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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후회는 네 몫 (67/123)


67. 후회는 네 몫
2023.02.17.



“자네, 혼담을 깬 후에나 보게 되는군.”

불편한 심기를 숨길 마음 없는 대훈의 말에도 태서는 반응하지 않았다. 반응이 다 뭔가. 아비뻘 되는 제 앞에서 동요하지 않고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는 모습이 고고한 선비처럼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태서를 보는 대훈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잘난 놈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알면 알수록 탐이 나는 동시에 못마땅했다.

사위로 맞을 줄 알았을 때는 사내 녀석이 저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생각했다. 젊고 잘생긴 데다 유능하기까지 하니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났다고 떵떵거리는 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 싫다는 놈이 곱게 보일 리 없다. 감히 제깟 게 뭐라고 건방지게 군단 말인가.


“임 관장님께는 내색하지 않았네만, 혼담 오간 세월이 얼만데 이렇듯 전화 한 통화로 깬단 말인가. 나는 자네가 이러는 이유라도 알아야겠네.”

“제가 이러는 이유, 말씀이십니까.”

느긋하게 구는 태서를 보는 조대훈의 얼굴이 시뻘겠다. 당장이라도 호통을 쳐 대고 싶은 걸 겨우 참는 중이었다. 어떻든 눈앞의 젊은 놈을 구슬려 결혼을 성사해야 했다. 그게 아니면, 파혼을 최대한 미루거나.

현양 건설이 화미 아파트 일대의 재건축 및 재개발 사업을 따낸 것에는 강선 그룹의 역할이 컸다.

강선 그룹의 황태자가 현양 건설의 사위가 될 거라는 소문은 현양 건설이 막대한 현금을 끌어들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조금 늦었지만, 강선 건설이 입찰 경쟁에서 빠져 준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파혼 사실이 알려진다면? 대훈의 턱이 불룩 불거졌다. 여태까지 로비를 위해 현금을 풀어 댔지만, 사실 본격적으로 현금을 쏟아부어야 하는 건 지금부터였다.

현양 건설의 역작으로 남을 일의 첫 삽을 뜨는 것이 코앞이다.

강남의 랜드마크를 굳건히 세우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조대훈이 될 거라 여겼다. 그러기 위해 건축에 필요한 돈도 그렇지만, 재개발 지역민들에게 지급해야 할 보상금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대훈은 이를 악물었다. 투자금과 대출금을 생각해서 화를 내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한 것이다. 입찰받은 공사를 무리 없이 진행하려면 어떻든 강선 그룹이라는 뒷배경이 필요했다.


“딸아이에게 상처가 될 일인데, 아비가 되어 그냥 보고만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않는 이상은 파혼, 쉽지 않을 걸세.”

“쉽지 않을 거라는 말씀은, 일을 어렵게 만드시겠다는 뜻입니까?”

“자네가 나를 얼마나 우습게 알면 이러나! 일에는 무릇 순서가 있고, 경중이 있는데! 자네, 내가 무섭지도 않은가?”

뭘 어떻게 해서라도 강태서에게 흠집 하나 정도는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싫다면 뭐라도 내놓을 테지. 이렇게 어이없게 파혼할 순 없다. 손해 볼 생각은 없으니 그럴듯한 걸 손에 쥐어야 마땅했다.

아무리 강선 그룹 황태자라지만, 이 바닥에서 강태서가 제 아비 눈 밖에 난 걸 모르는 이가 없다.

지주 회사인 강선 전자엔 발도 못 들이고 강선 건설 본부장 자리 겨우 차지한 놈이 조대훈의 사위 자리를 마다하다니, 제 처지도 모르고 콧대 높게 구는 놈이 우스웠다.

대훈은 기분 좋았던 아침을 상기했다. 주식 장이 열리자마자 치솟는 주가를 보며 아껴 두었던 최고급 위스키를 땄다. 기분 좋게 한 모금 마시려는데 강선 아트 센터의 임홍진 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 회장, 미안하게 됐소.


“……관장님. 이제 와 이러시면…….”


―결혼한 후에 깨닫고 무르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저들끼리 만난 뒤에 좋은 인연으로 발전할 줄 알았지. 어디 요즘 사람들이 어른이 정해 주는 대로 만나고 결혼하고 한답디까. 아무래도 인연이 아닌 듯하오.

