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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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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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2023.01.17.
어느덧 밤이 깊었다. 임홍진 관장은 짙은 피로를 느끼며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낮에 잠깐 아트 센터에 태서가 다녀간 뒤로 두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심란함에 잠도 오지 않았다.
“분명히 제 편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데려올 준비가 된 게야? 어떤 아이인지는 몰라도 태서 네가 마음에 둔 사람이라면 분명…….”
“현양 건설 조대훈 회장의 혼외자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귀를 의심했다. 그렇지 않아도 태서가 관심 갖는 아이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알아보고 싶었지만, 손자를 존중하기 위해 꾹 참고 있었다.
그런데 날아든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었다. 세상 수많은 여자를 두고 하필이면 제 약혼자와 피를 나눈 사람을 마음에 뒀다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숨겨 두고 연애할 생각 없습니다. 그래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정확히는 조대훈 회장의 장녀입니다. 그 사람이 조유리보다 몇 개월 먼저 태어났어요.”
“그게 무슨……!”
“아직 결혼을 생각하기는 이르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는 사람은 아닙니다.”
“태서야!”
“그러니 약혼 엎겠습니다. 그 우습지도 않은 약혼, 처음부터 지킬 생각도 없었습니다만.”
너무 놀란 나머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반듯하게 선 손자를 바라만 보았다.
“어차피 조유리가 제 진짜 약혼녀도 아니구요.”
이어진 말조차 이해하기 힘들었다. 임 관장은 순간적으로 혈압이 치솟은 탓인지 어지러워 이마를 짚었다.
“현양 건설의 조성환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 8개월이 지난 후에야 조유리가 태어난 걸 알고 계십니까?”
“……뭐?”
“돌아가신 조성환 회장님과 할아버지께서 손자 손녀 결혼시키자 약속하셨을 때는 지승희 이사장이 임신하기 전이었을 겁니다. 조유리는 세포로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입니다.”
“…….”
“할아버지께서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을 제 약혼녀라고 하지는 않으셨겠죠.”
현양 건설 조대훈에게 딸이라고는 하나뿐이기에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그 아이가 남편이 점찍은 태서의 짝이겠거니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충격에 휩싸인 임 관장은 언젠가 함께 자리했던 남편의 친우, 고 조성환 회장을 떠올렸다.
손녀딸이 아직 제 어미 태에 있지만, 어미가 성격 똑 부러지고 반듯한데 얼굴까지 예쁘니 딸도 못지않을 것이라며 기대가 크다고 했던가.
아들 대훈의 냉정한 성정을 모두 감쌀 수 있는 마음 넓은 며느리를 보게 될 것 같다며 흡족해했다.
“집사람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대훈이 녀석을 결핍이라고는 모르게 키웠어. 그랬더니 그놈, 제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도 몰라. 헛꿈이나 꾸고. 조금만 마음에 여유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래도 이제 아비가 될 테니 바뀌겠지.”
“아니, 그런데 왜 결혼은 안 시키고?”
“대훈이 그 녀석이 저 잘난 맛에 뻗댄 모양이야. 며느리 될 아이가 심지가 굳어. 날 찾아와 아이 낳아 키울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더군.”
“음…….”
“미국으로 보내 달라기에 보내 줬어. 대훈이 녀석도 생각이 있으면 쫓아가서 빌든 뭘 하든 마음 사로잡아 데리고 돌아오겠지. 만약 이번에도 날 실망시키면 호적에서 파 버릴 생각이야. 짝 제대로 만났어, 아주.”
남편은 태어나지도 않은 손녀딸을 자랑하는 친구를 놀려 대며 조만간 손녀딸에게 흰머리 다 내어 주게 생겼다고 했다. 그래도 좋다고 웃는 조성환 회장을 보며 남편 역시 웃었다.
마음에 쏙 드는 며느리를 보게 되었다는 조성환 회장을 보면서 임 관장은 웃지 못했다. 그때는 태서의 친모 유정하가 살아 있을 때였다. 하지만 유정하는 강신재의 무시와 증오를 견디며 하루하루 말라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기억을 끄집어낸 임 관장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러면…….”
“조유리가 아니라 그 사람일 겁니다. 할아버님께서 손자며느리로 점찍어 놓으셨다는 조대훈 회장의 딸.”
“이게, 이게 무슨…….”
“처음 만난 건 몇 년 전인데, 그때는 사람을 마음에 들일 여유가 없었습니다. 지금이라고 다른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을 향하는 제 마음을 무시하기엔…….”
