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 붙어 있자는 거지 (65/123)


65. 붙어 있자는 거지
2023.02.10.



“치헌이 문제 관련해서는 저번에 다 끝낸 거 아니었어?”

“그게, 관련해서 영구히 함구하겠다는 약속을 분명히 받았는데…….”

“그런데! 왜 또 말이 나와?”

“아무래도 학교 폭력은 목격자가 많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거기다 이번엔 목격자가 아닌 피해자가 직접 글을 올려서…….”

탕,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친 정재훈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일요일 새벽, 주안 엔터테인먼트 소속 남자 아이돌 그룹의 멤버 중 한 명의 학교 폭력 관련된 폭로 글이 SNS를 뜨겁게 달궜다.

올해 초에 데뷔할 때 말이 나오기는 했다. 그때 재훈은 거금을 들여 폭로 글을 올린 당사자의 입을 막았다. 회사에서도 제일 기대하는 멤버였고, 실제로 팬들 반응도 제일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때를 놓쳤다. 새벽에 비공개 SNS 계정에 올라온 폭로 글은 무시하기엔 상당히 구체적이었고, 발뺌할 수 없는 증거도 함께 올렸다.

거기다 최근 낸 앨범이 대박 나면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손쓸 틈도 없이 일파만파 퍼진 것이다.


“돌겠네…….”

“그리고, 저…….”

“또 뭡니까.”

재훈이 눈을 치뜨자 마케팅 팀장이 시선을 피했다. 입술을 꾹꾹 씹으며 빠르게 눈을 깜빡이는 모양새가 또 무슨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뭐냐고 물었습니다.”

“주 배우, 새벽에 음주 운전 걸렸다는데요.”

“……뭐?”

“여기 들어오기 바로 전에 연락받았습니다. 지금 어떻게든 언론 타는 거 막고는 있는데, 여의찮습니다. 게다가 단속에 걸린 게 이번이 두 번째라…….”

“지금 장난해? 애들 관리 똑바로 안 합니까?”

“죄, 죄송합니다.”

최근에 주 배우가 계약한 광고가 적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죄다 엄청난 규모의 위약금을 물어 줘야 할 판이다. 위약금에서 끝나면 다행이었다. 기존 계약의 경우 손해 배상까지 책임을 물어 오면 꼼짝없이 내줘야 했다.

급하게 연락받고 출근한 일요일 아침, 연이어 터진 악재에 재훈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죄 없는 마케팅 팀장을 향해 짜증 섞인 분노를 쏟아 내려던 때, 다급하게 대표실 문이 열리고 비서실장이 뛰어 들어왔다.


“뭐야!”

“대표님, 저기…….”

“뭔데 노크도 없이!”

“전재하, 지금 체포됐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재하 지금 미국에 있는데!”

전재하는 주안 엔터테인먼트의 간판스타였다. 어린 나이에 아역 배우로 시작해서 10대에는 아이돌로 전향하여 종횡무진 활동하다가 20대 들어서는 모델, 배우, 가수의 영역을 넘나들었다.

어느덧 30대 후반에 이른 전재하의 목소리는 한층 더 깊어졌고 눈빛은 더없이 짙어졌다.

그의 연기가 주는 울림도 훨씬 커졌기에 재훈은 주안 엔터테인먼트를 맡자마자 직접 전재하를 찾아가 큰 계약금을 주고 데려왔다.

그만큼 가장 공들인 아티스트였다. 미국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금수저의 면모를 보여 온 그가 왜 갑자기 문제를 일으킨단 말인가.

영화 한 편 끝내고 마이애미에서 휴식기를 갖는다던 전재하가 갑자기 체포됐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미국 마약 단속국에 걸렸다고 하는데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전재하가 미국 남부를 기점으로 한 거대 조직의 마약류 유통에 연루되어 있다고 지금 막 기사가…….”

“기사?”

신인도 아니고 전재하 급의 대형 스타에 관한 기사가 소속사 확인도 거치지 않고 났다는 상황에 재훈은 아연해졌다.


“어떻게 소속사에서 알기도 전에 기사가 먼저 나! 재하한테 연락은 해 봤어?”

“전화를 안 받습니다. 기사에 보면 이미 증거 확보한 마약 수사대가 조금 전에 조직을 덮쳤고, 전재하도 현장에서 체포되어 수사받는 중이라고…….”

