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피해자는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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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피해자는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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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피해자는 나야
2023.01.27.
“미쳤나 봐. 네가, 네가 여길 왜 와?”
정재훈을 피해 다니기 급급할 거라고 생각했던 재인이 제 발로 나타난 상황이었다. 하얗게 질린 유리가 소리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지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태서 씨, 지금 내 앞에서 도대체…….”
“스토커 새끼 만나러 온 건데.”
팔을 뻗어 재인을 감싼 태서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자연스럽게 재인의 손을 잡아 숨기듯 제 뒤에 놓고는 유리를 보며 찌푸린 눈썹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유유상종이라더니. 두 사람, 친한가 봅니다?”
“…….”
유리는 재훈과 저를 엮어 끼리끼리 잘들 논다고 평하는 태서가 미웠다. 동그란 눈 가득 노여움을 담아 그를 노려보는 유리의 꽉 다물린 턱이 모멸감에 부들부들 떨렸다.
재훈 역시 주먹을 꽉 쥔 채 태서를 쏘아보았다. 정확히는 재인을 다 가려 버린 태서의 커다란 몸을 보며 씨근덕거리는 중이었다.
얼마 전 태서에게 비틀렸던 팔이 아직도 시큰거리는 탓에 덤빌 엄두도 내지 못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나?”
“……아니.”
“그러면 상관없는 사람은 빠져 주면 좋겠는데.”
“태서 씨!”
또다시 저를 향해 떨어진 축객령에 유리가 소리쳤다. 하지만 태서는 불쾌감이 역력한 얼굴로 짧게 혀를 차고 슬쩍 고개 돌렸다. 뒤에 선 재인의 표정을 살피려는 게 분명한 모습에 씩씩거리는 유리의 숨이 가빠졌다.
“내가 그쪽 뭐라도 된다는 것처럼 자꾸만 불러 대는 것, 그만 좀 하지?”
“뭐, 지금 뭐라고…….”
“기다려. 아직 네 차례 아니야.”
태서가 첨예한 시선으로 곧 있을 유리의 지옥을 예고했다. 무슨 차례가 온다는 것인지는 몰라도,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유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태서는 다시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발걸음을 뗐다. 평소보다 차갑게 느껴지는 재인의 손을 꽉 잡은 채 충격으로 굳어 버린 유리를 지나쳤다. 저만 바라보고 있는 유리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실 건 됐고.”
재인을 문 가까운 쪽에 앉힌 태서가 자연스럽게 그 옆에 붙어 앉았다. 책상 근처에 서 있는 재훈과 재인의 중간에 앉은 것이다. 얼어붙어 있던 재훈의 눈에 그제야 재인이 담겼다.
그녀는 눈을 꼭 감은 채였다. 사고 이후 외국으로 내쫓긴 탓에 무려 8년 만에 만난 첫사랑이었다. 기억보다도 더 아름다워진 재인을 보는 재훈의 눈이 황홀감에 젖어 번뜩였다.
“정재훈.”
어서 눈을 떴으면. 눈 떠 나를 봐 줬으면. 그런 생각을 하며 감격에 차 있던 재훈은 저를 부르는 태서의 목소리에 뒤늦게 반응했다.
“자리부터 정리하지?”
태서는 치솟는 짜증을 겨우 참아 내고 있었다. 저딴 게 감히 윤재인을 눈에 담고 환희에 젖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피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재인을 위해 참아야 했다. 지금 저 새끼에게 쌓인 분노를 해소해야 하는 건 그가 아니라 재인이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팽팽해진 이성의 끈을 겨우 붙잡은 태서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늦게서야 정신을 차린 듯 소파 쪽으로 걸음을 뗀 재훈이 가쁜 숨을 내쉬며 입술을 짓씹는 유리를 향해 턱짓했다.
“조유리, 가.”
“…….”
“안 들려? 가.”
“내가, 네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사람이야?”
“난 너 오라고 한 적 없어.”
정재훈이 정색하며 길길이 날뛰기 직전인 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유리는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그의 손을 쳐 냈다.
“이거 놔! 내가 왜 가? 여기 강태서, 내 남자가 있는데 내가 왜? 윤재인, 그렇게나 아닌 척하더니 너도 네 엄마 닮아서 남의 남자…….”
“입.”
분노가 실린 낮은 저음이었다. 태서의 묵직한 한 마디에 유리를 잡아 내쫓으려는 재훈과 그 손길을 거부하며 소리치는 유리의 실랑이가 멈췄다.
“조심하는 게 좋을 텐데.”
태서의 일갈에 유리의 큰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억울하고도 서러웠다. 저 남자의 곁에 있어야 하는 건, 저 남자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건 윤재인이 아니라 저였다.
