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아래로,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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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아래로, 아래로
2023.01.31.
“정재훈, 이 빌어먹을 새끼…….”
정재훈을 만나기 전, 태서는 재인에게 사고에 대해 자세히 들었다. 이미 보고서를 통해 알고 있었고 한 차례 그녀에게 들은 적도 있었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재인은 몇 번이나 말을 하다 멈췄다. 떠오르는 기억에 괴로운지 눈을 감고 파르르 떨곤 했다. 사고 당시의 상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듣는 내내, 태서는 당시 그녀가 느꼈던 공포를 실감할 수 있었다.
여린 몸으로 광기를 고스란히 견뎌야 했을 재인이 안타까워 콧날이 시큰해졌다. 당장이라도 재인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정재훈을 번쩍 들어 바닥에 꽂아 버리고 싶었다.
모든 이야기를 마친 그녀에게 태서는 온 힘을 다해 돕겠다고 했다. 밟고 싶으면 밟고, 부수고 싶으면 부수라며 트라우마와 맞서기로 한 그녀의 결심을 응원했다.
그래서 재인을 찾아 그녀의 오피스텔까지 찾아왔다는 정재훈을 앞에 두고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은 놈을 보면서도 어금니를 지르물며 화를 참았다.
제 화보다 재인이 가진 감정의 크기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분노를 쏟아 내는 것은 재인의 몫이었다. 그걸 알기에 태서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 태서 씨 곁은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그러니 곁에 있게 해 줘요.”
잠들기 전, 정신 나간 스토커로부터 지켜 달라는 말을 예쁘게도 하는 통에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쿵쾅대는 심장을 다잡아야 했다.
“태서 씨 덕에 용기 낸 거예요. 혼자서는 힘들었을 거야.”
“용감하네, 윤재인.”
“그쵸?”
“응. 용감한 윤재인 씨, 지금은 좀 자는 게 좋겠어요.”
“나도 그러는 게 좋겠어요. 자꾸만 눈이 감겨.”
태서가 해 줄 수 있는 건 등을 토닥이고 차가워진 손을 잡아 주는 것뿐이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힘들어하는데 해 줄 수 있는 게 고작 그것뿐이라니.
하염없이 떨어지는 물을 맞던 태서가 고개 숙였다. 젖은 머리칼 사이로 밤빛 눈동자가 차게 빛났다.
* * *
슥슥, 무언가를 긁는 소리에 재인이 눈을 떴다. 그녀의 방에는 태서가 선물해 준 조명만이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암막 커튼이 쳐져 있어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그녀가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때였다.
득득, 슥슥.
또다시 들려온 소리에 재인이 일어섰다. 태서의 집에서 지낸 이후로 조금은 익숙해진 소리였다.
“산책하러 가려고?”
문을 열자마자 거실의 커다란 창 쪽을 향해 속삭이자 대답하듯 먀오옹, 소리가 들려온다. 창 아래 얌전히 앉은 것은 역시나 암갈색 고양이었다.
“잘 다녀와.”
창문을 열어 주자마자 고양이가 밖으로 나갔다. 아침은 되어야 돌아올 고양이를 배웅하고 시계를 확인하니 저녁 여덟 시가 넘은 뒤였다.
재인은 창문을 닫고 거실을 살폈다. 알코올 벽난로가 켜진 거실은 바닥도, 공기도 냉기 하나 없이 훈훈했다.
침실도, 거실도 춥거나 캄캄하지 않다. 어둠을 밝히는 온화한 불빛을 바라보던 재인이 뺨을 감쌌다. 동거인의 자상한 배려에 미소가 번진 뺨이 간지러웠다.
“음…….”
같은 집에서 지낸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간다. 하지만 태서가 그녀의 방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우는 그녀를 다독이던 그는 재인과 함께 그녀의 침대에 누웠다.
그의 품에 안겨 얼마나 울었을까. 어느덧 울음이 잦아든 재인에게 티슈를 건넨 태서는 상체를 일으켜 앉은 채였다. 코를 훌쩍이던 재인은 제 눈물로 축축해진 태서의 옷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보지 말아요.”