 
임 관장은 파혼의 이유에 대해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만난 뒤 누가 봐도 몸이 단 유리와는 다르게, 강태서는 데면데면하게 군 모양이었다.

유리 그 철없는 것이 남자 마음 하나 사로잡지 못할 줄은 몰랐다. 더없는 낭패감에 미간을 찌푸리던 대훈은 문득 일전에 아내가 윤재인에 관해 떠들어 대던 말을 떠올렸다.

강태서, 그놈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했던가.

그렇다고 한들, 강태서가 현양 건설과의 결혼을 거절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배다른 형제가 몇이나 더 있는 놈이 장인어른 될 사람의 결혼 전 부도덕함을 트집 잡을 수 있을 리 없다.

거기다 제 아비에게 인정도 못 받는 놈이었다. 유리와 결혼한 후 처가에 잘만 하면 현양 건설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텐데, 똑똑하다는 놈이 그걸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강선 건설이 업계 1위라지만, 강선 건설 본부장 자리보다는 현양 건설 차기 회장 자리가 훨씬 나았다.

그런데 파혼이라니. 현양 건설이 화미 아파트 일대의 재개발 및 재건축 사업을 따내자마자 날아든 파혼 통보는 잔치에 재를 뿌리는 것과 같았다.


“임 관장님, 섭섭합니다.”


―따로 만나 얘기해야 하는 게 도리라는 것을 알지만, 늙은이가 면목이 없어 그러니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뭔가 섭섭한 게 있으셨다면…….”


―그런 건 없습니다. 그저 말뿐인 약혼이었으니, 유리 양이 구설에 오르는 일도 없을 거고. 조 회장, 이쯤에서 마무리합시다.

 
구설에 오르는 일이 있더라도 강선에서 차단할 거라는 말이었다. 결국, 이 파혼은 조용히 지나가게 될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임 관장과의 짧은 통화가 끝나자마자 대훈은 김 실장을 강선 건설로 보냈다. 본부장이 자리에 없다는 말에 당장 찾아오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랬더니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제 발로 나타났다. 사실, 안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다. 집안끼리의 혼약은 어른들끼리 매듭지어도 되는 문제였기에 강태서 입장에서는 굳이 껄끄럽게 대훈을 마주하고 싶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나타나서 이렇게나 뻣뻣하고 속 모르게 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터졌다. 빌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결국 참지 못한 대훈이 은근한 미소를 짓는 놈을 향해 큰소리를 치려던 때였다.


“제가 조 회장님을 무서워해야 합니까?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만.”

“……뭐야?”

“제 약혼녀라고 나온 사람이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조 회장님께서도 귀한 따님이 저와 결혼해서 평생 남편 얼굴 한번 못 보고 사는 걸 원하시는 건 아닐 거고.”

“자네, 지금 이게 무슨 막말인가? 자네가 아직 뭘 모르는 모양인데, 사업가에게는 결혼도 기회일세. 어디 사사로운 감정 가지고 대할 일인가?”

“굳건한 사업 파트너, 혼맥으로 다져진 견고한 아군. 그건 지금의 현양 건설에나 필요한 것 아닙니까?”

“…….”

“회장님이야말로 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저는 굳이 제 한 몸 팔아 가면서 마음에도 들지 않는 사람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뭐가 아쉬워서 그러겠습니까. 그리고.”

태서가 우아하게 남은 차를 마저 머금은 뒤 깨끗하게 비운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각, 정갈하게 찻잔의 각을 맞춰 머문 자리를 정리한 태서가 곱게 눈을 접어 웃었다.


“혹시라도 그럴 생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양 건설과 혼맥을 맺지는 않겠지요. 굳이? 현양 건설을?”

 

 
어떻든 강태서를 사위로 맞이하고픈, 잘나가는 기업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고작 현양 건설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저를 탐내냐는 말이었다.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명백한 조소의 뜻을 내비치는 태서의 괘씸함에 할 말을 잊은 대훈이 꽉 쥔 주먹으로 소파 팔걸이를 내려쳤다.


“지금 이 자리, 후회하지 않겠는가?”

“후회는 제 몫이 아닙니다.”