“일단, 난 그쪽 남자였던 적이 없고.”
“태서 씨! 쟤가 어떤 애인 줄 알고 상대하는 거예요? 차라리 다른 여자를…….”
“조유리 씨는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와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게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눈치가 없다고 하기엔 지나치고. 이 정도면 머리가 나쁘다고밖에는 생각이 안 드는데.”
“……뭐라고요?”
“나에 관해 떠들어 대는 건 참겠는데, 한 번만 더 함부로 윤재인을 입에 올려 봐.”
서릿발 같은 기운에 질린 유리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벌벌 떨었다. 지금 이 상황은 악몽이어야 했다. 유리는 손톱자국이 깊게 패도록 주먹을 쥐었다.
“그때는…….”
“태서 씨.”
주안 엔터테인먼트 대표 사무실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입을 연 재인이 태서의 험한 말을 막아 내듯 그를 불렀다.
반짝, 눈 떠 저를 응시하며 제 손을 잡은 그의 손을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그녀의 모습에 태서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난 괜찮아요. 지금은 여기 온 목적에 집중하고 싶어요.”
“그래요. 재인 씨 괜찮으면 나도 더는 신경 쓰지 않을게요.”
신뢰가 공고한 두 사람은 다정한 연인으로 보였다. 유리의 눈이 뒤집히든 말든, 둘 다 상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아빠가! 우리 아빠가 지금 이 상황을 몰라서 그렇지,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정재훈. 정리 안 하나?”
“누가 누구를 정리해! 지금 이 자리에서 정리되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내숭도 때려치우기로 했는지, 유리가 난리 치며 재인을 향해 다가서려는데 그 전에 재훈이 일어섰다.
“강태서에게 볼일이 있거든 따로 만나 얘기해. 내 사무실에서 나가.”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재훈에게 붙들린 유리가 사무실 바깥으로 쫓겨났다. 문을 잠근 정재훈이 돌아섰다. 재인을 향하려던 그의 시선을 붙든 것은 제게 꽂히는 강태서의 살기 어린 눈동자였다.
* * *
“아……!”
저를 감싸듯 꽉 죄는 온기에 놀란 재인이 눈을 홉떴다.
“괜찮아.”
제 귀에 속삭이는 다정하고도 낮은 음성에 눈을 감았다. 재인은 뒤늦게 제가 떨고 있었음을, 심장이 불쾌하게 빠르게 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가만가만 등을 쓸어내리는 조심스러운 손길을 느끼며 재인은 기억을 되짚었다.
주안 엔터테인먼트 건물을 나와 차에 바로 타는 대신, 재인은 조금 걷고 싶다고 했다. 걱정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는 두말하지 않고 재인의 차가운 손을 잡아 거리로 이끌었다.
정신을 놓고 걸었다. 그저 발길 가는 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면 멈추어 섰고. 그때마다 제 손을 감싼 온기를 느꼈다.
그러다 도로에 서 있는 차를 발견했다. 하필이면 8년 전, 정재훈의 손에 이끌려 탔던 그 차와 같은 종, 같은 색이었다.
숨이 탁, 막히는 것과 동시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겨울 한낮의 햇빛이 무척이나 어지럽다는 생각이 들더니 휘청, 하는 느낌이 들었다. 더해진 공포에 참았던 두려움이 물처럼 밀려오자 온몸의 힘이 빠졌다.
시야가 캄캄해지고, 소음이 차단되니 조금 전 주안 엔터테인먼트 대표실에서의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 당신 고소할 수 있어.”
“……뭐?”
“스토킹, 협박, 납치, 살인 미수까지. 죄목은 다양해.”
“……재인아.”
“그렇게 부르지 마. 당신이랑 내가 친하게 이름 부를 사이였던 적, 없어.”
정재훈을 똑바로 바라보는 재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차가운 손끝이 애달프게 느껴졌는지, 더 꽉 쥐어 오는 태서의 커다란 손을 느끼며 재인은 심호흡했다.
“공소 시효랑 상관없이 이슈화할 수 있어. 감옥에 보내는 건 힘들더라도, 비슷한 삶을 살게 할 수는 있어.”
“그건…….”
“예전과는 달라.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세상에 다 밝힐 수 있어.”
꿈에서 질리게 봤던 얼굴은 그대로였다. 예전에 없던 흉터를 턱에 달고서. 정재훈에게 겁먹은 걸 들키고 싶지 않아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뱉었다.
그때 정재훈의 얼굴이 어땠더라.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은 제가 피해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네가 내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아 상처 입은 건 나라고. 그러니 네가 가해자라고.
