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윤재인의 강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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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윤재인의 강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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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윤재인의 강태서
2023.01.10.
“이모! 여기 채널 좀 바꿔 주세요!”
콩나물국밥 한 숟가락을 막 뜨려던 상화가 눈을 찡그리고는 손을 번쩍 들었다. 식당의 TV 화면이 그녀의 입맛을 앗아 간 탓이었다.
“나 괜찮아.”
“괜찮긴. 귀신은 뭐 하나 몰라.”
상화가 재인의 친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것이 어제였다. 그 후로 계속해서 현양의 ㅎ만 보여도 욕을 퍼부었다.
그러던 차에 현양 재단 아이들을 줄 세워 두고 장학증서를 수여하는 조대훈이 화면에 나오니 시선이 곱게 갈 리 없다.
주식 관련 채널의 사회자와 패널이 최근에 뜨거운 주목을 받는 현양 건설에 관한 정보를 쏟아 냈고, 관련 자막이 계속해서 업데이트됐다.
<미국 E&K, General Standard에 이어 현양 건설에 대규모 투자 발표>
<강남 2지구 재개발 사업자 발표 앞두고 현양 건설 주가 연일 고공행진>
<창립 50주년 맞은 현양 건설, 현양 재단에 50억 기부>
<현양 건설, 현양 재단과 함께 사회적 공헌 약속, ‘같이’의 가치 확산 소망>
조대훈의 성공적인 사업가로서의 행보, 재단 이사장 지승희의 온화한 미소, 조유리를 포함한 현양 건설 오너 일가의 화목한 모습을 담은 사진이 계속해서 화면을 채웠다.
“‘같이’의 가치 좋아하시네. 이미지 메이킹 겸 절세하려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제 마누라랑 짜고 치는 게 뻔한데 어디서 뻥카를 날려?”
“언제는 또 남자는 저렇게 늙어야 한다더니?”
“그건 언뜻 봤을 때 얘기고. 자세히 보니까 인상이 안 좋아. 못돼 처먹었을 거 같아. ‘나, 재벌이오.’ 하면서 거들먹거릴 게 뻔해. 있는 놈들이 더하다니까? 하여간 재벌들이란.”
상화의 혀 차는 소리에 재인이 쿡쿡 웃으며 물컵을 들었을 때였다. 상화가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 물론 너의 강태서 씨는 다르지.”
“나의 강태서 씨……?”
“응. 윤재인의 강태서 씨. 태서 씨, 사람이 차암 괜찮더라?”
그렇게나 도끼눈을 뜨고 반대할 때는 언제고, 반나절 만에 ‘너의’ 강태서 씨란다. 아무래도 어제 강태서는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화에게 점수를 확실하게 딴 듯했다. 필름이 끊긴 건 아닌 모양이었다.
“말해 봐. 태서 씨 집은 어떻디?”
“좋더라. 예쁘고.”
“흐음……. 어제 둘이 뭐 했어? 응?”
“그냥 짐 정리하고 잤어. 태서 씨는 어젯밤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거기 갔고.”
“뭐야. 그냥 잤다고? 강태서 씨는 무슨 일을 오밤중에 해?”
“어디 조문을 가는 것 같더라고.”
“아…….”
상화가 싱겁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재인이 입꼬리를 올려 보인 후 고개 숙였다. 반찬으로 나온 고추장아찌를 씹는 내내 지난 새벽이 떠올랐다.
새벽, 잠에서 깬 재인은 거실 바닥에 앉아 소파에 팔을 얹고 엎드려 잠든 태서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저를 살피다 잠든 것이 분명하다는 걸 깨닫고는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
서둘러 제가 덮고 있던 담요를 덮어 주려는데 태서가 반짝, 눈을 떴다. 새벽빛을 모조리 흡수한 듯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한 재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태서였다.
“깼네요.”
“태서 씨,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자고 있었어요……?”
“윤재인 씨는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잤습니까.”
“저는 태서 씨 오는 거 기다리느라…….”
“나도 재인 씨 깨는 거 기다리느라.”
“……왜요?”
빙긋이 웃는 남자의 미소에 고개를 기울이던 재인의 몸이 앗, 하는 사이 공중으로 들렸다.
“이러려고.”
바닥에 앉아 있던 태서는 어느새 소파 위에 앉은 채였다.
얼떨결에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 앉게 된 재인이 당황할 틈도 주지 않은 태서가 손을 뻗었다. 재인의 따끈한 뺨과 말랑한 귓불을 매만지는 남자의 눈빛이 진득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출근까지는 아직 시간 넉넉한데.”
“…….”
