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경고는 한 번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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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경고는 한 번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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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경고는 한 번뿐이야
2023.01.06.
“진짜 호랑이 굴에 들어왔나 봐.”
1층 거실에 놓인 소파에 앉은 재인이 다리를 끌어모았다.
“……잘 때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있는 방묘문 꼭 잠그고 자요.”
“아, 고양이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잘 닫아 놓을게요.”
“아니. 내가 올라갈까 봐.”
“…….”
“재인 씨 잠을 깨울까 봐.”
“…….”
“그리고 밤새 못 자게 괴롭힐까 봐 그럽니다.”
태서가 나가기 전, 현관 앞에서 나눴던 대화를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모은 무릎에 달아오른 뺨을 댔다. 숨을 고르며 열이 식기를 기다리는 그녀의 눈에 뒤늦게 독특한 거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은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 해서 휑한 느낌을 예상했는데, 곳곳에 놓인 조명과 태서가 직접 모은 듯한 여행 기념품 등으로 장식된 집은 아늑했다.
재인이 붉게 물든 뺨을 감싸 쥔 채 일어섰다. 그가 잠들 1층 침실의 문을 열어 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거실 안쪽의 작은 주방을 살피다 침실 옆에 붙은 계단을 발견했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과 위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이 집에는 지하실도 있는 모양이다.
밤중에 오면서 집 외관도 구경하지 못했다. 재인은 고민하다가 제가 머물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강태서가 사는 집 구석구석이 궁금했지만, 집 구경은 나중에 태서가 오면 함께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1층이랑 2층 사이에 있다던 문이 이거였어?”
재인이 1층과 2층 사이의 중간 계단참에 설치된 방묘문을 발견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바닥부터 천장까지를 막아 놓은 방묘문은 폭이 좁은 금속 막대를 연결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야말로 고양이 한 마리만을 막아 내기 위해서.
예상을 뛰어넘은, 허술한 문의 모양새에 절로 웃음이 났다. 조심스레 방묘문을 열고 남은 계단을 마저 올랐을 때.
“어……?”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재인이 커다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제가 올라온 계단을 돌아본 뒤 다시 2층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여기가 태서 씨 집이었단 말이야?”
또다시 웃음이 났다. 태서의 초대를 받아 처음 강선 아트 센터를 방문하기로 했을 때, 장 실장의 도움을 받기 위해 왔던 곳이었다. 그때 느꼈던 따스함과 안온함이 그대로 재인을 반겨 주었다.
태서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느꼈던 분위기와 집 안을 채운 향기가 어쩐지 익숙하다 생각했지만, 같은 집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예전에는 너른 정원과 이어진 2층의 문을 통해 들어와 2층이 1층인 줄 알았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집주인이 궁금했다. 높은 안목을 가진 여성이 아닐까 했는데, 강태서가 이 집의 주인이었다니.
1층에 비해 훨씬 크고 넓은 거실과 주방, 그리고 거실 한가운데 걸린 그림을 보면서 재인은 내내 놀라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 여기에 캣타워가 있었던 것 같은데…….”
문이 열린 방 안에는 커다란 침대와 옷장, 책상을 겸해 쓸 수 있는 화장대와 함께 보기만 해도 편안해 보이는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고양이가 머물던 커다란 방을 그녀를 위한 공간으로 바꾼 것이다.
단 하루 만에 이걸 준비했을 남자를 생각하니 어쩐지 자꾸만 뺨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그때, 닫힌 방문 안쪽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인이 가만히 가까이 다가가니 문을 열어 달라는 듯이 야아옹, 길게 우는 고양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너구나.”
반가움에 문을 열려던 재인이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다는 그의 말을 떠올리고 멈칫했다. 그리고 생각 끝에 문고리에서 손을 떼었다.
“미안. 나도 너 반가운데……. 우리는 내일 인사하자.”
문 앞에 쪼그리고 앉은 재인이 작게 속삭였다.
“이따가 태서 씨가 오면, 내가 그 사람을 안아 주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
제가 말해 놓고도 어쩐지 부끄러워 입술을 말아 물게 된다. 하지만 제게 이렇게나 따뜻한 공간을 선물한 그가 고마웠다.
“그러려면……, 먼저 널 안으면 안 될 것 같아.”
고양이가 긁어 대는 문 근처를 매만지는 재인의 뺨이 또다시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기독교식으로 진행되는 장례식이어서 절은 하지 않았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정운필 회장의 영정 사진 앞에 흰 국화를 내려놓은 태서가 반듯하게 고개 숙여 눈 감았다.