묘하게 속을 긁는 언사에 대훈이 눈을 치떴다. 마치 후회는 네 몫이라고 말하는 듯한 젊은 놈의 패기가 빈말 같지 않아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말뿐인 약혼이었으니, 파혼 역시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조 회장님 생각도 저와 같기를 바랍니다.”

“…….”

“아니라면, 안타깝네요.”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태서가 곁에 두었던 외투를 집어 드는 것과 동시에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사색이 된 김 실장이 서 있었다.


“회장님, 지금……!”

“뭐야, 갑자기!”

김 실장이 대훈을 향해 달리듯 다가서는 것을 본 태서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슬쩍 고개를 까닥이듯 눈을 내리깔았다.


“차 잘 마셨습니다.”

“……자네!”

“회장님,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니라!”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태서의 뒤에서 노여움을 쏟아 내려던 대훈이 제 귀에 속삭이는 김 실장의 말에 입을 딱 다물었다. 한순간 조용해진 방을 나서려던 태서가 뒤돌았다.

조금 전까지 붉으락푸르락하던 대훈의 얼굴은 어느새 창백해져 있었다. 급히 핸드폰을 들어 무언가를 확인하는 손이 벌벌 떨리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태서의 입꼬리가 슬쩍 휘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

“아.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그린 듯 미소 짓는 태서를 올려다보는 대훈은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손에서 시작된 떨림이 온몸으로 번지고 있었다.


“저희는 내부 문제가 있어서 아쉽게 되었지만, 현양 건설 측에서 이번 일에 사활을 거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침부터 축배를 든 날이었다. 조대훈 인생의 황금기가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악재가 날아들었다.

강태서와 독대하는 자리에 김 실장이 정신없이 뛰어든 것을 지적할 수도 없을 만큼 골치 아픈 일이 터진 것이다.

이 상황을 모르고 있을 젊은 놈의 반듯한 태도와 미소가 거슬렸다. 마치 다 알고도 약 올리는 것처럼 느껴진 탓에 대훈이 거칠어지는 숨을 내쉬었다.


“사활을 거신 만큼, 좋은 결과 있으셔야 할 텐데요.”

“……그럴 걸세.”

이를 악물어 대답하자 건방진 놈의 미소가 짙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제가 조 회장님께 딱 하나 감사하게 생각하는 게 있어서요. 차 마신 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마저 드시고 일어나십시오. 그럼.”

머문 자리를 거짓말처럼 정돈한 태서가 방을 나서자마자 대훈이 다탁을 내리쳤다.


“뭐 하고 있어? 이따위 기사 써 갈긴 놈들, 잡아 와. 기사부터 막고 출처 알아내!”

“네!”

김 실장이 급히 핸드폰을 드는 것을 본 대훈 역시 핸드폰을 들었다. 아내 승희에게 전화 거는 그의 눈 아래가 분노로 씰룩였다.


“도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야? 지금 때가 어떤 때인데! 정신이 있어, 없어!”

대훈이 승희를 향해 호통치는 소리가 조용한 한식당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문밖에 선 태서가 그제야 걸음을 옮기는 것을, 대훈은 알지 못했다.


 

* * *



“괜찮겠죠?”

“왜 그런 표정입니까. 이제 시작인데.”

태서가 빙긋 웃으며 장 실장을 향해 눈짓하자 앞좌석과 뒷좌석의 경계에 스륵, 방음벽이 올라갔다. 서울 외곽의 한정식 식당에서 나온 태서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는 기사와 장 실장, 재인이 타고 있었다.


“그래서요. 이제 시작이니까. 태풍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기분이에요. 조금 겁나요.”

그토록 고민하던 복수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아침이었다. 두려움과 걱정을 솔직하게 내비치는 재인의 손을 그러쥔 태서가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강태서가 조대훈에게 딱 하나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은 윤재인을 세상에 있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버지 역할을 하기는커녕 그녀를 고립시키고 이용하려 한 남자에게 감사의 인사는 차 두 잔 값으로 충분했다. 이제는 윤재인이 원하는 대로 그를 무너뜨릴 일만 남았다.


“겁먹지 말아요. 우리는 태풍에 맞서고 있는 게 아니니까.”

“음…….”

“우리가 태풍의 눈이 되는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답에 재인이 반짝, 눈을 들었다. 아름답고도 결연한 시선이 그를 사로잡았다. 태서는 강인하고도 굳건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제 의지를 전했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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