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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쿵쿵 (63/123)


63. 쿵쿵
2023.02.03.



“저녁을……!”

제 눈으로 확인한 것에 당황한 나머지 새빨개진 얼굴을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하고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저녁을, 그러니까, 배고프지 않아요? 미리 연락하고 내려올 걸 그랬죠. 미안해요. 조금 전에 깼는데, 생각해 보니까 점심도, 저녁도 안 먹었더라구요. 태서 씨도 아직 식사 전일 것 같아서. 그래서!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부끄러워해야 할 건 난데. 왜 재인 씨 얼굴이 빨개져요.”

목에 걸쳐 놓았던 수건을 내려놓은 태서가 성큼 다가섰다. 부끄러워해야 할 게 저라는 사람의 얼굴은 새하얗고 말갛기만 했다.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는 모습은 오히려 지금 상황을 즐기는 모양새였다.


“미안해요. 갑자기 내려와서…….”

“갑자기라 난 더 반가워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태서 씨 공간인데. 태서 씨 편하게 있는데 내가 괜히…….”

“편하다니. 전혀 아닌데.”

훅, 끼친 열기에 횡설수설하던 재인의 입이 다물렸다. 어느새 태서가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또다시 그의 품이었다. 길고 다부진 팔이 그녀의 등을 감아 받친 채였다.

재인이 고개 꺾어 태서를 올려다보았다. 손에 닿은 그의 살갗이 뜨끈했다. 탄탄하고도 매끈한 가슴팍의 촉감에 손바닥이 저릿하게 간지러웠다.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이 제 것인지 그의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재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태서가 작정하고 짓는 미소에 홀린 듯, 그저 저를 내려다보는 그와 눈 맞출 뿐이었다.


“지금, 상당히 불편합니다.”

“왜요…….”

“편해지게 해 줄래요?”

“…….”

“해 줘요.”

부지불식간에 가까워진 거리를 깨닫기도 전에 조금은 서늘하게 느껴지는 코끝이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어리광을 부리듯이 코를 비비고 이마를 맞대는 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재인은 멍하니 눈에 담았다.


“응?”

“태서 씨…….”

“재인 씨만 할 수 있어요. 응?”

빙글, 재인의 시야가 돌았다. 마치 춤추듯, 능숙하게 그녀를 안은 태서가 이끄는 대로 재인은 그의 침실 안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대로 그를 따라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면서도, 말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배고파요?”

“…….”

“조금도 못 참겠어요?”

슬며시 일그러뜨린 눈썹 아래 깊은 눈에 담긴 것은 오로지 그녀였다. 배려심 깊은 질문이 친절함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제가 뭐라고 대답하든 그가 원하는 대로 될 거라는 것을 재인은 예감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그건 재인이 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테니.


“얼마나요……?”

“글쎄……. 나도 처음이라.”

웃으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속삭이는 그에게 뭐라 답하려는데 순식간에 몸이 들렸다. 졸지에 문 옆에 놓인 콘솔 위에 앉게 된 재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답해 줘요. 지금 배고파요?”

마지막 배려라는 듯 태서가 물었다. 두 팔로 콘솔 가장자리를 짚어 작은 몸을 가둔 남자는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배고픔은 잊혔다. 속에서부터 바글바글 끓어올라 부피를 키워 대며 간지럽히는 감각 때문이었다. 강태서가 일깨운 감각의 끝이 궁금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기에 두렵지 않았다.

깜빡깜빡, 커다란 눈을 덮은 눈꺼풀이 나른하게 내리닫히기를 두어 번. 이윽고 재인이 입을 열었다.


“……참을 수, 있어요.”

“…….”

“다정하게……, 대해 줘요.”

“하아…….”

그녀의 대답에 고요하던 밤빛 눈동자에 파문이 인다. 일렁이기 시작한 불길이 삽시간에 타오른다. 꿀꺽, 재인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 안쪽을 지그시 베어 물었다.