경황이 없는 와중에 말을 하다 만 태서의 침묵이 길어져 임 관장의 눈이 다시금 태서를 향했다. 태서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제 마음이 큽니다.”
거기까지 들었을 때 그만 눈을 감았다.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던 아이가 처음으로 정을 준 상대였다. 함부로 떼어 낼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가야 할 길이 가시밭인 것이 뻔했기에 두 손 들어 환영할 수도 없었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임 관장이 겨우 눈을 들어 손자를 바라보았다. 태서의 흔들림 없는 눈빛은 깊고도 진지했다.
“그래서, 어찌해 주랴.”
“부탁드려요.”
그때까지만 해도 제 진짜 약혼녀를 찾아 그 여자에게 원래 자리를 주려는 건가 했다.
이복 자매를 두고 이게 무슨 일인 건지. 세간에서 떠들어 댈 말을 생각만 해도 시끄러웠다. 그런데 태서의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잘못된 약혼을 바로잡으려는 게 아닙니다. 30여 년 전의 어른들끼리의 약속을 제가 지켜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남편에게는 미안하지만, 약속 당사자 둘 다 고인이 된 지 오래였다. 요즘 세상에 누가 어른들이 정해 주는 짝과 결혼할까. 죽은 남편을 대신해서 태서에게 약혼을 종용했던 지난날이 후회됐다.
“그저 좋아하는 사람 만나려는 것뿐이에요. 더군다나 그 사람은 현양 건설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합니다.”
“…….”
“저는 그 사람이 원하는 걸 해 주고 싶습니다.”
표정을 봐서는 원하지 않는 것도 해 줄 모양새였다.
“뭘 어쩔 생각인 게야.”
“일단 약혼을 없던 일로 마무리 지어 주세요. 얘기 꺼내는 건 다음 주 월요일이 좋겠습니다.”
약혼 엎을 날을 콕 집어 말하는 게 의문스러웠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그러마. 그런데 태서야. 아무리 그래도…….”
“다른 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드릴게요. 다만 나중에 그 사람 만나게 된다면, 다른 건 묻지 마시고 그저 예뻐해 주세요.”
“…….”
“할머니, 그게 제가 바라는 겁니다.”
할머니, 하고 덧붙인 말에 임 관장도 더는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제게 뭘 바란 적이 있었던가.
아비의 냉대를 견디며, 어미의 학대를 참으며 저만큼 자라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아이였다.
태서가 돌아간 뒤, 손자가 만난다는 아이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았다. 내 손자를 믿는다면, 끝까지 믿어 줘야 했다. 그 아이 편이 되어 주기로 한 이상, 뒷조사는 쓸데없는 일이다.
문득 걱정되는 것은 아범이었다. 그녀의 아들 신재는 제 아들 태서의 혼사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대화가 전혀 없던 부자는 태서가 회사 일을 시작한 뒤로 아주 가끔 회사 일에 관해서만 대화를 나누었다.
“흐음…….”
그런데 아범이 태서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어미가 죽고 영국으로 돌아간 태서가 몇 년 후 떠돌이 개에게 정이 들어 데려와 키우겠다고 했을 때, 아범은 반대했다.
“영국에서 혼자 지내면서 정 붙일 곳이라고는 없는 아이다. 한국에 데리고 와 키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니.”
“그래서 반대하는 겁니다.”
“……뭐?”
“그 아이는 평생 정 붙일 곳, 없어야 할 겁니다.”
끔찍한 말을 내뱉는 아들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신재야.”
“내가 용서 못 합니다. 그 아이 행복한 것.”
“태서가 무슨 죄가 있어서……!”
“연희는, 그 사람은 무슨 죄입니까. 내 마음 받아 준 것 말고 그 사람이 뭘 했습니까? 그 사람은 무슨 죄로 죽어야 했습니까!”
“태서 어멈 죽은 거로는 모자란 게야? 기어이 그 어린애마저……. 사람이 어쩜, 어쩜 그래!”
“저는 원하시는 대로 해 드렸습니다. 회사, 크게 키웠고 그토록 바라시던 혈통 좋은 손자도 여럿 낳아 드렸고요.”
“강신재!”
“그 아이한테도 딱 저한테 하듯이만 하세요. 평생 좋아하는 사람 못 보게. 죽지 못해 일에만 매달리게.”