짧은 묵념 끝에 몸을 돌려 한 줄로 선 상주를 마주했을 때, 태서는 상주 완장을 찬 채 제 엄마와 두 명의 누나 뒤에서 형형한 눈빛으로 저를 쏘아보는 정재훈을 발견했다.
정운필 회장의 하나뿐인 며느리이자 정재훈의 친모는 딸과 아들의 곁에서 젖은 눈시울만 찍어 대고 있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운필 회장의 두 딸이 앞서 나서서 태서에게 눈인사했다.
각각 주안 그룹 소규모 계열사의 대표를 맡은 둘은 서로 간에 거리를 둔 채였다. 그 양옆으로 태서 또래의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정운필 회장의 외손녀들인 듯했다.
태서를 흘끔거리며 귓속말을 나누는 그들의 눈빛에 호기심과 경계심이 가득했다. 장례식장이어서 분위기가 좋을 리 없지만, 유독 살벌한 기운이 돌았다.
주안 그룹의 지주 회사인 주안 식품의 지분을 어떻게 쪼갤지, 각자 머릿속으로 치열하게 계산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얼마 가지 않아 조각조각 날 주안 그룹의 앞날이 예상되는 순간이었다. 맨손으로 주안 그룹을 일군 창업주 정운필 회장이 안타까워 영정 사진을 한 번 더 바라본 태서가 쓴웃음을 삼키며 뒤돌았다.
“얘, 손님 또 오시는데!”
뒤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상주인 조카를 부르는 정재훈의 고모 목소리가 분명했지만, 태서는 돌아보지 않았다.
“바로 퇴근하세요. 집까지는 혼자 가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사진 찍을 건 다 찍은 것 같은데, 기자들 그만 정리하세요.”
저를 향해 더는 카메라를 들이밀지 말라는 뜻이었다.
제대로 이해한 장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운전기사를 향해 눈짓했다. 태서에게 스마트 키를 건넨 후 고개 숙여 인사한 장 실장이 경호원들과 함께 기자들이 몰려선 쪽으로 향했다.
잠시 서서 먼 곳을 바라보던 태서가 어금니를 사리물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뒤따라오는 정재훈이 저를 놓쳐 헤매느라 시간 낭비할 일 없도록, 평소보다 속도를 조금 줄인 채였다.
* * *
주차하기 전, 태서는 2층 창이 컴컴한 것을 확인한 후 집에 들어섰다. 그러니 지금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전혀 뜻밖이었다.
한동안 현관에 가만히 서 있던 태서가 비죽 솟으려는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1층 거실 중앙으로 다가가는 그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숨까지 참느라 입술을 꾹 깨물고는 무릎 굽혀 앉았다. 소파에 모로 누워 웅크린 채 잠든 재인의 곁이었다.
2층에 준비해 놓은 침실에서 편하게 자지, 왜 여기서 불편하게 자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순하게 잠든 얼굴을 보니 자꾸만 웃음이 샌다.
기다린 걸까.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걸까.
누군가 집에서 저를 기다린 것은 처음이었다. 태서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심장, 혹은 폐부, 아니면 그 어딘가가 간지럽고 꽉 조이고 뻐근하게 느껴지는 통에 콧잔등이 시큰하기도 했다. 잔잔하게 부피를 키워 가는 떨림은 처음 느껴 보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윤재인의 향기에도 온도가 있는 것일까. 아무리 보일러를 틀어 놓아도 어딘지 썰렁하게 느껴지던 집이었는데, 재인의 달콤한 향기가 머무는 곳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상앗빛 이마, 감은 두 눈에 올올이 예쁜 속눈썹, 오뚝 솟은 앙증맞은 코, 살포시 다물린 도톰한 입술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하던 태서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뺨을 향하는 제 손을 뒤늦게 자각했다.
“…….”
욕심을 갈무리한 손을 겨우 거뒀다. 소파 등받이에 얹어 둔 담요를 펼쳐 작은 몸을 덮는 그의 눈빛이 사뭇 애틋했다.
바람이 새어 들어가지 않게 꼼꼼히 덮어 다독이면서도 행여 깰까 봐 무게를 싣지 않는 손이 오래도록 담요의 빈 끝자락을 놓지 못했다.
“잠깐, 얘기 좀 하죠.”
장례식장 주차장 구석에 주차해 두었던 차에 다가섰을 때, 태서는 기다리던 인기척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분노가 치밀어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며 화를 억누른 끝에 뒤돌 수 있었다.
