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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쓰레기를 처리하러 갈 시간 (60/123)


#60. 쓰레기를 처리하러 갈 시간
2023.01.24.



“재인아, 너 왜 그래? 주안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 새끼가 너한테 무슨 짓 했어?”

정재훈이 제가 살던 집을 다녀갔다는 걸 알게 된 재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사고 이후 쭉 외국에 나가 살다가 몇 년 전부터 한국에 들어와 사업체를 운영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고, 지난 8년여의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접촉도 없었기에 방심했다.

집착이 계속되고 있는 거든,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든 만나서 좋을 게 없는 인간이었다. 아직도 저를 만나려 한다니, 무슨 속내를 가지고 그러는지는 몰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끔찍했다.


“재인아. 재인아?”

하얗게 질린 재인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디선가 정재훈이 즐겨 쓰던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잊고 있던 그 향기에 숨이 가빠 오고 시야가 어그러지던 때였다.


“……무슨 일입니까?”

상화의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재인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급한 표정으로 성큼 다가선 남자는 강태서였다.


“안색이 왜 그래요. 같이 점심 먹으려고 왔는데, 무슨 일 있습니까?”

주저 없이 뻗은 커다란 손이 제 뺨을 감싸자 절로 눈이 감겼다. 태서의 뜨거운 손에 폭 파묻히니 그제야 제 뺨이 서늘했다는 것을 알겠다. 한참이나 숨을 고른 끝에 재인이 가만히 눈 떴다.


“재인아, 괜찮아? 말해 봐. 이 새끼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이래?”

“……예전에 나 큰 사고 났었다고 했잖아.”

“너 다리에 흉터, 그거?”

“응.”

“……그게 이 새끼야? 그러면 어제 이 새끼가 너 찾아온 거야?”

상화는 험악한 표정으로 욕을 내뱉었다. 8년 전의 사고로 재인이 오랜 재활 치료를 견뎌 냈어야 했음은 물론, 지금까지도 악몽에 시달린다는 걸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당연했다.

갑자기 느껴지는 다리 통증에 비틀거린 재인은 그제야 제가 태서의 품에 폭 안겨 있었음을 깨달았다.

고개 드니 상화가 들고 있다가 내려놓은 핸드폰을 응시하는 태서의 턱이 팽팽히 당겨져 있었다. 화면에 보이는 건 성공한 사업가의 모습을 한 정재훈이었다.


“태서 씨…….”

그의 옷자락을 꽉 쥐어 당기며 그를 불렀다. 어쩐지 그의 깊고 따스한 밤빛 눈동자를 마주 봐야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다.

잠시 눈을 감고 화를 삭인 태서가 이윽고 재인을 내려다보았다. 걱정이 담뿍 담긴 눈동자에 그녀만이 담긴 것을 확인한 재인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재인을 안심시키려는 듯, 이마와 귓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태서 역시 옅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씹어 뱉듯 내뱉는 다음 말에 재인은 그가 화를 참고 있음을 깨달았다.


“말해요.”

“응?”

“어떻게 해 줄까. 그 새끼.”

눈에 언뜻 스친 분노는 당장이라도 정재훈을 데려다 씹어 먹을 기세였다.


 

* * *



“만나야겠어요.”

시간이 지나며 안정을 찾은 뒤, 생각에 잠겨 있던 재인이 꺼낸 말은 의외였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에 태서의 짙은 눈썹이 비스듬히 솟았다.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아뇨, 내가 만나야 해요.”

“상화 씨가 그러던데. 아직도 악몽에 시달린다고.”

“그러니까요. 미루고 피해서 될 일이 아니에요. 매듭을 지어야 해요.”

꿈에서까지 괴롭히던 얼굴을 굳이 마주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피한다고 능사는 아니다. 하지만 태서는 재인이 정재훈을 피해 다니도록 만들 생각도 없었다. 피하는 건 그 새끼여야 했다.


“그딴 존재가 내 약점이 되는 게 싫어요. 우습게 보이는 건 한 번으로 족해요.”

“재인.”

“물론 무서워요. 끔찍해요. 태서 씨 덕에 용기 내는 거예요.”

“…….”

“만날 때 함께 있어 줘요. 그러면 괜찮을 것 같아요.”