고통으로 일그러진 아들의 무서운 저주를 임 관장은 기억하고 있었다. 부디 시간이 흐르는 사이 아들의 분노가 옅어졌기를 바랄 뿐이었다.
“바라고만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 태서는……. 태서는 그리 살면 안 되는 아이야. 이제라도 행복해져야 할 아이가 우리 태서인데.”
책상 위 남편의 사진을 바라보던 임 관장이 일어섰다. 달빛에 시리게 물든 겨울 정원을 내다보는 그녀의 눈이 빛났다.
모쪼록 태서에게 힘이 되어 줘야 할 텐데, 늙은이가 쥐고 있는 것이라고는…….
“후우…….”
아들의 갈 곳 없는 원망이 온전히 저를 향하기를 바라는 임 관장의 시름이 깊었다.
* * *
“즐거웠어요. 앰버, 정말 재미있고 좋은 사람 같아요.”
집으로 들어가기 전, 잠깐 동네를 거니는 중이었다. 태서는 제 손에 쏙 들어오는 재인의 손을 말아 쥔 채 그녀와 함께 걷는 지금이 좋았다.
겨울치고는 포근한 밤이었다. 재인의 발갛게 물든 뺨은 추위가 아닌 술 때문이었다. 태서를 제외한 여자 셋은 1차 소주에 이어 2차로 칵테일까지 마셨다.
또다시 잔뜩 취한 상화는 술꾼 앰버가 데리고 갔고,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이던 재인은 이제 조금 술이 깨는 모양이었다.
알코올 기운을 내보내고 싶은지, 재인이 푸우, 푸우, 하고 입바람을 불었다. 그때마다 태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즐거웠다니 다행입니다.”
“앰버는 한국말 왜 그렇게 잘해요?”
“애인이 반은 한국 사람이라서.”
“아…….”
“비영어권 국가에 가서도 영어로만 말하던 사람이었는데, 좋아하는 사람 생기니 그 나라 말을 배우더군요. 어떻게든 친해지고 싶어서.”
재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안 하던 짓을 하게 되는 것 같더라구요.”
“예를 들면?”
“음……. 자꾸 핸드폰을 확인한다든가.”
태서가 멈춰 섰다. 가로등 아래 마주 선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인 것처럼 길게 드리웠다.
“또.”
“또, 음……. 잠은 잘 잤는지, 밥은 제때 잘 먹었는지, 그런 게 궁금해진다든가. 아이도 아니니 어련히 알아서 잘할 텐데요.”
“또?”
“그리고…….”
머뭇거리는 재인의 대답을 기다리던 태서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지 않던 손을 들었다. 술기운에 열이 오른 뺨을 가만가만 매만지자 재인이 기대듯 손바닥에 폭, 감겨 왔다.
“웃는 때가 많아지고.”
“아, 맞아요!”
태서의 낮은 읊조림에 재인이 아이처럼 웃으며 눈을 빛냈다.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고. 그래서 더 보고 싶고.”
“응, 그것도.”
“자꾸만 닿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의 느릿한 말투가 귀를 간지럽혔는지, 재인이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한층 더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탐스럽다. 태서가 재인이 물고 있는 아랫입술을 엄지로 지그시 눌러 빼면서 고개 숙였다.
“입 맞추고 싶고.”
“…….”
“더, 더 원하고.”
“…….”
“이건 대답 안 하네. 나만 그래요?”
어느새 입술이 닿을 듯 등과 허리를 굽혀 가까이 다가선 태서였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재인의 눈빛이 더 깊어져 있었다.
“나도 그래요.”
“…….”
“지금도, 그래요.”
재인의 솔직한 대답에 태서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간질거리는 숨을 탄식처럼 내뱉었다. 한순간 훅, 하고 치솟은 욕심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도 저를 올려다볼 재인을 마구 흩뜨리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 낸 태서가 이윽고 고개를 숙였다.
반짝, 빛나는 눈을 보니 참아 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곱고 예쁜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찌나.”
스르륵 감기는 눈꺼풀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고개를 기울였다. 코끝으로 뺨과 작은 콧방울을 천천히 어루만지듯 내리그은 끝에 마침내 입술에 대고 속삭인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시는지.”
스미듯 맞닿은 입술이 포개진다. 상냥하게 머무는 것도 잠시, 서로를 향해 열린 틈으로 넘쳐흐른 마음이 뜨겁게 쏟아졌다.
재인을 제 품에 가둔 채 그녀의 입술을 욕심껏 머금는 태서의 입꼬리가 올라간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