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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이 밤이 지나면 (66/123)


66. 이 밤이 지나면
2023.02.14.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요? 내가 어제 한국에 도착한 뒤로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데!

{바빴어. 빨리 얘기해.}

―태서가 주말에도 일하는 사람이었어요?

{누가 일했대?}

이어폰을 꽂은 채 테드와 통화하면서 마늘을 볶던 태서가 흘끔, 1층 거실의 소파를 살폈다. 재인은 물놀이 후 지쳤는지 엎드린 자세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수영을 못하는 것처럼 굴더니, 재인의 수영 실력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처음에는 못하는 척, 태서에게 몸을 맡기고 엄살을 피우다가 어느 순간 혼자 잠영만으로 가뿐히 20m 넘게 갔다.

인어 공주 같은 자태에 태서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리자 재인이 여유로운 호흡을 뱉으며 눈을 찡긋거렸다.


“사실, 수영 좋아해요. 처음엔 재활 때문에 시작했는데, 물에서 노는 게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바다 수영을 제일 좋아해요. 프리 다이빙 자격증도 땄어요.”


“……아마추어가 프로를 가르치려 들었네요. 속으로 얼마나 웃었습니까?”


“태서 씨 수영 실력, 아마추어 아니던걸요. 자격증만 땄다 뿐이지, 뭐 없어요.”


“말해 봐요. 수영 말고 좋아하는 운동은?”


“하이킹이나 등산 좋아해요.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은 해 본 적 없어요. 거의 맨몸 운동인 것 같아요. 태서 씨도 알다시피 매일 아침 조깅이랑 요가 하는 게 루틴이고…….”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 둘은 매일 새벽마다 함께 정륜동 비탈길을 달렸다. 하지만 그것도 주말 이전의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주말 내내 조깅 대신 선택한 활동은 운동이라고 이름 붙이기엔 너무나 시도 때도 없었고, 그렇다고 운동이 아니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에너지 소모가 컸다.

대화 나누던 둘은 곧바로 바다에 갈 계획을 세웠다. 해외에 오래 있었던 두 사람 모두 서핑과 다이빙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국내 명소를 둘러보고 싶었다.

날이 풀리는 대로 어디로 가는 게 좋을지 얘기를 나누며 태서는 재인과 함께 한참이나 물속에 머물렀다.

몸이 식는 것 같으면 서로를 안았고, 대화 중간중간마다 입술이 맞닿았다.

같이 샤워하려는 태서를 밀어낸 재인이 2층으로 도망가서 혼자 씻었고, 태서는 1층에서 씻고 나와 배고플 재인을 위해 관자 꽈리고추 파스타를 만들기로 했다.

뽀송뽀송해진 모습으로 담요를 두른 채 소파에 앉아 기대된다며 눈을 빛내던 게 몇 분 전인데, 아이처럼 순하게 잠든 모습에 또다시 욕망이 단단해진다. 태서는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상황에 피식 웃으며 고개 저었다.


 


―한국 도착하면 공항에 누구 하나 나와 있을 줄 알았다고요.

{네가 애야?}

―한국 사람들은 다 친절하다던데, 태서는 확실히 한국 사람 아닌 것 같아요.

{쓸데없는 말 할 거면 끊어.}

―잠깐, 잠깐만요! 부탁이에요. 오늘은 푹 쉴 거니까 찾지 말아요. 내일부터 바빠질 거니까 나도 쉴 자격은 있다구요.

{내가 할 말이야. 내일까지 전화하지 마.}

수화기 너머 입술을 삐죽일 테드의 얼굴을 떠올린 태서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시킨 건 다 했고?}

―그거, 내일 아침까지만 주면 되는 거잖아요…….

{오늘까지 끝내라고 했을 텐데.}

―나도 사람인데 좀 쉬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비행만 몇 시간을 했는데!

이어지는 테드의 볼멘소리를 무시한 태서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장 실장에게 전화 걸었다.


―네, 본부장님. 테드 어제 한국 도착한 이후 바로 정륜동 주택에 체크인한 것 확인했습니다. 급한 상황 아니면 전화하지 말라 하셔서 따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네, 확인 고맙습니다. 그보다, 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주안 엔터 쪽과 연관된 광고가 빠르게 내려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음주 운전이나 학교 폭력이 최근에 민감한 문제로 대두되었던 탓인지, 업계 쪽에서는 빠르게 손절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말이 도는 것만으로도 조심하는 모양새입니다. 계약 해지 및 위약금 소송을 준비하는 업체가 많은 듯합니다.

