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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떨어지기 싫어서 (64/123)


64. 떨어지기 싫어서
2023.02.07.



“왜, 왜 또…….”

남자는 씻으러 간다며 저러고 일어섰다가 되돌아왔다. 먹을 것을 챙겨 온다며 나가다가도 또 뒤돌아보고 달려들었다. 그때마다 재인은 샤워를, 식사를 한참이나 미뤄야 했다.

그때와 같은 눈빛을 알아챈 재인이 본능적으로 시트를 말아 쥐었다. 그 모습에 미안함을 느꼈는지, 딱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내려 웃는 태서의 표정이 얄미웠다.


“물, 물요!”

“응.”

속삭임과 함께 순식간에 몸이 들렸다. 시트에 돌돌 싸인 재인을 품에 들어 가볍게 안아 올린 것이다.


“물 가져다준다면서 왜……!”

“떨어지기 싫어서.”

“…….”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1층의 작은 냉장고 앞에 선 남자가 재인을 근처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한 손으로 냉장고를 열면서도 다른 한 손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였다.


“마셔요.”

굳이 한 손으로 생수병의 뚜껑을 따서 내미는 남자를 보니 어이없어 웃음이 샜다. 꼴깍꼴깍, 차가운 물을 달게 넘긴 재인에게서 병을 받은 태서가 자연스레 제 입에 댔다.

물을 삼킬 때마다 도드라진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급히 마시느라 입가에 흐른 물방울이 그의 몸을 타고 흐른다. 재인은 아무 생각 없이 그 물방울을 따라 시선을 내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 돌렸다.

거실을 비추는 희붐한 새벽빛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어느덧 아침이 다가온 모양이다. 재인은 쏜살같이 흘러간 지난밤을, 온통 새빨갛고 새하얗던 시간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태서는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반추하듯 지난밤을 아로새기는 눈동자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더 봐도 됩니다.”

“더 안 볼 거예요. 결말을 알거든요.”

“결말, 최고던데?”

“…….”

“아, 조금 부족했나?”

“지금 그걸 말이라고…….”

부족하긴커녕 차고 넘쳤다. 매일 하던 운동으로 단련된 그녀마저 온몸을 두드려 맞은 것 같은데, 세상 개운해 보이는 남자는 부족하다고 얘기했다.

태서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리는 재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단숨에 생수 한 병을 비워 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허리 숙여 재인의 양옆으로 팔을 뻗었다.


“많이 아픕니까?”

“……참을 만해요.”

아프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재인 역시 지난밤이 더없이 좋았다. 평생 추억할 소중한 순간을 안겨 준 그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마음 쓰여 괜찮다고 답했다.


“미안해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나도 좋았어요.”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그가 정신 놓고 달려든 건 맞지만, 어떤 순간엔 그녀가 먼저 그를 부추기고 보채기도 했다. 그러니 재인은 그를 탓할 수 없었다.

물 때문에 차가워진 입술이 사과하듯 닿아 왔다. 이마, 눈, 귓가, 콧방울과 뺨, 입술까지 눈이 닿는 곳마다 입 맞춘 남자가 윙크하듯 한쪽 눈을 접어 웃었다.


“가끔 되게 얄밉게 웃는 거 알아요?”

“내가?”

의아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떠 보이는 남자를 흘겨보며 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태서 씨가 되게 쿨한 사람일 줄 알았어요.”

“아닌데. 나 되게 질척거리는 사람인데.”

평생 질척거림이라고는 몰랐을 사람이 잘도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그 거짓말이 싫지 않았다. 싫기는커녕 오직 제 앞에서만 보여 주는 모습 같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 남자에게 단단히 빠진 모양이다. 재인은 시시각각 깨닫는 제 감정의 깊이에 놀라는 중이었다.


“말했잖아요. 손에 들어온 건 안 놓친다고. 집요하게 굴 거라고.”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 느물거리는 사람인 줄도 몰랐고요.”

“느물거려……?”

“능글맞게 군다고요.”

“아하…….”

뻔뻔한 반응에 재인이 피식 웃음을 흘리자 태서가 다시금 번쩍,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래서, 싫습니까?”