“누가 지금 기사 읊으라고 했어? 당신들, 월급 받아 가면서 하는 일이 뭐야!”

유리 가시 같은 대표의 성격을 아는 마케팅 팀장과 비서실장이 허옇게 질렸다.

따지고 보면 마케팅 팀장이나 비서실장의 책임은 아니었다. 하지만 재훈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눈앞에 있던 두 사람에게 히스테릭한 비난을 퍼부었다.


“어떻게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상황도 몰라! 매니저는 뭘 했고! 도대체……!”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재훈의 입이 딱 다물렸다.


“대, 대표님……?”

“…….”

석상처럼 굳은 대표를 두고 흘끔흘끔 눈치를 살피던 마케팅 팀장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잔뜩 위축되어 있던 비서실장 역시 마케팅 팀장을 따라 조심조심 발을 들었다.


“……강태서, 이 새끼.”

강태서가 다녀가자마자 연달아 터진 악재가 우연일 리 없다. 어느덧 홀로 남은 대표실에서 재훈이 핏발 선 눈을 부라리며 뿌드득, 이를 갈았다.


“이, X 같은!”

악, 끄악, 끄아악! 분을 못 이긴 재훈이 골프채를 들어 대표실 안의 물건들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새로운 악재가 줄줄이 적힌 메모지를 든 비서진이 대표실 문 앞에서 발을 동동거리는 일요일 오전이었다.


 

* * *



“왜 그래요?”

“……귀에 물이 들어갔나?”

지하의 수영장에서 가볍게 한 바퀴 돈 태서가 수영모를 벗고는 귀를 몇 번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털었다.


“한국에 그런 말 있잖아요. 귀 간지러우면 누가 욕하는 거라고.”

“아……?”

“누가 태서 씨 욕하나 봐요.”

재인의 추론에 태서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그녀의 말대로 누군가 제 욕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태서는 지금쯤 눈코 뜰 새 없이 밀려드는 악재에 스토킹은커녕 숨 돌릴 틈도 없을 정재훈을 떠올리며 웃었다.

평생 모친과 조부의 보호 아래 살다가 최근 들어서야 사업하는 흉내를 내기 시작한 그딴 놈을 무너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정재훈에 관한 큰 건은 확인이 필요해서 아직 살피는 중이었지만, 비교적 치명타가 될 수 있는 확실한 몇 가지를 터뜨렸다.

뭐 같지도 않은 게 감히 누구를 울게 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는지, 생각할수록 열받았다.

다소 온건한 재인의 경고는 사실 태서 스타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홀로 감내했던 공포를 이겨 내고 용기 낸 그녀를 존중했기에 그는 말없이 재인의 곁을 지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서 끝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재인에게 고통을 준 것을 평생 후회하도록 철저하게 밟아 줄 생각이었다.

워낙 주변에 폭탄이 많아 크게 공들일 필요도 없었다. 정재훈을 지탱하는 것들 자체가 불안정해서 끊어 내고 튕겨 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고마운 일이네요.”

“욕하는 게 고맙다고요?”

“한국에는 욕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도 있다던데?”

웃음을 터뜨리는 재인을 보는 태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아침까지, 둘은 1층 곳곳을 누비며 서로를 안았다.

밤마실을 마친 고양이를 집 안으로 들이기 위해 재인이 잠시 2층으로 향했던 두 번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던 둘이었다.

꼬박 하루가 넘도록 재인을 괴롭혀 놓고도 에너지 넘치는 태서에게, 재인이 먼저 수영을 권했다. 식사 후 양치질하고 나오기가 무섭게 양심도 없이 또다시 달려드는 남자를 밀어내기 위해서였다.


“잠깐. 잠깐, 태서 씨.”


“듣고 있습니다.”


“아니, 이 상태로 뭘 듣는다고……! 아! 지하에 수영장 있다고 했죠? 구경시켜 줘요.”


“지금……?”


“응, 지금. 당장요.”

 
팔 안에 착 감기어 온 여린 몸에서 떨어지는 것을 내켜 하지 않는 태서를, 재인은 미소 지어 안심시켰다.


“수영하는 거 좋아해서 수영장 만들어 놓은 거죠? 나, 태서 씨 수영하는 거 보고 싶어요.”


“음…….”


“멋있을 것 같아요. 혹시 접영도 할 줄 알아요? 잠영은 얼마나 오래 할 수 있어요? 전에 올림픽에서 잠영 길게 하는 선수 봤는데, 되게 인상적이었어요.”