마늘 향 가득한 팬에 얇게 저민 관자를 넣고 화이트 와인을 뿌리는 태서의 손길이 능숙했다.


“계속하세요.”

―미국 쪽은 저희가 손쓸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미국 마약 단속국에서 전재하를 꽤 오래도록 눈여겨본 모양이더라구요. 대한민국 검찰에서도 전재하와 친했던 연예인들과 주안 엔터테인먼트 소속 직원과, 연예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마약 수사에 들어갈 거라는 얘기가 돕니다.

“그 문제는 됐고. 주안 엔터테인먼트 직원의 성 상납 사건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영업 팀장과 매니지먼트실장, 디렉팅실장이 지속적으로 소속 연예인을 희롱하고 이를 약점 삼아 성 상납에 이용했다는 증거는 확보했습니다. 정재훈 대표가 연루되어 있다는 증거는 현재 관련자를 만나 확보 중입니다.

태서는 재인에 관한 보고서를 읽은 후로 꾸준하게 정재훈의 뒤를 팠다. 아니나 다를까, 겉으로 볼 땐 번지르르한 사업가의 면모를 보여 준 정재훈의 실체는 엉망이었다.

온갖 비리와 불법으로 얼룩진 사업체를 화려함으로 보기 좋게 포장했다.

연예계 밑바닥에서 관행처럼 여겨지는 악습에 적지 않은 돈을 얹어 단시간 내 사업 규모를 키웠고, 그 과정에서 연습생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고 불공정한 계약을 맺은 것은 수두룩했다.

멀끔한 이미지의 재벌 3세라고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대중은 분노했다. 주안 엔터테인먼트와 관련하여 터진 크고 작은 사건이 오늘만 해도 다섯 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예고에 불과했다.


“계속 살펴야 할 겁니다. 음습한 새끼라 바쁜 와중에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니.”

―네, 긴장의 끈 놓지 않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재인이 당한 고통 그대로 느끼도록, 잡아다 어디 끌고 가서 극한의 공포를 느끼게 한 후 다리를 부러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제가 깡패도 아니고,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태서는 법을 이용하기로 했다.

개차반으로 살아온 놈이니 법에 걸릴 것은 허다했다. 관련된 정보를 살짝 흘려주는 것만으로 정재훈에게 자멸할 길을 열어 준 것이다.


“주말마다 미안합니다.”

―저야 뭐, 화초에 물 주는 것 말고는 주말에 할 게 없는 사람인걸요.

정당함을 넘어 넘치는 보상이 따르는 업무에 장 실장은 앓는 소리 대신 콧소리가 나올 지경이라고 했다. 태서는 든든한 제 사람으로 완전히 돌아선 장 실장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일 시키는 사람 부담 덜어 주어 고맙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더 부탁합니다.”

―네. 말씀하세요.

“테드는 계속 확인하고 닦달해야 결과물을 제때 내놓습니다. 전화해서 데드라인 내일 아침까지가 아니라 오늘 자정까지라고 못 박으시구요.”

―어제 한국 도착한 뒤로 피곤하다고, 오늘은 쉴 거라던데요.

“백 퍼센트의 확률로 밤새 게임만 할 겁니다. 누가 윗사람인지 확실히 알게 하는 게 장 실장에게도 좋을 거구요. 겉모습이 귀엽다고 봐주면 끝도 없이 게으름 부리는 성격입니다.”

테드에게는 쉬라고 했지만, 그렇게 놔둘 태서가 아니었다.

스물세 살, 아직 어린 테드는 좋아하는 영화가 개봉하면 3박 4일에 걸쳐 잠도 자지 않고 전 편을 모두 몰아 보곤 했다. 새로운 게임에 푹 빠졌을 때는 일주일 가까이 깨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태서는 테드의 엄살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테드를 조련할 채찍을 장 실장에게 넘기기로 한 결정은 탁월했다.


―아…….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내일 아침까지는 급한 연락만 받습니다. 그럼.”