태서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살 쓸었다. 나른하게 찡그린 근사한 얼굴에 곤란함이 묻어났다. 마구 해 대고 싶은 걸 꾹꾹 눌러 참는 눈치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게 될까……, 모르겠습니다.”

농밀해진 공기에 그가 뱉은 더운 숨이 섞인다. 재인은 열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에 그를 담았다. 크게 들썩이는 가슴, 자꾸만 움츠러드는 손끝마다 불쾌하지 않은 긴장이 실렸다.


“재인 씨가 이해해 줘요.”

“뭘요……?”

재인이 꾹꾹 베어 물고 있던 도톰한 아랫입술이 그의 손에 문질러지고 뭉개진다. 태서가 그녀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듯, 재인 역시 숨죽여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는 것을 눈에 새겼다.


“나는 지금, 못 참겠어.”

“아…….”

눅눅한 숨결을 내뱉자마자 인내심이 다한 그가 밀려왔다.


 

* * *

먹힌다.

삼켜진다.

재인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더듬었다. 이렇게 닿아 있는데도 더 닿고 싶은 것은 왜일까.

저를 향하는 그의 욕심이 반가웠다. 더, 더 원하는 그에게 더, 더 내어 주고 싶다. 서로가 부족하고 갈급해 애가 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를 아껴 주는 만큼 나도 그를 아껴 주고 싶어서.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나도 그가 소중해서. 재인은 그의 손에 뺨을 비비며 한껏 도톰해진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의 곁은 따뜻하고 안전했다. 눈빛 한 번, 말 한마디에 저를 향하는 진실된 마음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늘 윤재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 강태서는 그런 사람이었다.

재인이 눈을 감았다. 태서의 품에 안겨 평생 쌓아 온 외로움과 서러움이 와르르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아프고도 감격스러운, 아주 이상한 경험이었다.

쿵쿵,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뛴다. 쿵쿵, 바스러지고 허물어지는 곳마다 새로이 그가 들어찬다. 재인은 자꾸만 차오르는 울컥거림을 참아 내며 욕심껏 그의 손을 쥐었다.

들판에 부는 바람처럼 속속들이 그와 맞닿고 싶었다. 흔들리는 꽃잎처럼 겹겹이 그와 포개지고 싶었다. 손가락 하나, 마음 한 귀퉁이도 빠뜨리지 않고 그가 머물러 주기를 바랐다.


“태서, 태서 씨.”

“응.”

“내게서, 눈 떼지 말아요.”

“…….”

“계속, 계속……. 계속 날 봐요.”

남자의 밤빛 눈빛이 짙어진다. 그 애틋한 시선을 오롯이 차지하고 싶은 마음에 재인이 버거운 숨을 몰아쉬며 떼썼다. 하지만 끝끝내 먼저 눈 감은 것은 재인이었다.


“아…….”

마침내 새하얗게 부서지고 미련 없이 무너진 끝에 터져 나온 감정은 눈부시고 찬란했다.

내가 너이기를. 네가 나이기를. 이제 우리, 홀로 서럽지 않기를.

소용돌이치는 감각의 홍수에 휘말린 재인은 방향을 잃었다. 하지만 떠밀리고 떠밀리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가슴 먹먹하도록 꽉 찬 기쁨이 그녀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아늑하고도 따스한 물에 푹 잠기어 유영하던 그녀는 제 눈가에 닿아 오는 상냥한 입맞춤을 깨닫고 눈 떴다. 가물가물한 시야에 보이는 것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의 강태서였다.


“왜…….”

그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염려가 한가득 배어 나오는 손길에 먹먹해지는 가슴을 들썩이며 재인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울 정도로 아팠습니까……?”

걱정 가득한 남자의 질문에 재인이 고개 저었다. 저도 모르게 울었나 보다. 젖은 눈가를 가만가만 살피는 그가 애틋해서 한 올 한 올 가슴에 사무친다.


“좋아서 울어요. 강태서, 당신이 좋아서.”

가슴을 들썩이며 버거운 감정을 삼켜 내는 남자를 보고 있으니 꽉 찬 충족감에 절로 입매가 휘었다. 그의 품에 녹아내리듯 자리 잡아 스스럼없이 팔을 벌려 안았다.