맑게 웃음 짓는 재인은 결단을 내린 듯 망설임 없었다. 한없이 연약해 보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한없이 강한 사람. 최근에 태서가 정의 내린 윤재인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녀에 관해 알아 갈수록 놀라웠다.


“피하면 틈을 찾아낼 거예요. 그러다 찾아올 거고. 불시에 맞닥뜨리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

“이미 나는 나를 드러내기로 마음먹었어요. 숨어 지내지 않는 이상,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 할 사람이니까.”

태서의 침잠한 눈빛이 재인의 손을 향했다. 더는 아까처럼 떨지 않았지만, 꽉 쥔 손이 애처로웠다.


“미안합니다.”

“태서 씨가 뭐가 미안해요?”

“나를 선택한 탓에 너무 많은 것을 감당해야 하네요.”

제 곁에 있으면서 주목받을 일이 많아진 상황을 사과하는 태서를 향해 재인이 고개 저었다.


“앞뒤가 바뀌었어요. 많은 것을 감당해야 하는 걸 아는데도 태서 씨를 선택한 거예요.”

“…….”

태서는 산소가 부족한 사람처럼 크게 숨을 들이켰다.


“태서 씨가 그만큼 매력적인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거 알아요? 태서 씨는 내가 선택한 첫 사람이에요.”

모녀의 연으로 아낌없는 사랑을 준 엄마와는 다르게, 먼저 호감을 갖고 다가와 준 덕에 친해지게 된 상화와는 다르게, 제가 먼저 다가간 첫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내 선택, 후회하지 않아요.”

수줍은 듯, 조금은 짓궂은 미소를 흘리는 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태서가 마침내 탄식과 함께 웃음을 흘렸다.


“하…….”

첫 사람이라니. 첫 선택이라니. 꽉 차오른 무언가로 인해 가슴 부근이 뻐근해지는 걸 느낀 태서의 상체가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강태서는 절대로 윤재인을 이기지 못한다. 그것을 깨달은 태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윤재인이 원하는 대로.

그게 지금의 태서에게 가장 강렬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명제였다.


“좋아요. 언제가 좋겠습니까.”

“지금요.”

“지금?”

“태서 씨만 괜찮다면요.”

결의에 찬 그녀가 잠자코 태서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갑자기 눈이 커졌다. 태서의 뒤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태서 씨, 회사 다시 안 들어가도 괜찮아요? 어, 그러고 보니 옷차림도…….”

아침에 같이 출근할 때 입었던 정장이 아니었다. 재인은 금요일 한낮에 데이트하기 좋은 차림으로 나타난 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잘렸습니다.”

“……네?”

“대기 발령, 이라고 해야 하나.”

태서의 말을 농담으로 알아들은 재인의 고개가 슬쩍 기울었다.


“그래서 재인 씨 일하는 거 방해나 하려고 온 건데.”

“……장난하는 거죠?”

진심이었다. 요가 수업을 들어 볼 생각도 했다. 그러려고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으면서 운동하기 편한 옷도 챙겨 왔다. 곁에서 종일토록 그녀를 눈에 담다가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안아 집으로 날아가려고 했다.

집에 도착해서는 품에 안고 주말 내내 놓아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함께 장을 보고, 맛있는 걸 만들어 먹고,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리 백수여도 테드가 도착하고 본격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다음 주부터는 바빠질 테니.

계획을 조금만 미루기로 마음먹은 태서가 일어섰다. 웃으며 손을 내밀자 재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갑시다.”

“……진짜예요?”

“재인 씨 하자는 대로 했으니까, 집에 가면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줘요.”

“……뭘 하고 싶은데요?”

태서가 윙크하듯 한쪽 눈을 찡그리며 싱긋 웃고는 재인을 탈의실 쪽으로 안내했다.


“옷 챙겨 입고 나와요. 밖에서 기다릴게.”

뺨을 붉힌 재인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이마에 다정한 키스를 남긴 태서가 요가원 사무실을 나섰다.

제 경고를 우습게 여기고 재인을 두려움에 떨게 한 정재훈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할까.

태서가 주먹을 꽉 쥐었다. 곧 나올 재인에게 살기 가득한 눈빛을 숨기기 위해 애써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재활용하지도 못할 쓰레기를 처리하러 갈 시간이었다.

* * *



“진짜 못 만났다고?”

“그 집에 재인이 없어. 다른 사람 살고 있어.”