정재훈을 마주한 그의 턱 근육이 단단히 뭉쳤다. 짙은 눈썹에 드러난 불쾌함을 숨기지 않은 채 내려다보는 태서의 눈빛이 서늘했다.
“강태서 씨, 듣자 하니 우리 재인이를…….”
“우리, 재인이?”
“…….”
태서가 눈을 느른하게 내리뜨며 재훈을 쏘아보았다.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내뱉는 말에 재훈이 이를 악물고 태서를 노려보았다.
“지금 말한 ‘우리 재인이’가.”
“…….”
“8년 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스토커 새끼 때문에 죽을 뻔했던 윤재인을 말하는 건 아닐 거고.”
“……윤재인한테 접근하지 마. 당신이 우습게 볼 여자 아니야.”
“누가 윤재인을 우습게 봐. 내가? 아니면 뭣도 아닌 네가?”
태서가 한쪽 눈썹을 일그러뜨린 채 조소하자 주차장 구석에서 숨을 죽이고 서 있던 정재훈이 갑자기 달려들었다. 제 멱살을 잡아 끌어 올리려는 팔을 가볍게 피한 태서가 재훈의 등을 찍어 차체에 짓눌렀다.
“덤빌 땐 상대를 보고 덤벼야지. 윤재인도, 나도 음침한 또라이 새끼랑 놀아 주기엔 수준이 안 맞아서.”
“재인이는 불쌍한 애야! 함부로, 으윽, 건드리지 마!”
“하……. 네가 사람 새끼면 그딴 소리는 못 할 텐데.”
“너 같은 게 데리고 놀 여자가 아니라고! 윤재인은 고등학생 때부터 내가……!”
“입 다물어.”
우득, 뼈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정재훈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눌린 갈비뼈가 폐부를 압박하는지 괴로운 표정으로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잘 들어. 경고는 한 번뿐이야.”
“…….”
“윤재인이 너를 발견하거나, 윤재인 근처에 있는 너를 내가 발견하게 되는 날.”
재훈이 비틀린 팔과 목에 느껴지는 고통을 참아 내려는 듯 거친 숨을 삼켰다.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강, 태서……, 이 씨이, 흐, 흐억!”
태서가 재훈을 제압한 팔에 힘을 더 주었다. 차창에 얼굴이 뭉개지고 목이 반쯤 꺾인 채 꺽꺽거리는 재훈의 귓가에 태서가 욕을 짓씹듯 내뱉었다.
“함부로 나다닐 생각하지 말고. 다니던 곳만 다녀.”
“…….”
“지켜보는 게 거슬리지 않게.”
태서는 정재훈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난 뒤에야 풀어 주었다. 바닥에 쓰러져 컥컥, 밭은기침을 해 대는 놈을 지나쳐 차에 올라탔다.
주시하고 있음을 알렸으니, 몸을 사릴 것이다. 하지만 쉽게 포기할 놈이 아니니 경계의 날은 바짝 세워야 했다. 예전처럼 함부로 재인에게 접근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했다.
곱고 평화롭게 잠든 재인을 바라보는 동안 치솟았던 분노가 사그라든다. 어느새 입가에 번진 미소는 오로지 윤재인만을 향했다.
얼마나 바라보고 있었을까. 잠든 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욕실로 향한 태서는 잠시 뒤 맑은 얼굴로 다시 거실로 나왔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머리카락 끝은 아직 젖은 채였다.
“잘 자네.”
바닥에 앉아 소파 모서리에 두 팔을 올린 그의 고개가 천천히 기운다. 제 팔에 얼굴을 얹는 태서의 눈은 여전히 재인을 향한 채였다.
저를 유혹하려고 재인이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이처럼 잠든 그녀에게서는 그 어떤 계산도 읽히지 않았다.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유혹을 느끼는 제가 미친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섭섭하게.”
깨우고 싶다. 예쁜 눈 반짝 들어 그 눈동자에 저만 담아 주면 좋겠다. 오물거리는 입술을 열어 제 이름을 부르고, 작은 손을 들어 저를 매만져 주면 좋겠다.
먼저 자라고 했으면서, 잠든 그녀가 섭섭한 동시에 이곳에 있어 줘서 고맙다.
깨워 저를 바라보게 하고 싶은 동시에 그녀가 계속해서 편히 자기를 바란다. 재인의 입술을 흠빨아 맛보고 싶은 동시에 그저 가만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고 싶기도 하다.
평온한 그녀를 망가뜨리고도 싶고, 지켜 주고도 싶은 이 아이러니한 양가감정이라니.
어느새 동이 터 오는 시각, 재인을 바라보는 태서의 눈도 스르륵,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