고나왔다.
더 있어 봤자 제 꼴만 비참해질 뿐이다. 이렇게 사라지는 것도 도망치는 것 같아 우습게 보일 테지만, 지금 승희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더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다실을 나선 승희가 차오르는 화를 꾸역꾸역 밀어 삼켰다. 주변을 살피다 한적한 복도에 다다라서야 통화를 수락했다. 남편에게 상황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분노를 쏟아 낼 작정이었다.
“당신, 나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야? 지금 때가 어떤 때인데! 정신이 있어, 없어!
핸드폰 너머로 떨어지는 불벼락 같은 호통에 승희가 눈을 감았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 * *
{하청 업체 직원은? 가족이랑 다 같이 출국하는 거, 확인했어? 응. 그래. 우리 30분 안에 도착.}
테드와 통화하는 태서를 바라보던 재인의 시선이 다시금 태블릿으로 향했다.
<현양 재단, 후원금 400억 원대 횡령 정황 드러나>
<사무 보조 A씨의 내부 고발로 드러난 현양 재단의 두 얼굴>
<현양 재단에 맡긴 국가 보조금 172억, 어디로 흘러갔나?>
조금 전에 태서가 내민 태블릿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현양 재단과 관련된 기사의 헤드라인이었다.
“이걸 다……. 언제부터 준비한 거예요?”
저를 만난 이후 지금까지,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준비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테드와의 통화를 끝낸 태서가 재인의 손을 당겨 입 맞췄다.
“이러려고 그랬는지.”
빙긋 웃은 그가 멋쩍은 듯 약지 끝으로 눈썹을 매만졌다. 깊은 생각에 빠질 때, 혹은 조금은 무안할 때 나오는 남자의 버릇이었다.
“줄곧 거슬렸습니다. 결혼할 마음도 없는 나를 사위라며 떠들고 다니는 게 못마땅했던 것도 있지만.”
재인은 태서가 어쩌다 조유리와 약혼 관계로 얽히게 되었는지 간단하게 들었다. 30년 전쯤에 지금은 고인이 된 조부끼리 말이 오간 것이 다일 뿐인데, 그걸 구실 삼아 집요하게 구는 꼴이 환멸스러웠다고 했다.
“한참 기업 구조와 회생, 합병에 관심 두고 살피던 때여서……. 조부 대에 탄탄하던 회사를 물려받자마자 자금 세탁용 재단을 세우고 혁신을 외치며 사업을 확장하는 현양 건설에 자연스럽게 눈이 갔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한데 속을 들여다보니 크게 기우는 게 보여서 그 끝을 예상하며 관련 자료를 모아 뒀고.”
“그 자료가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던 거네요?”
“윤재인을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으니까.”
“……다시?”
“다시. 윤재인이 내 앞에 나타났으니까.”
눈 마주치면 제 사람으로 만들겠다던 그의 경고에도 강선 아트 센터에 모습을 드러냈던 때를 떠올린 재인이 고개 끄덕였다.
발리에서 처음 만났던 이후 한국에 돌아와 다시 보게 된 것을 뜻하는 태서였지만, 재인은 몰랐다. 소중하고 귀한 것을 보듯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가 윙크하듯 눈을 접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