마침내 되돌아온 현실에서 이마를 맞댄 둘이 웃었다. 눈꼬리를 타고 흐른 눈물은 쉴 새 없는 입맞춤에 흔적 없이 사라진 뒤였다.


 

* * *



“아…….”

눈을 뜨기도 전에 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둔통이 먼저 그녀를 반겼다. 자세를 고쳐 누우려던 재인은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 발가락만 꼼지락대는 것으로 기지개를 마쳤다.

데굴, 눈을 굴려 봤지만 암막 커튼 때문에 시각을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등 뒤에서 빈틈없이 저를 옭아맨 남자는 깊이 잠든 듯했다. 섣부른 탈출을 포기한 재인은 제 허리를 가로지르는 남자의 단단한 팔로 시선을 내렸다.

엄마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와 한 침대를 쓰는 것이 처음이었다. 타인의 체온이 이렇게 높았었나. 등에 뜨끈하게 닿아 오는 태서의 온기가 낯설면서도 좋았다.


“집에 이런 게 있다고 해서 오해하지 말아요. 나, 처음입니다.”

 
재인의 눈이 커졌다. 저야 남자들에게 시달리며 끔찍했던 날들을 보낸 탓이라고 쳐도, 나이 서른 넘어서 처음을 고백하는 남자라니. 게다가 이렇게나 능숙한데.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집에 왜 있느냐고 묻는다면.”

 
세 번째였나, 네 번째였나. 그것도 아니면…….

잘 모르겠다. 계속해서 욕심껏 재인을 탐하던 그가 협탁 서랍으로 손을 뻗으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재인은 침대 주변에 널린 욕망의 잔해들을 모르는 척하며 쓸데없이 솔직한 남자에게서 고개 돌렸다.


“사실, 윤재인 씨랑 이러고 싶은지는 좀 돼서.”


“…….”


“시카고 출장 다녀오면서 맞는 사이즈로 몇 박스 사 왔습니다.”


“몇 박스나…….”


“준비성 철저하다고 칭찬해 줄 겁니까?”


“…….”


“칭찬해 줘요. 지금부터, 적극적으로, 계속.”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남자의 고백과 응석에 웃음을 터뜨렸지만, 유쾌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행위의 끝에 재인은 조금 짜증을 부렸던 것도 같다.


“더는, 더는 못 해…….”


“…….”


“아프단 말이야.”


“……미안.”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사람이면…….”


“짐승같이 군 것, 인정할게요.”


“말이라도 못하면…….”

 
그게 재인이 잠들기 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타박을 다 잇지 못하고 지쳐 쓰러지듯 잠들어 버린 것이다. 지난밤, 끊임없이 밀려들었던 남자의 몸짓과 손짓, 눈빛을 떠올린 재인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애써 생각을 흩뜨리려 눈을 꼭 감았다 뜬 그녀가 제 허리를 감싼 남자의 팔을 슬쩍 들었다. 조심스럽게 옮겨 빠져나가려 했지만.


“……!”

손목이 턱, 붙잡히자마자 데구루루 굴렀다.


“잘 잤어요?”

“……아뇨.”

“왜요. 잠자리가 불편했습니까?”

재인은 그의 배 위에 엎어진 채였다. 하룻밤 사이 몸을 맞대는 것이 이렇게나 자연스럽다. 입술을 꼭 깨물고 고개 드니 천연덕스러운 눈을 한 남자가 싱긋 웃었다.


“왜일 것 같은지, 잘 생각해 봐요.”

답을 아는 남자는 침묵으로 그녀의 눈 흘김을 넘길 모양이다. 재인이 퉁퉁 부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목말라요.”

“가져다줄게요.”

또다시 빙글, 세상이 돈다. 저를 바로 누이고 순식간에 트레이닝팬츠를 찾아 입은 남자가 일어섰다. 문을 향해 나서다 말고 뒤돌아서는 남자 때문에 재인이 눈을 홉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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