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 좋은 날 (59/123)


#59. 좋은 날
2023.01.20.



―무슨 짓을 한 거야!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신재의 다그침에 태서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화미 아파트 재건축 및 그 일대 재개발 입찰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회장의 분노는 예상한 바였다.

오늘 아침, 태서는 이번 입찰에 강선 건설이 참여하지 않음을 공식 발표했다.

해당 사업 관련하여 전권을 쥔 이가 그였으므로 태서는 윗선의 결재 없이 이번 일을 결정하여 진행했다. 강선 건설 분위기가 순식간에 살얼음판이 된 것은 당연했다.


―일 그따위로 하려거든 본부장 자리 내놓는 게 좋을 거다.

기다렸다는 듯 내뱉는 본부장 자리 내놓으라는 말에 태서가 피식 웃었다. 어디 본부장 자리만 내놓으라는 걸까. 마음 같아서는 미국이고 영국이고 어디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치우고 싶을 터다.

애초에 원해서 차지한 본부장 자리도 아니었다. 본부장으로 발령받아 일을 시작하자마자 강남 일대 재개발 사업에 뒤늦게 참여하라는 회장의 지시를 들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재개발 사업은 대부분 철거 후 지어야 해서 비용이 몇 배로 들었다.

더군다나 전 세계적으로 온갖 자재의 단가가 치솟은 상황이었다. 거기다 강남의 노른자 땅이다. 기존 주민들과 협의하여 사업을 진행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하면 적자였다.

해외 각국의 도로와 랜드마크를 지어 이름을 드높이고 신도시 조성 사업을 주도적으로 맡아 진행하던 강선 건설이 굳이 적자를 감수하고 일을 진행할 필요는 없었다.


―깜냥이 안 되면 처음부터 못 하겠다고 하든지! 건설사 선정이 내일인데 왜 지금 와서 입찰 불참을 공시해!

처음부터 못 하겠다고 했으면 받아들여졌을까. 아니다. 결국, 트집을 잡기 위한 지시였을 뿐이다.

강남 재개발 사업은 입찰을 따내더라도, 따내지 못하더라도 책임자인 태서를 탓할 기회였다. 강신재는 저를 꼭 빼닮은 강태서가 제 주변에 있는 것이 거슬린 것이다.

입찰 불참을 발표하자마자 기사는 빠르게 퍼졌다. 태서는 조만간 회장실에서 호출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담당자인 그가 불려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을 어그러뜨렸다는 분노보다 앞에 두고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큰 모양이다. 전화를 걸어온 걸 보면.


―본부장은 이번 일, 책임져야 할 거다.

“네, 회장님.”

대답하는 태서의 목소리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차분하기만 했다. 그게 더 신재의 화를 돋운다는 것을, 태서는 잘 알고 있었다.

강신재는 강태서가 능력 없는 놈이기를 바랐을 터다. 한량처럼 살면서 돈이나 써 재끼면 차라리 좋아했을까.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망가져서 인생을 개차반처럼 산다면 불쌍히 여기는 척이라도 했을 거였다.

어쩌다 회장과 독대하는 일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그때도 신재는 태서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건 어려서부터 친부의 철저한 무시를 학습한 태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보세요! 성적표…….”


“누가 네 아버지야.”


“…….”

 
친모 유정하와 영국에 머물다가 잠시 한국에 들어왔었다. primary school에 입학 후 첫 학기를 마친 때였다.

어린 태서는 작은 손에 성적표와 상장을 들고 용기 내어 신재를 불렀다. 전 과목 OS(Outstanding)를 받은 제 성취를 자랑하고 싶었다.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었다.


“누가. 네. 아버지냐고 물었다.”


“아버지…….”


“네가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는 사람은 없다.”


“…….”


“죽은 듯이 살아라. 눈에 띄지도 말고.”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선이 맞닿았던 때였다. 친부가 건넨 말은 다섯 살 아이가 듣기엔 너무나도 잔인했다.

똑똑했던 태서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눈빛과 말투에서 뚝뚝 떨어지던 냉기와 증오를, 어리다고 모를 리 없었다.

저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는 친부의 발뒤꿈치를 오래도록 좇았더랬다. 제집 거실 한가운데서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오도카니 서 있던 태서는 이를 의아하게 여긴 고용인에 의해 방으로 옮겨졌다.

