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 잘 왔어요, 호랑이 굴에 (54/123)


#54. 잘 왔어요, 호랑이 굴에
2023.01.03.


태서도, 재인도 와인은 입에 대지도 못했다. 홀로 와인 한 병을 다 마신 상화는 테이블에 기댄 채 자꾸만 몸을 기우뚱거리고 있었다.


“사실, 상화 술 잘 못해요.”

“음…….”

“맥주건 소주건 정종이건 딱 한 잔만 마시는 애인데…….”

와인이 나오자마자 혼자 잔에 가득 따라 원샷을 해 버린 그녀였다. 그러더니 또다시 가득 채워 따르고는 숨도 안 쉬고 들이마셨다.

강소주는 들어 봤어도 강와인은 처음 들어 봤다. 와인을 마신 뒤 크으, 소리 내는 사람도 처음 봤다. 그런데 그게 불쾌하기보다는 유쾌하게 다가왔다.

재인에게 좋은 사람, 서상화.

태서는 제게 날을 세우는 상화의 오지랖이 싫지 않았다. 그때마다 안절부절못하며 제 눈치를 살피는 재인의 손을 꼭 잡아 괜찮다고 다독이는 것도 좋았다.


“아 씽! 내가 진짜 강태서 씨 곱게 보고 싶지 않은데!”

“…….”

“잘생겼네. 그런데 누구세요?”

술에 취한 후, 누구냐 묻는 게 벌써 세 번째였다. 그때마다 태서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윤재인 남자 친구, 연인, 애인. 강태섭니다.”

“그래, 강태서 씨! 우리 순진한 재이니 꼬드겨 호올랑 잡아먹을 놈! 근데 진짜 잘생겼네? 째려보다가도 잘생겨서 웃음이 나고. 그래서 또 짜증이 나고! 내가!”

“…….”

“뭐, 대답 좀 하시죠? 저기요? 나 혼자 떠드나?”

“잘생겨서 미안합니다.”

“하……. 재수가 없는데 그것도 또 매력이고! 짜증 나…….”

상화의 투덜거림에 태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술에 취해 자꾸만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상화를 저지하던 재인이 난감한 얼굴로 태서를 바라보며 고개 저었다. 이제 그만 자리를 정리하자는 뜻인 듯했다.


“서상화 씨.”

“예. 뭐요. 왜요. 서상화가 난데요. 그러는 댁은 누구신데요.”

“윤재인 남자 친구, 연인, 애인. 강태섭니다.”

“아……. 맞아. 우리 재이니랑 사귄다고……. 당신, 내가 얼굴값 하는지 안 하는지 똑똑히 지켜볼 거야. 우리 재이니 울리면!”

“좋아서 울게는 할게요.”

술 취한 사람에게 한 대답치고는 너무나 묵직한 울림이었다. 상화의 팔을 잡아 내리던 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서를 바라보았다.


“걱정하는 일 없도록, 잘할 겁니다. 내가.”

“…….”

“재인 씨한테 들었습니다. 살면서 가져 본, 몇 안 되는 내 편이 재인 씨 어머님이랑 서상화 씨였다고.”

“…….”

“그 모임에 나도 끼려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 주면 좋겠습니다.”

눈을 가늘게 뜬 상화가 태서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흔들림 없이 반듯한 태서를 노려보던 상화가 지독한 알코올 기운이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합격.”

“…….”

“나중에 딴말하기만 해 봐……. 재벌이고 뭐고, 난 그런 거 업써! 강선 건설 앞에 가서 드러누울 거야. 진상의 끝이 뭔지 내가 보여 주게쒀…….”

거기까지 말한 상화가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놀라 상화를 흔드는 재인을 향해 태서가 고개 저었다.


“술 취한 사람 흔들지 말아요. 그러다 속 부대끼면 큰일 납니다.”

“아…….”

“상화 씨 집 어딘지 알고 있어요?”

“그럼요.”

“그럼 갑시다.”

생각보다 빨리 끝난 술자리가 반가웠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 태서가 곁에 놓인 코트와 재킷을 재인에게 내밀더니 목과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며 풀었다.


“이건 왜…….”

“나중에 뭐라고 하면 안 됩니다.”

“뭘요?”

“재인 씨 말고 다른 여자 업은 거, 서운해하지 말아요.”

