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우리 재인이 남자 친구, 연인,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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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우리 재인이 남자 친구, 연인, 애인
2022.12.30.
“왜! 왜 참으라는 건데!”
유리가 굳게 닫힌 문을 향해 발악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들고 있던 컵이 러그 위를 뒹굴었다.
유리는 분을 못 이겨 새벽이 되어서야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정오가 한참 지나 일어나자마자 아빠에게 윤재인을 치워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승희가 먼저 유리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대뜸 윤재인과 강태서에 대해 모르는 척하고 입 다물라는 얘기를 들었다. 기가 막혀 대들었지만, 승희는 이상할 정도로 완강했다.
“어차피 강선 그룹 회장 며느리는 너야. 윤재인 걔는 그냥 태서 군이 결혼 전에 잠깐 데리고 노는 거니까…….”
“데리고 노는 것도 싫다고!”
“반반한 얼굴에 잠깐 혹해서 그래. 태서 군 관심이 좀 시들해지면 그때 엄마가 그 애 미국으로 보낼 테니까, 응?”
“싫어. 아빠는 여태껏 걔 안 치우고 뭐 했대? 아빠한테 당장 치워 달라고 말할 거야.”
“안 돼!”
승희가 일어서려는 유리를 밀쳐 침대에 도로 주저앉게 했다. 생각지도 못한 엄마의 완력에 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늘 우아하기만 한 엄마가 저에게 힘을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엄마……?”
“안 돼.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아빠한테도 입 다물어.”
“왜? 왜 안 돼? 내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알면서? 그걸 지금 그냥 넘기라는 말이야?”
“엄마는 뭐 아빠랑 살면서 평생 좋은 것만 보고 산 줄 알아? 때로는 못 본 척, 못 들은 척, 넘겨야 하는 것도 있는 거야.”
제 말을 들어주지 않은 적이 없던 엄마였다. 그런데 오늘은 묘하게 달랐다. 조금은 강제하듯 참고 넘기라 말하는 승희의 태도가 이상했지만, 그저 서러운 마음에 벌게진 얼굴로 씩씩거렸다.
“가만히만 있으면 강선 그룹 안주인 자리가 네 거가 될 거야. 그러니 참아. 그리고 아빠 요즘 바쁘신데 괜히 전화해서 떠들기만 해. 너, 카드 다 정지시켜 버릴 거야.”
“진짜 왜 이래?”
“오늘은 집에서 쉬면서 마음 좀 가라앉혀. 아빠한테는 너 몸 안 좋다고 할 테니까. 엄마 오늘 계속 1층에 있을 거니까 어디 나갈 생각 하지 마.”
승희가 유리의 핸드백을 뒤져 자동차 스마트 키를 꺼내 들고 나간 것이 조금 전이었다. 저렇게까지 말하고 나간 것은 방에 조용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감금이었다. 태어나 처음 받아 보는 벌이었다. 하지만 유리의 생각에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윤재인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어? 이게 다 윤재인 때문인데!”
유리가 발을 버둥거리며 악다구니를 썼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유리의 시선이 핸드폰을 향했다.
“두고 봐. 두고 봐, 윤재인.”
윤재인을 괴롭힐 방법을 떠올린 유리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아빠한테 전화 안 하면 될 거 아냐.”
신경질적으로 핸드폰 화면을 스크롤하던 그녀의 손이 마침내 멈추었다. 전화기 모양의 통화 버튼을 터치한 그녀가 입술을 짓씹었다.
“난데, 주안 엔터 정재훈 전화번호 좀 알려 줘 봐.”
전화받은 상대에게 용건부터 꺼낸 유리의 입가에 잔혹한 웃음이 어렸다.
* * *
오늘따라 시간이 너무 안 간다. 자꾸만 시계로 향하는 시선을 겨우 결재 서류로 내린 태서가 한숨을 쉬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집 정리는 어떻게 되어 간다고 합니까?”
“저녁에 바로 들어가실 수 있도록 준비 마쳤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말을 끝낸 태서가 태블릿에 서명하고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할 업무를 살폈다. 출장을 끝내고 온 뒤여서 그런지 일이 쌓여 있었다. 밥 먹듯이 하던 야근인데, 오늘만큼은 정말로 하기 싫었다.