“괴로운 척하지 마. 8년 전 사건의 피해자는 나야.”
그 말을 하기까지 8년이 걸렸다. 말하면서도 떨리는 음성을 숨기기 위해 숨을 골라야 했다.
숨. 그래, 숨. 숨을 어떻게 쉬는 거였지?
“괜찮아. 윤재인, 당신은 지금 안전해. 천천히 숨 들이마셔요. 이제 내뱉고. 다시 들이마시고. 내뱉고…….”
다정한 목소리에 재인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어둡던 시야에 조금씩 사물의 윤곽이 잡힌다. 재인은 저를 다독이는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쓰러지려는 그녀를 잡아 안은 남자의 품은 넓고도 단단했다. 그 아늑한 단단함은 마치 세상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 주는 것만 같았다.
재인은 차분한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숨을 쉬었다.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과 같은 박자였다.
“잘하고 있어요. 잘하고 있어. 천천히…….”
재인을 안은 남자의 팔은 절박했다. 찬 바람 한 올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처럼 그녀를 꽉 안았다. 그러면서도 등을,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은 상냥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아무도 당신 못 건드려.”
“…….”
“잘했어. 윤재인, 잘했어.”
“흐…….”
그제야 주변의 소음이 들려왔다. 지나는 차 소리, 사람들, 음악 소리. 도시의 온갖 소음이 그녀의 귀에 쏟아졌다. 시끄러운 현실 속에서 재인은 조금씩 평정을 되찾았다.
떨림이 진정되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범람할 듯 부피를 키운 감정은 복잡했다.
후련함, 공포, 혐오, 두려움이 울컥울컥 차오르자 재인은 새어 나오는 흐느낌을 삼켰다. 감정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저를 안은 남자를 올려다보려 했다.
“나…….”
“응.”
하지만 그는 허리를 굽혀 가며 재인을 더 단단히 안았다. 빈틈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안긴 그의 품에서 재인은 고개 들었다.
어둠이 아닌 밝음. 이윽고 쨍하게 맑은 푸름을 마주하는 순간 뒤늦게 맡아진 익숙한 향기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강태서.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을 것처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지켜 줄 것처럼 자신을 안은 남자가 누구인지를 깨닫자 눈물이 차올랐다. 재인은 손을 뻗어 그의 외투를 꽉 쥐었다.
“태서 씨, 나…….”
“응. 나 여기 있어요.”
“나는, 흐으, 나는…….”
“응.”
“무서웠, 흐윽, 무서웠어요.”
“……응.”
“사고에서 깨어났을 때, 아무도, 아무도 내 곁에 없어서…….”
“응.”
“아무도 날…….”
“미안해. 미안해요.”
8년 전의 사고도, 사고에서 깨어난 재인이 홀로 재활하며 버틴 것도 태서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미안하다고 한다. 그때 재인의 곁에 없었던 자신을 탓하듯이.
“흑, 흐읍…….”
“울어도 돼. 참지 말아요. 울어야 살아.”
답답한 속의 것을 게워 내듯, 이윽고 울음이 터졌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한낮의 대로변에서 재인은 아이처럼 울었다.
8년 전, 사고에서 깨어난 그녀를 안아 준 사람은 없었다.
수술 경과를 설명하고 주의점을 알려주는 의사와 간호사는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에게 이제 괜찮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 얼마나 무서웠냐며 그녀를 달래 주지 않았다.
시카고의 병원에 입원해 있던 엄마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해 재인 홀로 감내해 온 상처였다. 사고는 그녀의 발목에 흉터를 남긴 것으로도 모자라 꿈까지 따라왔다. 8년간 잠 못 자며 시달려 온 악몽이었다.
“괜찮아. 이젠 다 괜찮아.”
손에 쥔 것도, 폐부를 가득 채운 향기도, 느껴지는 체온과 들리는 목소리도 모두 한 사람의 것이었다. 그 한 사람이 강태서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재인은 오래도록 참아 온 감정을 토해 냈다.
* * *
그날 저녁, 태서는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 서 있었다. 거리에서 울다 지친 재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안정될 때까지 곁에 있다가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한 후 1층으로 내려왔다.
장 실장에게 정재훈과 관련된 몇 가지를 일을 부탁한 뒤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책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래서 트레이드밀 위를 한참 달렸다. 달리는 내내 튀어나오는 욕을 참아 내느라 몇 번이나 이를 악물어야 했다.
결국 시간만 보내다가 땀에 푹 젖어 욕실로 들어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몇 시간 전, 주안 엔터테인먼트 대표 사무실에서의 일을 또다시 곱씹는 태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