“왜요.”
“……흉해요.”
“예쁜데.”
따뜻한 손으로 귓가를 매만지고 결을 따라 눈썹을 쓸어 주던 남자를 떠올리니 목까지 빨개졌다.
“나 정말 잘 우는 사람 아닌데……. 태서 씨에게 자꾸 우는 걸 보이게 되네요.”
“특별하다니, 좋네.”
저 좋을 대로 해석하며 웃는 남자 덕에 푸스스, 웃어 버렸다. 제 꼴이 어색하고 부끄러워 그가 토닥여 주는 내내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그대로 잠이 든 것이다.
“못 살아…….”
이렇게 된 이상 새벽에나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부터가 주말이어서 다행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재인이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물을 받는 사이, 거울을 통해 평소보다 빨개진 눈을 마주하자 탄식이 절로 나왔다. 실컷 울다가 푹 자고 일어난 뒤여서 그런지, 눈과 코, 뺨까지 퉁퉁 부어 있었다.
“이 꼴을 보고 잘도 예쁘다고…….”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젓고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온몸의 긴장이 풀어지자 낮의 일이 떠올랐다.
“날 찾았다고 들었어.”
“재인아, 나는 그때 정신 차리자마자 널 찾아갔었어. 나는…….”
“당신이 그래도 인간이라면, 날 찾은 이유가 단 하나여야 해. 8년 전 일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서. 그게 아니면 당신이 날 찾을 이유는 없어.”
대답하지 못하는 재훈의 눈이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재인은 끔찍하리만큼 꼴 보기 싫은 인간 앞에서 차분하려고 애썼다. 화를 터뜨리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 안간힘을 다해 참았다.
너 같은 쓰레기 때문에 힘들었다고, 수많은 밤이 지옥 같았다고 말해서 그를 기분 좋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재인은 알고 있었다. 비틀린 정재훈이라는 인간은 그녀의 시간을 제가 좀먹었다는 사실에 기뻐할 거라는 것을.
그래서 최대한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 했다. 그러느라 꽉 쥔 주먹을 곁에 앉은 태서가 커다란 손으로 가려 주었다.
차가워지는 손끝을 꾹꾹 눌러 주었다. 광기가 겉도는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8년 전의 공포가 되살아났지만, 재인은 태서 덕에 용기 낼 수 있었다.
“사고 났던 건……, 미안해. 다리는 좀 어때?”
“사고 났던 거?”
겨우 입을 연 재훈의 말에 재인은 기가 막혔다.
“사고 났던 게 아니라, 당신이 사고를 냈던 거지. 날 납치하고 협박했는데도 마음대로 안 되니까.”
“…….”
“같이 죽자고.”
재인이 반듯한 시선을 들어 재훈을 보았다. 저를 향한 선망의 눈빛이 여전하다는 게 어이없었다. 덕지덕지 들러붙는 그 시선을 떼어 내야 했다.
“난 당신한테 사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준 거야. 그런데 당신은 지금 그 기회를 날린 거고.”
“…….”
“모르는 것 같아서 얘기할게. 잘 들어.”
징글징글한 인간에게 그 어떤 빌미도 주고 싶지 않았다. 제 손을 든든하게 감싼 온기를 느끼며 심호흡한 재인이 입을 열었다.
“나, 너 끔찍해.”
그 어떤 빌미도 주고 싶지 않았다. 재훈의 시선이 제 손을 잡은 태서의 손에 닿아 있는 것을 깨달은 재인은 소름이 돋은 팔을 무시하며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네 손을, 네가 내 손을 잡는 날은 오지 않아.”
“…….”
“그러니 선택해. 하던 사업 하면서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아갈지, 오랜 죄목과 함께 뉴스에 나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지. 나, 당신 하나쯤은 무너뜨릴 수 있어.”