“뭐 할까요, 우리.”
이미 답을 정해 놓고 묻는 남자의 미소가 짓궂었다. 재인이 말아 문 아랫입술을 꾹 눌러 빼 지그시 문지르는 손길은 느릿했다.
하지만 그는 기다렸다. 가만히 올려다보던 시선을 천천히 내려 재인의 입술을 바라볼 뿐, 먼저 입을 맞춰 오지는 않았다. 애가 타서 먼저 다가선 것은 재인이었다.
눈을 내리뜬 채 가까이 다가간 재인의 코끝에 그의 코끝이 스쳤다. 그 순간, 얌전하게 굴던 남자가 이를 드러냈다. 말캉한 살을 베어 물고 틈새를 벌려 그가 들이닥치듯 밀려 들어왔을 때는…….
“재인아!”
“어?”
“매워?”
“……어?”
“목까지 다 시뻘건데? 고추가 많이 맵나? 물 마셔.”
“아, 응.”
재인이 애꿎은 물을 들이켰다. 다시 떠올려 봐도 혼을 쏙 빼놓는 키스였다. 입맞춤이 계속되는 동안 재인은 태서와 함께 격정에 휩쓸렸다.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그녀가 먼저 태서의 어깨에 팔을 둘렀고, 나중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시 소파에 누워 있었다. 그것도 강태서의 품 안에서 옴짝달싹 못 하게 갇힌 채였다.
“그거 하나가 매웠나 봐. 내가 먹은 건 괜찮았는데.”
“응, 그러네…….”
“그래서, 얘기는 해 봤어? 어떻게 하기로 했어? 저 인간 말이야.”
상화가 여전히 TV 화면을 채운 조대훈을 향해 턱짓했다. 물컵을 내려놓은 재인의 눈빛이 어느덧 차게 식어 있었다.
“이용해 보려구.”
“응?”
“윤재인의 강태서 씨를.”
결국, 넘어가고야 말았다. 함께 아침을 먹으며 복수를 위해 자신을 이용하라고 부추기는 남자의 설득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재인은 그가 저를 위해 새롭게 복수의 판을 짜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태서 씨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현양 건설을 무너뜨린다고 해서 태서 씨가 얻는 건 뭐예요?”
“내 연인의 미소. 그리고.”
남자는 그린 듯 미소 지으며 재인의 관자놀이에 입 맞췄다.
“내 애인의 칭찬.”
“…….”
“윤재인 씨. 나, 잘하면 칭찬해 줘요.”
이마를 맞대 오며 앞 머리카락을 비벼 대는 남자 때문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게요.”
“마음을 담아서?”
“마음을 담아서.”
마음을 담은 입맞춤이 몇 번이나 더 이어진 끝에야 그의 집을 나설 수 있었다. 현관을 나서자마자 태서는 손을 내밀었고, 재인은 스스럼없이 그 손을 잡았다.
강태서와 윤재인의 동거 2일 차 아침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시작되었다. 서로를 향하는 눈빛은 다정했고, 신뢰는 높았다.
행복했던 출근길을 떠올리며 재인이 냅킨을 들어 입을 닦았다. 현양 재단에서 열린 후원의 밤 행사장을 배경으로 웃고 있는 조대훈과 지승희, 조유리를 바라보는 재인의 표정에 망설임은 없었다.
두렵지 않았다. 이제 윤재인은 혼자가 아니었다.
* * *
“재건축 입찰 발표 나면 이 집 팔아 돈 받아서 준다니까? 아니, 큰돈 받을 일이 눈앞인데 지금 이 집을 팔면 어쩌라는 거야? 누가 당신들 돈 떼어먹는대? 그사이 계속 이자 붙이고 있으면 될 거 아니야!”
광순이 안방에서 핸드폰 너머로 대출 팀 직원과 실랑이 벌이는 것을 살핀 석동이 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결국, 그의 모친은 이 집의 소유권을 건설사 측에 넘기고 그 돈으로 대출을 갚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는 빨리 입찰이 마무리되어 보상금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채권자들의 독촉은 계속되었다. 입찰 발표를 앞두고 하루가 다르게 집값이 오르는 마당에 자기들에게 이 집을 넘기라고 난리였다.
“누가 헐값에 이 집 먹으려는 거 모를까 봐?”
석동이 한숨과 함께 습관처럼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손을 내렸다.
잠깐 쥐었을 뿐인데, 소중한 머리카락 몇 올이 손바닥에 남아 있다. 거울에 비춰 보니 이마의 m 자가 더 커져서 이제는 완연한 대문자 M을 이루고 있었다.