재인의 눈이 커지는 동시에 허리 숙인 태서가 휙, 하고 순식간에 상화를 제 등으로 옮겨 일어섰다. 키가 175cm인 상화를 손쉽게 업은 태서가 걸음을 떼려다 멈칫했다.


“아…….”

엉겁결에 자리를 정리한 후 따라나서려던 재인이 한쪽 눈썹을 일그러뜨린 태서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요?”

“내가 계산하면, 상화 씨가 화낼 것 같습니까?”

재킷 안주머니에 있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대신 계산해 달라고 부탁하려던 태서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재인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태서가 제 친구 눈치를 보는 게 우스웠던 걸까. 태서는 재인이 왜 웃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그녀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 미소 띤 얼굴로 재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웃음을 멈춘 재인이 태서에게 한 발 다가와 속삭였다.


“강태서 씨.”

“응.”

“가끔, 되게 귀여운 거 알아요?”

“다 큰 남자에게 귀엽다는 건, 칭찬인가.”

“응. 칭찬이에요.”

까치발을 든 재인이 허리 숙인 태서의 뺨에 쪽, 입 맞추고 물러났다. 술에 취해 늘어진 장신의 여자를 업은 잘난 남자에게 이미 사람들의 시선이 꽂힌 후라는 것을 태서도, 재인도 알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재인이 먼저 다가와 제 뺨에 입 맞춘 상황이라니. 태서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내뱉었다.


“하마터면 다리에 힘 풀릴 뻔했습니다.”

“하지 말 걸 그랬어요?”

“아니. 앞으로는 하체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갑시다.”

재인이 맑게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 * *



“상화 씨 어머님, 무서우신 분 같던데.”

“아마 혼날 거예요. 상화도 술 취해 남자에게 업혀 집에 들어간 게 처음일 거라서…….”

“나도 누구 업은 거 처음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나 능숙하게 업던데요?”

“하체 운동할 때랑 다를 게 없어서요.”

“아…….”

상화는 말 그대로 완전히 뻗어 버렸다. 집 앞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던 상화는 다시 태서에게 업혔다.

재인이 벨을 눌렀고, 문을 열고 나온 배 여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사이 태서는 어쩔 수 없이 상화의 방까지 들어가 침대 위에 그녀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배 여사가 따라붙으며 상화의 등짝을 때려 댔다. 내려치는 힘이 그대로 전달되어 태서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처음 겪는 일이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태서에게 재인은 차에 탄 이후에도 계속해서 미안하다, 고맙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아무튼, 미안해요. 갑자기 상화랑 만난 상황도 태서 씨한테는 당황스러웠을 텐데…….”

“괜찮아요. 즐거웠습니다.”

“고맙구요. 내 친구 좋게 봐 줘서.”

“그 말 벌써 세 번째인데.”

“……정말 고마워서.”

태서가 싱긋 웃고는 핸들을 돌렸다.


“상화가 술 깨고 나면 태서 씨한테 많이 미안해할 거예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 줘요.”

“술도 못 마시는 애가 어쩌려고 정말…….”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요.”

“네?”

끼익, 소리 하나 없이 차가 멈췄다. 재인은 그제야 제가 도로 위가 아닌, 낯선 차고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기어를 바꾼 태서와 눈을 마주쳤을 때, 재인은 미소가 번진 그의 얼굴이 어쩐지 조금 위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근사하고도 매력적이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잘 왔어요, 호랑이 굴에.”

키스할 듯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인 그의 턱 근육이 꽉 조였다가 풀어지는 것을, 재인은 똑똑히 보았다. 마치 송곳니가 근질근질한 호랑이 같은 남자가 마지막 인내를 쥐어짠 듯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 * *



“연락드리지 않으려 했는데,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죠. 급한 상황이었으니까.”

조수석에 앉아 뒤를 돌아보는 장 실장을 향해 태서가 고개 저어 보였다. 그도 알고 있다. 장 실장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태서는 지금 재인을 품에 안고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했다. 재인의 생각이 어떻든, 태서의 생각으로는 그래야 마땅했다.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그게 당연했다.

하지만 재인과 함께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태서의 개인 휴대폰이 진동했다. 극히 소수만 알고 있는 전화번호였기에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망설였다.


“무슨 일입니까.”

 
결국 재인에게 양해를 구한 뒤 전화를 받았다. 장 실장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늦은 시각에 연락했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태서의 목소리는 불퉁했다.