그 후로 며칠을 앓았다. 그런 뒤에 태서가 제 친부를 아버지라 부르는 일은 없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도, 일을 시작한 후에도 그에게 친부는 늘 회장님이었다.

태서의 부친 강신재 회장은 태서를 본부장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몇 번 없는 사석에서든, 공석에서든 마찬가지였다. 본부장을 맡기 전에는 “그 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아예 부르지 않을 때가 제일 많았다.


―당분간 하던 일에서 손 떼라. 따로 얘기 있을 때까지 출근할 것 없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람들 눈이 있으니 바로 내치지는 못할 터였다. 태서는 맡은 일을 했을 뿐이지, 강선 건설에 애사심은 없었다. 만약 애사심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맡아 진행하던 일이 걱정되어 처분을 거두어 달라 말했을 터다.

하지만 강선 건설은 구멍가게가 아니다. 저 없다고 회사가 어떻게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한국에 들어와 일을 시작한 후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출근하지 말라는 말은 오히려 반가웠다.

회장도 회사 걱정 하지 않고 그냥 나오지 말라는데, 일개 본부장인 저가 뭐라고 회사를 걱정한단 말인가. 강선 건설이 어떻게 되든 말든 알 게 뭔가.

통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잠시 침묵하던 태서가 달각, 전화기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백수 됐네.”

중얼거린 그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눈이 사르르 접히며 미소 짓는 모양새가, 앞에 누가 있었다면 심장이 쿵 떨어질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의 아비는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태서가 강선 그룹을 탐내고 강신재의 회장 자리를 원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태서가 능력을 발휘할수록, 사람들이 태서를 칭찬할수록 신재의 미간에 빗금이 깊이 패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강선 그룹의 회장은 젊고 똑똑한 아들에게 제 자리를 빼앗기게 될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정작 태서는 그럴 생각도 없는데.


“으음…….”

손가락 끝으로 짙은 눈썹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던 태서가 개인용 핸드폰을 들었다. 몇 안 되는 연락처 중에 찾아 누른 것은 테드였다.


―태서, 재촉 그만해요.

{지금 하던 것까지만 정리하고 바로 한국 들어와. 아, 살던 집 정리하고 들어오는 게 나을 거야.}

―집을 정리하라고요?

{응. 당분간 여기서 할 일이 많아.}

능숙한 영어로 짧은 통화를 마친 태서가 핸드폰으로 포털 사이트를 열었다. 그사이 뉴스의 경제면을 도배한 현양 건설에 관한 머리기사를 확인한 그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자, 그러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태서가 코트를 챙겨 입으며 먼 곳을 응시했다. 재인이 일하고 있을 요가원이 있는 방향이었다.


“백수답게 일하는 애인 방해하다가 셔터나 내리러 가 볼까.”

셔터맨이 될 기대에 찬 태서가 웃으며 사무실 문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결국 아예 생각이 없는 녀석은 아니었던 게지. 사위 될 놈이 장인 될 사람과 대결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어디.”

껄껄 웃으며 이른 축하 전화를 받는 조대훈의 곁에서 지승희는 입술을 짓씹었다. 내일 재건축 및 재개발 시공사를 선정하여 발표한다지만 강선 건설이 손 떼기로 한 이상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내가 이참에 강태서 그 녀석 덕 좀 보고 있네. 그놈이 무뚝뚝하기는 해도 생각이 깊은 모양이야. 남자는 그래야지.”

강선 건설에서 아침 일찍 입찰 불참을 공표해 준 덕분에 주식 시장이 열리자마자 현양 건설의 주가는 치솟았다. 조대훈은 출근도 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걸려 오는 축하 전화를 받느라 바빴다.

승희는 태서의 속내가 궁금했다. 과연 강태서가 현양 좋은 일을 시켜 준 것일까. 왜 갑자기 입찰 불참을 선언한 것일까. 유리랑 결혼할 마음도 없다던 놈이.


“그래. 축하 고맙고. 조만간 봅시다. 좋은 자리 한번 만들 테니.”

남편이 전화를 끝내든 말든, 지승희는 눈길도 주지 않고 손에 든 핸드폰만 매만졌다. 요즘은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체 치부를 틀어쥔 놈 때문에 잠도 오지 않을 정도였다.

강태서를 애송이라고 여겼던 지난날이 후회됐다. 애송이는 무슨, 늑대 같은 놈 속도 모르고 저 좋을 대로 보는 남편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무슨 생각이야, 도대체.”