“아냐. 그 집이 확실하단 말이야! 내가 김 실장 아저씨한테 확인했다고!”

얼마나 어렵게 알아낸 건데. 짜증 부리며 덧붙이는 유리의 말에 재훈이 인상을 구기며 이마를 짚었다.

재훈은 유리를 싫어했다. 처음 후원의 밤에서 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던 열여덟 살 때, 재훈은 얼마 가지 않아 유리가 학교에서 재인을 괴롭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못살게 구는 유리가 곱게 보였을 리 없다. 하지만 재훈은 유리가 하는 짓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유리의 악행으로 인해 학교 안에서 재인이 고립되는 상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재인에게서 눈을 못 떼는 또래 남자 녀석들은 유리의 눈치를 보느라 재인에게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다. 예술고등학교에 다니던 재인과 다른 학교에 다니던 상황이었기에, 그렇지 않아도 불안했던 재훈은 그 상황이 기꺼웠다.

재인의 곁에 오로지 저만 있기를 바랐다. 불쌍한 그녀가 기댈 곳이라고는 세상에 저 하나뿐이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재인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정보를 준 건 고맙지만 이렇게 회사로 찾아오는 것, 반갑지 않아.”

“나는 뭐 너 만나는 게 반가운 줄 알아? 급하니까 그렇지!”

“나도 알아보고 있어. 생각 중이야.”

“생각은 무슨? 솔직히 말해. 너, 상대가 강태서라니까 쫄았지? 예전에는 하루라도 못 보면 죽을 것처럼 굴더니, 세월 지나는 사이 식었니?”

“조유리, 말 가려서 해.”

“웃기고 있네.”

유리가 조소를 흘리며 얼음물이 담긴 잔을 들었다. 유리는 예전부터 재인에게 선물 공세를 퍼부으며 간이라도 빼 줄 듯 굴던 재훈을 등신 보듯 했다. 재훈도 알고 있는 바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남자, 안 빼앗겨. 더군다나 윤재인, 걔한테는 절대 줄 수 없어. 강태서는 내 남자야.”

“……그만 가.”

“그러니까 너도 힘 좀 쓰란 말이야! 네가 이렇게 손 놓고 있는 사이에 둘이 밤마다 무슨 짓을 할지를 생각하면……!”

“그만하라고 했어!”

유리의 히스테릭한 재촉을 듣다 못한 재훈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순간, 내선 전화가 울렸다. 재훈이 성난 얼굴로 책상 위로 손을 뻗었다.


“무슨 일입니까?”

―손님이 오셨습니다.

“약속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들여보내지 않는 건 기본 아닙니까. 내가 그런 것까지 알려 줘야 합니까?”

―죄송합니다, 대표님.

짜증이 역력한 재훈의 말에 신입 비서는 당황하지 않았다. 최근에 경력직으로 비서실에 들였는데, 업무에 능하고 말수가 적은 것이 괜찮아 보이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실수라니.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던 재훈이 화풀이 대상으로 삼기 딱 알맞았다.


“누구인지 몰라도 자리에 없다고 하고 돌려보내요. 양 비서는 내가 어중이떠중이 만나 줄 만큼 한가해 보이나?”

―윤재인 씨라고 하시는데요.

“……뭐, 누구?”

―윤재인 씨라고, 그렇게만 전하면 될 거라고 하십니다.

생각지도 못한 손님의 방문에 재훈이 어금니를 꽉 지르물었다. 그렇게 찾아다닌 윤재인이 제 발로 나타나다니, 갑자기 빨라진 혈류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재훈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빨리. 빨리 안으로 모셔요. 지금부터 방해하지 말고.”

재훈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벌게진 얼굴을 몇 번이나 쓸었다.


“왜? 누가 온대?”

저를 흘끔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뜬 유리를 향해 나가라는 듯 손짓하던 그는 이어진 비서의 말에 그대로 멈추어 섰다.


―네. 그런데 동행한 분이 있습니다.

“동행? 누굽니까?”

―강선 건설의 강태서 본부장이라고 합니다. 함께 오셨습니다.

전화를 끊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비서의 말을 곱씹는 재훈이 짙은 쌍꺼풀이 진 커다란 눈을 껌뻑이고 있는 동안,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이윽고 들어선 두 사람을 확인한 재훈과 유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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