―주안 그룹에서 부고장을 보내왔습니다. 오늘 오후 정운필 회장님께서 작고하셨다고 합니다.


“…….”


―죄송합니다. 임 관장님께서 직접 전화 주셨습니다. 강선 그룹 일가를 대표해서 본부장님께서 참석하시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강신재 회장은 해외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임 관장은 아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손자인 태서를 강선 그룹의 당당한 대표로 내세우려는 게 분명했다.

태서가 그동안 온갖 매체의 스포트라이트를 피해 온 것은 모두 강신재 회장 때문이었다. 덕이라고 해야 할지, 탓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하지만, 아무튼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강신재 회장은 제 잘난 아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아들을 너무나 아껴서 그런다고 생각했으나,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는 아들의 존재 자체를 알리고 싶지 않아 했고, 그 아들이 저와 똑 닮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껴서라기보다는, 수치스러워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보고 싶지 않아서, 라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었다.

태서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키지 않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태서가 가야 하는 상황인 것은 분명했다. 더군다나 주안 그룹이라니.


―오늘 가셔야 합니다. 이미 기자 측에 연락이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차량 호출했습니다. 모시러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죠.”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정재훈을 만나 볼 생각이었다. 재인에게 또다시 헛짓거리 할 가능성이 큰 인간을 방치할 생각은 없었다. 윤재인에게 그렇게 집착했던 놈이니, 또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결국, 재인을 제 집 1층 거실에 앉혀 두고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빠르게 조문용 검정 정장을 입고 검정 넥타이를 매고 나온 그는 미안한 얼굴로 재인에게 다가갔다.


“미안합니다. 급히 조문 다녀올 곳이 있어서요. 두 시간만 혼자 있어 줄래요?”


“나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그리고 바쁜 사람인 거 알아요. 두 시간으로 되겠어요?”


“충분합니다. 편히 쉬고 있어요. 어디든 문 열어 봐도 상관없습니다. 집 구경은 이따 다녀와서 시켜 줄게요.”


“나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태서 씨 집, 보안이 아주 훌륭하다면서요.”

 
방긋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는 재인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그녀의 고운 이마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혹시 피곤하면 먼저 자요. 2층에 방을 준비해 뒀습니다.”


“그럴게요.”


“2층에 방이 두 개인데, 문을 열어 놓은 방을 쓰면 됩니다. 문이 닫힌 방에는 고양이가 있으니 놀라지 말아요.”


“……고양이요?”

 
커다래진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재인이 사랑스러워서 또다시 쪽, 아치를 그린 눈썹 아래 입을 맞추었다.


“저번에 분명히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마음대로 내 집에 자리 잡은 녀석인데, 떠밀어도 나가질 않네요. 나갔나 싶다가도 아침이면 창문을 긁어 대고.”

 
재인이 코를 찡긋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제 품에 안긴 재인이 작은 손을 들어 제 머리칼을 정리해 주는 것을 느끼며 태서는 한숨을 뱉었다. 정말이지, 지금은 그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내 걱정 하지 말아요. 집주인보다 더 편하게 있을게요.”


“미안합니다. 첫날부터 혼자 있게 해서.”

 
재인이 정말 괜찮다며 고개 저었을 때, 태서는 집 앞에 도착했다는 장 실장의 전화를 받았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뗀 태서가 구두를 신고 있을 때였다.


“잘 다녀와요.”

 
신발을 신고 현관을 향하던 태서가 그대로 멈춰 섰다. 누군가 뒤에서 따뜻하고 향긋한 물을 끼얹은 것만 같았다. 경험해 보지 못한,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태서 씨?”

 
저를 부르는 재인을 향해 천천히 돌아본 태서가 느릿하게 눈을 껌뻑였다. 제 집 현관에 선 채 저런 목소리로, 저런 눈을 하고 잘 다녀오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라니. 태서가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었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고용인들이 건네는 인사와는 전혀 달랐다. 걱정과 염려가 담뿍 배인 목소리, 애정과 아쉬움이 느껴지는 눈빛에 태서는 할 말을 잃은 채 한참이나 서 있어야 했다.

온몸을 뒤흔드는 알 수 없는 파동에 하마터면 앓는 소리를 낼 뻔했다.

그때를 생각하니 가슴 안쪽부터 뻐근해진다. 태서는 눈을 감은 채 뒷좌석 깊숙하게 몸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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