“후우…….”
대학 동기 녀석들의 정보를 믿고 주식과 코인으로 큰돈을 날렸다. 스트레스의 여파로 석동은 소중히 관리하던 머리카락마저 날리는 중이었다.
탈모는 초기에 잡아야 한다던데. 20대 때부터 탈모가 신경 쓰여 한약과 양약 모두 먹고 있는 그였지만, 이제는 거금을 들여야 한다는 시술 쪽에 눈이 갔다.
“시술 후기 보면 조금만 옮겨 심어도 확 젊어지던데…….”
이 상황에 시술 얘기를 꺼내면 광순이 남은 제 머리카락을 모두 잡아 뜯을 것이다. 석동은 고민했다. 하지만 집까지 날려 먹은 마당에 머리카락까지 날려 먹을 수는 없다.
“진작에 할 걸 그랬어…….”
천하의 오석동이 겨우 돈 천만 원에 절절매는 날이 오다니. 석동은 탄식하며 반들반들하게 드러난 윗이마를 쓸었다. 여기만 채워지면 지금의 공허가 다 채워질 것 같았다.
지난번 백화점에서 봤던 남자가 떠올랐다. 저와 같은 코트를 입었던 그 남자. 사실은 급이 달라 가격도 몇 배나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했지만, 디자인은 같았기에 같은 코트라고 우기는 석동이었다.
자기애가 남다른 석동의 기억은 변형됐다. 그 남자가 저보다 잘났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제가 그 남자보다 부족한 것은 머리숱 정도였다.
만약 제가 그 남자처럼 빽빽한 머리숱을 갖춘다면 어떻게 될까.
그 남자보다도 더 날카롭고 지적인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미남 치과 의사로 알려져 방송에도 출연하고, 요가 강사도 저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돈과 명예, 사랑을 모두 거머쥘 수 있는 것이다.
“엄마, 그냥 우리 신도시로 갈까?”
“저기 시골구석에 없이 사는 것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신도시지. 그딴 데는 사람 살 곳이 못 돼.”
“……신도시도 지금 우리 집 평수 아파트 구하려면 20억은 줘야 할걸.”
“분수도 모르는 것들이 허영만 가득 차서는. 뱁새 주제에 황새 따라가느라고 가격만 높여 놓으면 다야? 격도 안 맞는 것들이. 우린 강남에 살아야지.”
어제, 석동은 광순과 함께 강남 일대의 부동산 몇 곳을 돌아본 뒤로 더 큰 우울감에 빠졌다. 눈에 차는 집은 턱없이 비쌌고, 빚을 갚고 난 후 남은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하지만 강남을 벗어나면 죽는 줄 아는 광순은 곧 죽어도 강남을 외쳤다.
“운이 좋아요. 주인이 사정이 있어서 급매로 내놓은 거라 가격도 시세보다 저렴하고, 집도 깔끔하고 해도 잘 들구요.”
“……아휴, 방이라고는 사람 하나 누우면 꽉 차겠네. 엘리베이터도 없고, 마트랑 백화점도 멀고. 아니, 창문을 열었는데 왜 옆 건물 벽이 나와? 이런 데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
“……강남만 고집하시는데, 그 돈으로는 이 근처 방 두 칸짜리 빌라도 귀해요. 원룸 알아보셔야 해요.”
“원룸은 무슨! 이런 돼지우리 같은 거 말고, 제대로 된 집을 보여 줘 봐요! 사람을 뭐로 보고 이런 너절한, 어휴…….”
지은 지 30년이 된 빌라는 비교적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광순과 석동의 눈에는 사람 살 곳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민감한 피부를 가진 석동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약물로 목욕해야 했는데 그 집에는 욕조도 없는 작은 화장실이 딱 하나뿐이었다.
콧구멍만 한 방 두 개와 손바닥만 한 거실에는 지금 석동의 방을 장식하고 있는 고풍스러운 가구도 다 못 들여놓을 것이다. 그런 집에 들어가 매일 자존감을 깎아 먹으며 사느니…….
“엄마까지 고생시킬 수는 없어. 엄마라도 편하게 사셔야지.”
이미 고생은 다 시켜 놓고 한다는 말이 전국 효자 대회 1등 감이었다. 얇은 입술을 꾹꾹 씹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석동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래. 난 미래의 더 큰 도약을 위해 숙이는 것뿐이야.”
핸드폰 화면을 빠르게 스크롤하며 대학 동기 녀석의 이름을 찾는 그의 눈빛이 결연했다. 광순이 알게 된다면 기함하겠지만, 당장 집도 지키고 머리카락도 지키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