 
저를 떼어 놓기 위한 속내가 빤히 보이는데도 태서는 순순히 재인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수영복을 챙겨 재인과 함께 지하로 향했다. 재인은 속옷 위에 짧은 반바지와 태서의 티셔츠만 입은 채였다.


“난 구경만 할 거예요.”


“수영할 줄 모릅니까?”


“……미리 말해 두는데, 난 물에 안 들어갈 거예요.”


“수영은 생존의 기본인데, 안 배웠습니까? 가르쳐 줄게요.”


“다음에요. 나 태서 씨 수영하는 거 보고 싶댔잖아요. 빨리 시작해요.”

 
재인은 두어 발 뒤로 물러선 채 느긋하게 물속을 휘젓는 태서를 감상했다. 잠영만으로 25m 길이의 수영장 반대편까지 달한 태서가 접영으로 돌아왔을 때, 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처럼 손뼉을 쳤다.


“와, 선수 못지않은데요? 잘하는 거 맞죠?”


“어지간한 운동은 다 잘합니다.”


“잘난 척하는 게 얄미워서 반박하고 싶어도, 사실이라 못 하겠어요.”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과거의 어두운 기억이 그를 옭아맬 때마다 집요하게 물을 가르며 몸을 혹사했으니 태서의 수영 실력은 어지간한 선수 뺨쳤다.

태서는 제게 푹 빠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도 수영장에 거리를 둔 채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재인을 가만히 응시했다.

혹시 물이 무서운 걸까. 정말 수영할 줄 모르는 걸까. 그게 아니면…….


“욕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 나도 들어 본 적 있어요. 처음에는 욕먹어서 속상할 사람에게 건네는 영혼 없는 위로라고 생각했거든요? 욕먹으면 오래 산다니, 그런 개연성 없는 말이 어디 있어요.”

조곤조곤, 수다를 늘어놓느라 방심한 재인에게 태서가 스르륵 다가갔다.


“그런데 그 말을 수긍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 단순하기도 하고, 뒤끝 없는 성격 고스란히 보여 주는 것도 같고. 그래서 재미있……, 아! 아니! 태서 씨!”

밤새 물고 빤 몸을 가뿐하게 들어 올렸다. 태서가 넓은 어깨에 재인을 안정적으로 올려 대롱대롱 매달고는 여유롭게 걸음을 뗐다.


“태서 씨, 내려 줘요!”

“걱정할 것 없습니다. 수영장 물은 재인 씨 어깨까지 오는 높이니까.”

“그게 아니라! 난 지금 수영할 기분이……!”

“수영하자는 거 아닙니다.”

발버둥 치는 게 무색하게 끄떡도 하지 않은 남자는 재인을 안은 채 휙, 따뜻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앗……!”

순식간에 흠뻑 젖은 재인이 눈을 꾹 감았다 뜨며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저도 모르게 태서의 허리에 다리를 감은 뒤였다. 이마를 맞대어 눈높이를 같게 한 태서가 근사하게 미소 지었다.


 


“붙어 있자는 거지.”

“…….”

재인은 물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었다. 수영을 빌미로 잠시나마 태서와 조금 거리를 두려던 것뿐이었다. 그렇게라도 그의 열기를 식히려 했을 뿐인데, 여우 같은 남자에게 얕은수를 들킨 것이다.


“왜 그런 눈으로 봅니까.”

“……우리 이틀 밤 내내 붙어 있었어요. 태서 씨는 정도를 모르네요.”

“정도가 다 뭡니까. 말 그대로 환장하겠는데.”

재인은 뻔뻔한 속내를 밝히는 남자를 쏘아보았다. 그런 행동이 태서의 욕심에 더 큰불을 지핀다는 사실을 모르니 하는 행동이었다.

그린 듯, 깎은 듯, 잘난 입술이 또다시 재인의 뺨과 콧잔등에 내려앉았다. 재인이 힘주어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사뭇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는 안 돼요.”

“다른 데서는 됩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쿡쿡, 웃음을 터뜨린 태서가 재인을 바짝 당겨 안았다. 애정 담뿍 담은 가벼운 입맞춤이 수없이 이어졌다. 태서를 향하는 재인의 눈 흘김이 눈웃음으로 변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온전히 두 사람만의 시간으로 꽉 찬 주말이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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