“싫은 건 아니지만…….”

빙긋이 웃은 남자가 1층 거실의 안락의자에 저를 내려놓을 때까지만 해도 재인은 안심했다.


“빨리 익숙해져야겠다.”

하지만 이어진 속삭임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은 순간, 쥐고 있던 시트가 그녀의 몸에서 황망하게 떨어져 나갔다.

아까 미안하다고 말했던 게 혹시 이 뜻이었나. 괜히 참을 만하다고 했나. 재인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지만, 태서는 가뿐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 제 어깨 위에 올렸다.


“아니, 내 말은…….”

“쉿. 익숙해져야지.”

상큼하게 미소 지은 남자가 따끈한 재인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여린 살을 가득 베어 물며 지난밤 제가 새겨 놓은 흔적을 따라 입술을 옮기는 그로 인해 재인은 다시금 눈을 감아야 했다.

번지는 간지러움에 웃음이 섞여 들었다. 웃음 사이사이를 놓치지 않는 입맞춤에 재인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토요일 아침, 서로에게 푹 빠진 연인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 * *



“태서 씨가 나보고 엄마랑 얘기 좀 하라던데, 그게 무슨 말이야?”

“너, 강태서 만나고 왔어?”

“그래, 만났어. 언제는 또 자주 안 만난다고 뭐라고 하더니?”

“엄마가 당분간은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

“내 남자 내가 만나겠다는데 안 될 이유 있어? 도대체 뭐야? 왜 이러는 건데!”

술이 떡이 되어 새벽녘에야 들어온 유리는 늦은 오후, 잠에서 깨자마자 승희를 찾아왔다. 태서가 눈치도 없고 머리도 나쁘다고 했던 말을 밤새 곱씹은 결과였다.

그런데 승희는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오히려 화를 냈다. 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만 보여 주던 엄마가 아니었다.


“너, 잠깐 외삼촌한테 좀 가 있어.”

“내가 왜!”

“해결되면 부를 테니 그렇게 알고.”

이유는 말해 주지 않고 갑자기 일본에 있는 외삼촌에게 가 있으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유리가 아니었다. 유리는 한참이나 제 엄마를 노려보았다.


“엄마, 윤재인 걔한테 뭐 약점 잡힌 거 있어?”

“……뭐?”

“아니면, 태서 씨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잖아!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아빠한테도 말 못 하게 하고. 강태서 만나는 것도 뭐라 하고!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승희가 깊은 한숨과 함께 관자놀이를 짚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져 가며 제 엄마의 입이 열리기만 기다리던 유리가 더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엄마 못 믿겠어. 나 아빠한테……!”

“엄마 말 들으랬지!”

“강선 그룹이랑 결혼하는 거 제일 강조한 사람이 아빠야. 아빠가 내 결혼 어그러지게 둘 리 없어.”

통화 목록에서 아빠를 찾아낸 유리가 터치하기도 전, 다급하게 일어선 승희가 유리의 핸드폰을 빼앗아 소파 위로 내던졌다.


“엄마!”

“지금 네 결혼이 문제인 줄 알아?”

“그러면 뭐가 문젠데! 내 결혼보다 더 큰 문제가 뭔데! 일곱 살 때부터 나는 강태서랑 결혼하는 줄 알았어. 20년 넘게 그 말을 믿으면서 살아왔다구! 그런데 강태서가 자기는 내 남자가 아니래. 헛꿈 꾸지 말래. 지금 내가 안 돌게 생겼어?”

물러섬 없는 대치 끝에 승희가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포기해.”

“엄마!”

“너 싫다는 남자를 왜 만나! 자존심도 없어?”

“어, 없어. 강태서 앞에서는 없어. 지금 자존심이 문제야?”

“평생 너만 아끼고 소중히 여겨 줄 남자를 만나란 말이야! 엄마는 그렇게 못 살았으니까 너라도 그렇게 살란 말을 이해 못 하겠어?”

“이제 와서? 여태껏 나 부추겨서 강선 아트 센터에 얼굴도장 찍으라고, 강태서 만나 혼을 쏙 빼놓으라던 엄마였잖아. 그런데 나보고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그게 말이 돼?”