정재훈과 그녀의 사이에 앉은 태서가 제 말에 고개 끄덕이며 눈을 맞춰 왔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듯이. 그래도 된다는 듯이.
“내가 당신을 다시 보게 된다면, 그건 법정에서일 거야. 죗값 치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내 주변에 얼씬거리지 마.”
같잖은 사과라도 받으려 했던 이유는 그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였다. 그렇게라도 정재훈이라는 인간 말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정재훈을 보며 재인은 인간다운 마무리를 포기했다. 제멋대로 희망을 품는 그에게 절망을 주어야 했다.
“재인, 재인아. 내 말 좀 들어 봐.”
“사과 외에 다른 할 말이 있다면 서면으로 보내. 주소는…….”
“강선 건설 본부장 강태서 앞.”
여태 기다려 준 태서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재인을 따라 일어선 그가 재훈을 쏘아보았다. 잘 벼려진 칼날 같은 눈빛에 살기가 등등했다.
“단, 뭐든 보낼 때 각오는 해야 할 겁니다.”
재훈의 사무실을 나설 때 제 등과 어깨를 가로지르던 그의 팔을 기억한다. 가만히 태서를 생각하던 재인은 목욕을 마무리 지었다. 물기가 남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두드리는 그녀의 시선이 계단을 향했다.
정신없는 와중에 점심도, 저녁도 굶었다. 태서가 요가원에 같이 점심 먹자고 왔다고 했으니, 그 역시 여태 식사를 안 했을지도 모른다. 재인은 2층과 1층 사이에 설치된 방묘문으로 향했다.
같이 밥을 먹자고 할 생각이었다. 사실. 밥은 핑계다. 오늘 그녀의 곁을 지켜 준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그것도 핑계다. 윤재인은 강태서가 보고 싶었다.
* * *
조심스럽게 1층으로 내려온 재인은 제 섣부른 행동을 후회했다.
“미리 메시지라도 보내 놓을 걸 그랬지.”
굳게 닫힌 침실 문 앞에 선 그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조용한 가운데 울려 퍼질 노크 소리를 생각하니 쉽게 문을 두드릴 수 없었다. 문 앞에 주먹을 대려다 물러서기를 몇 번, 재인은 손을 내렸다.
밥은 먹었는지, 아직 안 먹었다면 같이 저녁 먹지 않겠냐고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다시 2층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핸드폰을 가지러 가려던 재인이 막 몸을 돌리던 때.
“재인 씨……?”
달칵―. 열린 문 너머로 놀란 얼굴을 한 태서가 서 있었다. 회색 트레이닝팬츠만 입은 채로.
“아.”
막 씻고 나왔는지, 그의 체향에 섞인 비누 향이 아찔했다. 물기가 덜 닦인 상체를 조밀하게 채운 근육이 매끄럽게 빛났다. 태서의 젖은 머리카락 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우묵하게 팬 빗장뼈 아래 떨어졌다.
“그게…….”
재인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면서도 단단하게 짜인 몸의 굴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방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물방울은 탄탄해 보이는 너른 가슴팍에 궤적을 남기며 미끄러졌다. 납작한 배에 선명하게 새겨진 복근 사이의 골을 지나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그의 몸을 훑듯 흐르는 물방울을 따라 재인의 시선이 내려갔다.
“그러니까…….”
배꼽을 슬쩍 비껴간 물방울이 판판한 아랫배를 따라 또르륵 흘렀다. 종착지는 도드라진 장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팬츠의 밴드 부분이었다. 회색 원단에 닿자마자 스미어 짙은 얼룩을 남기며 번진 순간.
재인이 흠칫 고개 들었다. 그러자 느릿하게 오르내리는 태서의 목울대가 보였다. 나른하게 내리뜬 그의 눈이 감상은 즐거웠냐고 묻는 듯했다.
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저도 모르게 대놓고 남자의 몸을 훑어 내린 것이다. 빗장뼈부터 시작해서 물방울을 따라 아래로. 그러다 마지막에 눈에 담은 것을 떠올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