통화를 끝낸 태서가 반으로 가른 꽈리고추를 팬에 넣었다. 치킨스톡, 면수와 함께 가볍게 볶아 낸 파스타를 접시에 담은 후 잠든 재인에게 다가갔다.


“재인.”

“…….”

“배고프다면서요.”

“으응…….”

“더 잘 겁니까?”

“……냄새 좋다. 배고파요. 근데 졸려…….”

눈 감은 채 제 뺨에 닿은 커다란 손에 코를 묻고 킁킁거리는 재인이 귀여워 태서가 웃음을 참았다. 고개 돌려 식탁 위에 놓인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담요 아래 드러난 동그란 발가락에 머문다.

발가락마저 눈 돌아가게 예쁘면 어쩌자는 건지.

피식 웃음을 흘린 태서가 근질근질하게 느껴지는 이를 드러내며 허리 숙였다. 생각해 보니 다 물고 빨았는데 발가락은 아직 건드리지 않았던 것 같다.


“앗, 왜, 왜요!”

“응?”

뜬금없이 발가락을 깨무는 태서의 입질에 잠이 홀딱 깬 재인이 도망가려 했지만 늘 그렇듯 태서가 더 빨랐다. 가느다란 발목을 붙잡은 채 느긋하게 입맛을 다시는 그를 향해 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발을 왜……!”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의 태서를 향해 재인이 두 팔을 내저었다. 이대로 두면 발만 깨물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지난 이틀간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짜, 진짜 그만요. 우리 파스타 먹고 산책하기로 했잖아요.”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일어날 거예요. 일어났어요.”

“피곤해 보이는데, 좀 더 누워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파스타는 이따가 다시 만들어 줄게요.”

“아니, 아니에요. 안 누워 있을 거예요.”

태서가 슬쩍 손에 힘을 뺀 사이,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재인이 후다닥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서가 어느덧 어둑해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태어나 처음으로 알게 된 평온함은 모두 윤재인 덕이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태서에게는 더없이 소중했다. 흐르는 시간을 자꾸만 붙들어 두고 싶을 만큼, 태서는 주말의 끝자락이 아쉬웠다.

이 밤이 지나면 당분간 현양 건설을 상대하기 위해 바쁠 테다. 거기다 정재훈도 살펴야 할 그에게는 지금 이 시간이 전쟁 전 마지막 휴식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내일부터 그리워하게 될 느긋함을 만끽하기 위해 태서가 일어섰다.

함께 파스타를 먹고, 손잡은 채 동네를 산책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가끔은 입을 맞추어 재인의 뺨을 물들이고 다시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상상하는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 * *

월요일 아침, 아직 주식 장이 열리지 않은 이른 시각이었다. 태서의 집 근처 작은 개인 주택에 마련된 1층 사무실에 태서와 앰버, 장 실장과 테드가 모였다.

태서와 앰버, 장 실장은 모두 정장은 아니어도 당장 업무 파트너를 만나도 손색없을 복장이었다.

2층 침실에서 태서가 내린 업무를 마치느라 밤새도록 시달리다가 1층으로 끌려온 테드만이 흐트러진 머리를 헤집으며 불퉁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앰버 네 의견은 현양 건설의 자금 유입을 끊는 것만으로는 일이 어려울 거라는 거지?}

{응. 사라진 현양 건설 주식 5퍼센트가 어디에 있는지, 그걸 찾는 게 중요하다는 거야.}

조성환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현양 건설의 주식 일부 행방이 묘연했다. 지분 싸움에서 1퍼센트로도 희비가 갈리는 판에, 5퍼센트는 컸다. 현금화하면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듣기로는 조대훈이 현양 건설 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자취를 감춘 주식 일부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지만, 끝끝내 찾지 못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테드. 사라진 현양 건설 주식, 전혀 안 보여?}

{추적이 가능한 건 35년 전까지. 주식을 가지고 있던 조성환이 그때까지는 살아 있던 아내에게 양도했다는 것까지만 확인이 돼요. 그 후로는 전혀 기록이 없어요. 오늘 그거 팔아 치우면 손에 쥐는 돈이 어마어마할 텐데.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보이거나 잊었거나, 둘 중 하나인가 봐요.}

어깨를 으쓱해 보인 테드의 말에 태서가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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