“뭐가.”

“……아니에요.”

“표정이 왜 그래? 좋은 날에.”

“……두통이 있어서 그래요.”

이 좋은 날에 분위기 맞출 줄 모르는 아내를 향해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조대훈이 일어나려던 때였다. 2층에서 유리가 내려왔다.

평소 같았으면 대훈을 보자마자 축하한다며 달려왔을 거였다. 애교를 부리고 갖고 싶은 것을 사 달라고 졸랐을 유리는 거실에 앉은 제 부모를 쳐다보지도 않고 현관을 향했다.


“너는 이제야 일어난 거냐.”

“저 나가요.”

“어른을 봐도 인사할 줄도 모르고. 당신, 애를 어떻게 가르쳤어?”

조대훈이 인상 쓰며 승희를 향해 소리쳤다.


“유리가 괜히 그래요? 마음 심란한 애한테 뭐라고 하지 말아요! 유리야, 어디 가는데.”

“친구 만나러.”

“너 정말 친구 만나러 가는 거지?”

“그러면, 뭐!”

“괜히 쓸데없는 짓 하고 다니지 말고. 친구만 만나고 와. 응?”

쓸데없이 강태서나 윤재인 들쑤시고 다니지 말라는 뜻을 알아들은 유리가 눈을 흘기며 현관을 나섰다. 슬쩍 남편의 눈치를 본 지승희는 떨리는 손으로 들고 있던 핸드폰을 더 꼭 쥐었다.

한마디 하려던 대훈이 혀를 차며 휙, 뒤돌았다. 누구랑 통화를 하는지, 서재에서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동안 승희는 최 비서의 연락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 * *



“재인아. 나, 어제 너희 집에 갔었잖아. 그런데…….”

점심 먹을 때가 되어 출근한 상화가 막 요가원에 들어선 참이었다. 상화는 어젯밤에 재인이 살던 집에 들러 두고 갔던 머플러를 가져가야겠다고 했다.

태서와 함께 지낸 후로 일찍 출근하게 된 재인은 오늘부터 오전 수업을 전담해서 맡고 일찍 퇴근하기로 했다.

오후 수업을 맡아 하기로 한 상화가 출근하자마자 꺼낸 얘기에 태서와 주고받은 메시지를 되짚던 재인이 고개 들었다.


“머플러 못 찾았어? 내가 그거 분명히 종이 가방에 넣어서 TV 옆에 놔뒀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네 집 문 앞에서 웬 남자를 봤거든?”

“남자……?”

순간 느낀 불안함에 재인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조대훈이었다. 조대훈이 직접 움직였을 리는 없으니 그의 비서인 김 실장일 가능성이 컸다.


“응. 멀끔하게 생긴 남자였는데, 조금 느끼해 보이기도 하구. 묘했어. 말투로 보나 옷 입은 거로 보나 꽤 근사하고 잘생겼는데 이상하게 음침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응……?”

상화의 부연 설명을 들은 재인의 고개가 기울었다. 상화가 말하는 남자가 아버지뻘인 김 실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 앞을 서성이고 있어서, 내가 누구 찾아오셨냐니까 당황하더라구.”

“그래서?”

“여기 사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누군데 남의 집 문 앞을 막고 서 계시냐니까 핸드폰 열어서 뭔가 다시 확인하더라. 그래서 내가 비키라고, 여기 외부인 출입 금지인데 어떻게 들어오셨냐고, 신고할 거라고 했더니 오피스텔에 이사 올 예정이라 집 구경 왔다는 거야.”

“응.”

“근데 공인 중개사도 없이 혼자 집 구경을 오는 경우가 흔한가? 거기다 집을 구경하려면 자기가 살 집에서 할 것이지, 왜 남의 집 문 앞을 서성이냐고.”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재인이 핸드폰을 들었다. 오래도록 찾아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름 있는 재벌가 아들인 만큼 뭘 하며 사는지는 알고 있었다. 검색하자마자 나온 얼굴을 상화에게 내밀었다.


“혹시, 이 사람이었어?”

“어, 그런가?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사진보다는 조금 더 눈빛이 날카롭고, 음……. 그래, 맞아. 맞는 거 같아. 맞아, 이 사람. 그 사람도 턱에 흉터가 있었어.”

자신감에 찬 상화의 끄덕임에 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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