어서 퇴근해서 윤재인을 집에 데리고 가야 하는데.
“어떻든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던 게 사실이니까. 당신을 이용하려고 했던 게 미안했어요. 하지만 오래 망설인 이유 중에는 연애라는 걸 해낼 자신이 없다는 게 크기도 했어요.”
어제 윤재인은 연애라는 걸 해낼 자신이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사실 그건 태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애라니, 그런 건 평생 남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고 살았다.
아직까지 입에는 담아 본 적 없는 단어였지만, 연애라는 건 남녀 간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기초로 하는 상호작용이라는 것을 태서 역시 알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사랑.
태서가 본 남녀 간의 사랑은 끔찍했다. 그의 친모는 사랑하는 이를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친부는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이겨 내지 못하고 그 원망의 화살을 타인에게 돌렸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태서였다.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이의 시선을 잡아 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인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저주스러운 존재.
그런 제가 감히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있을 리 없다. 태서는 평생 그게 뭔지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재인을 만나 그녀를 생각하는 사이 태서는 감히 연애를 꿈꾸게 되었다. 그녀의 시선이 제게 닿기를 바랐고, 그녀의 손이 저를 향하기를 원했다.
제가 원하는 것이 윤재인과의 연애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누군가와 연애할 수 있을까 따위를 고민할 틈도 주지 않은 윤재인에게 푹 빠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언젠가는 저도 ‘사랑’을 입에 담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부디 이런 제 마음이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탄산수를 준비해 드릴까요?”
“아닙니다.”
장 실장은 태서의 잦아지는 한숨이 두통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여긴 모양이다. 빨리 재인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난 조급함이었을 뿐인데.
오늘부터 제 집에 머물 그녀를 생각하니 절로 입꼬리가 호선을 그린다.
한숨만 푹푹 쉴 땐 언제고 또 갑자기 웃는 상사라니. 곁에 선 장 실장의 고개가 기울어지든 말든 태서는 흐뭇한 웃음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호텔에 가겠다는 재인에게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호텔의 위험성을 설명했다. 제 집과 경호 인력 배치 중에 고르라고 멀쩡한 얼굴로 떼를 썼다. 처음엔 단호하던 재인이 갈수록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태서는 결국 해냈다. 온갖 회유와 달콤한 협박으로 재인을 설득했다. 달갑지 않은 이가 찾아온 상황에 그녀를 혼자 두는 게 불안하기도 했지만, 흑심이 아예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러니 지금, 강태서는 사무실을 나서야 한다. <요가 만다라> 앞에서 기다리다가 퇴근하는 윤재인을 차에 태워 홀랑 제 집으로 데리고 가야 옳다.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거기까지 생각한 태서가 전자 펜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이만 퇴근…….”
“안 됩니다.”
“…….”
안 된다고 말한 게 거짓말인 것처럼 장 실장은 미소 짓고 있었다. 태서의 짙은 눈썹이 슬쩍 비뚜름해졌다.
“한 설문 기관에서 20대에서 40대까지의 여성을 대상으로 남자는 언제 가장 섹시한가 물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정해진 시간 내에 맡은 일을 해내는 남자가 상위에 랭크되었다고 합니다.”
“……섹시하게 보이고 싶은 사람이 여기에 없습니다만.”
“나중에 만나면 제가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본부장님께서 얼마나 업무 시간을 중시하시고 일에 집중하시는지를요. 본부장님 사전에 미룬다는 단어는 없죠.”
“…….”
“그리고, 아직 다섯 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요가원은 저녁 아홉 시에 마지막 수업이 끝납니다. 등록하려고 알아봤습니다.”
태서의 눈이 다시 한번 시계를 향했다. 미간에 좁은 빗금을 그은 그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전자 펜을 들었다. 태블릿을 가로지르는 눈빛이 사뭇 거칠었다.
* * *
“술은 어떤 거 좋아하십니까? 오늘은 제가…….”
“제가! 제가 사요. 오늘은 제가 살 거예요.”
태서는 결국 여덟 시 반까지 회사에 남아 밀린 일을 마친 뒤 시간에 딱 맞춰 재인을 데리러 왔다. 그런데 곤란한 얼굴로 나타난 재인의 곁에는 눈에 쌍심지를 켠 여자가 서 있었다.