울분을 터뜨리며 악쓰는 딸을 보던 승희가 입술을 짓씹었다.


“못 떼어 내.”

“……엄마.”

“남자가 여자한테 돌면, 눈이 어떻게 되는 줄 아니?”

“…….”

“강태서가 딱 그런 눈이더라. 제가 좋아하는 여자 건드리면 다 뒤엎을 기세였어.”

“…….”

“엄마가 안 만나 본 거 아니야. 이 철없는 것아. 엄마가 다 널 생각해서…….”

“날 생각하면!”

유리가 벌떡 일어섰다. 격분에 휩싸인 턱이 파들파들 떨렸다.


“엄마가 진짜 날 생각하면 포기하라고 말할 게 아니라, 가서 강태서를 혼내 줘야지! 어른이 되어서 약혼녀 두고 뭐 하는 짓이냐고 따끔한 말 한마디라도 해 줘야지! 약혼 깨지면 내가 얼마나 우스워지는 줄 알아? 나는, 나는…….”

“……너 아니야.”

“……뭐?”

승희의 말을 못 알아들은 유리의 미간이 깊게 팼다.


“강태서 약혼녀, 유리 네가 아니라고.”

“그게 무슨, 하!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

“……윤재인이야.”

“…….”

“강태서 그놈이 제 짝 알아보고 찾아간 거라고! 애초에 네 할아버지가 강태서랑 결혼시키려고 약속했던 손녀딸은 네가 아니라 윤재인이었다고!”

충격으로 부들부들 떠는 유리의 동그란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 *



“진짜 좋은 기회인 거, 알죠? 정태가 전부터 제 병원 자리 탐냈는데, 그래도 선배 생각이 나서요.”

석동이 친하지도 않은 선배를 만난 이유는 간단했다. <강남오석동치과> 자리를 두고 관심을 보인 대학 동문들을 상대로 간을 본 결과, 이 선배가 제일 비싼 매매가를 불렀기 때문이다.


“그래. 대신에 너 인마, 제대로 해.”

“제 병원이다, 생각하고 할 겁니다. 물론 대표 원장은 선배님이시지만요.”

“똑바로 안 하면 안 돼. 나는 후배여도 안 봐준다.”

깐깐하고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선배 밑에서 월급 원장으로 일할 생각 하면 앞이 깜깜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방법은 이것뿐이다. 석동은 쓰린 속을 달래 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 좋은 <강남오석동치과>를 탐내는 이는 많았다. 처음엔 2층 치과만 내어 주고 보증금과 권리금, 임대료만 받아 챙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세를 알아보니 제가 필요한 돈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석동은 결정했다. 치과가 차지한 남광 빌딩 2층 전체를 팔아 버리기로. 빌딩 전체를 파는 것도 아니고, 2층만 파는 건데 큰 문제 될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나중에 돈을 모아 다시 되사면 그만일 테니.


“제가 크게 돈 쓸 일이 있어서 파는 겁니다. 자리 진짜 좋은 거 선배도 알잖아요.”

“그런데 자리가 좋아도 건물이 너무 낡아서……. 인테리어도 그렇고, 공사는 해야겠다.”

“그건 선배 입맛대로 하세요. 그러면, 계약은 월요일에?”

“응. 큰돈 오가는데 전문가가 껴야지. 월요일에 보자.”

석동이 고개 끄덕이며 치과를 나섰다. 월요일에 공인 중개사를 끼고 2층을 팔면 석동이 진 빚을 모두 갚을 수 있다. 남은 돈으로는 날이 갈수록 휑해지는 앞이마에 머리카락도 양껏 심을 수 있을 터다.

게다가 정말 확실한 투자 정보가 있는데도 총알이 없어서 장전을 못 했다. 늦게라도 합류해야 했다. 한때 수학 천재라 불렸던 그다. 주식이든 코인이든, 뭐든 확률과 통계의 문제가 아닌가.

다시 엄마의 자랑스러운 아들로 거듭날 계획을 세운 석동의 콧구멍이 보기 싫게 벌름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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