“서상화예요. 우리 재인이 보호자죠.”
“…….”
“왜, 뭐. 맞잖아. 재인이 너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보호자란에 누구 썼어? 나잖아.”
자신을 재인의 보호자라고 소개한 여자는 재인을 보호하듯 앞으로 나서며 팔을 쭉 뻗어 손을 내밀었다. 적대감 가득한 눈빛에 잠시 당황한 태서가 매너 좋아 보이는 웃음을 흘리며 그 손을 맞잡았다.
“강태섭니다. 우리 재인이 남자 친구, 연인, 애인, 뭐 그렇습니다.”
“…….”
보호자 타이틀이 탐난다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불난 집에 기름만 붓는 꼴일 테니. 그래도 지고 싶지는 않아 상화가 했던 ‘우리 재인이’라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빠뜨리지 않았다.
“저랑 술 한잔하시죠? 바쁘지 않으시면.”
재인을 데리고 당장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상화의 제안에 태서는 또다시 인내했다. 이미 서상화에 대해서는 재인이 말해 주었다.
제게는 둘도 없는 좋은 사람이라고, 엄마 외에 온전한 제 편이 되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그러니 태서 역시 상화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저를 만나기 전, 혼자였을 재인의 곁에서 함께해 준 사람이었으니 고마운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지난번에 재인과 함께 갔었던 분위기 좋은 바로 상화를 안내했다.
이동하는 내내 재인은 태서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태서는 괜찮다는 미소를 지으며 재인의 손을 잡았다. 그때마다 뒷좌석에서 상화의 매서운 눈빛이 넘어온 것은 무시했다.
“상화야…….”
“내가 사. 강태서 씨, 나한테 비싼 거 사 주고 점수 딸 생각 하지 마세요. 내가 살 거예요. 뭐 드실래요? 와인? 칵테일? 아 씽, 여기 되게 비싸네. 재벌은 쏘주 안 마셔요?”
상화가 짧게 혀를 차며 메뉴판을 넘겼다.
“소주 좋아합니다. 소주 드실래요?”
“여기 쏘주도 있어요?”
“손님이 원하면 팔아야죠.”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하는 태서를 바라본 상화가 미간을 찡그렸다. 메뉴판에 없는 메뉴도 당당히 찾는 남자는 정말 당장에라도 소주를 주문할 것 같았다.
“……뭐야. 됐어요. 누구를 진상으로 만들려고. 나 와인 잘 몰라요. 강태서 씨가 알아서 시켜요. 돈 낼 생각 하지 말고.”
그렇게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태서는 조금 긴장했다.
저를 마치 순진한 사람 유혹해서 못된 짓 하려는 늑대 보듯 하는 상화에게 아니라고 딱 잡아떼기에는 양심이 찔렸다. 그래서 묻는 말에 적당히 대답하며 그린 듯한 미소만 보여 주었다.
더군다나 상화는 그냥 보기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눈빛은 매섭고 목소리는 컸다. 습관인지, 상화가 말하다가 탕, 하고 테이블을 내려칠 때마다 태서는 깜짝 놀랐고 취조받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상화는 태서가 여태껏 만나 온 사람들의 부류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게 태서를 당황하게 했다. 태서가 그동안 만난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 저를 보고 주눅 드는 사람들이었다. 큰 키와 덩치, 눈빛에 압도당해 꼬리를 내린 사람들은 태서의 배경을 확인한 뒤에는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다.
둘째, 아예 저에게 온갖 아부를 퍼부으며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태서에게 잘 보이려 입가에 경련이 일도록 미소 지어 보였다.
하지만 상화는 그 두 부류에 속해 있지 않았다. 저에게 이렇게나 확실한 적의를 쏟아 내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지만 그 적의의 이유가 윤재인을 향한 애정 때문이라는 게 태서는 고마웠다.
“그러니까아! 우리 재이니가 예뻐서 어떻게 한번 해 보려고! 대애충 가지고 놀아 보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아닙니다.”
“상화야, 너 혀 꼬였어. 그만, 응?”
그런데 이렇게 취할 줄이야. 태서는 테이블 위에 놓인 빈 와인 병을 보며 헛웃음을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