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 우리 집으로 가자 (52/123)


#52. 우리 집으로 가자
2022.12.27.


 


“……이용하는 건 나쁜 거잖아요. 거기다 그 일은 태서 씨와 아무런 상관도 없고.”


“왜 상관이 없습니까. 내 애인 일인데. 그리고.”

 
재인은 제 머리칼을 매만져 귀 뒤로 넘겨 주는 그의 손에 뺨을 묻었다. 그의 건조한 손바닥에서 피어나는 온기와 향기가 좋았다.


“나는 재인 씨가 나를 이용하는 게 즐거울 것 같은데.”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재인 씨에게 좋은 일은 나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연인끼리 좋은 건 같이 합시다.”

 
재인이 미간을 좁히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태서를 바라보았다.


“목적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는 건 나쁜 거잖아요. 그리고 나는 그렇게 태서 씨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어요. 내가 바보도 아니고,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는 게 맞아요.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이용하는 게 왜 나쁩니까. 나에게 의지한다고 재인 씨가 바보 된다고 누가 그래요. 나를 이용하는 것도 재인 씨 능력입니다. 내가 아무한테나 이용당할 것 같아요?”

 
이상한 논리로 무장한 태서의 대답에 재인이 헛웃음을 뱉었다. 태서는 여상한 태도로 싱긋이 웃고는 일어서서 그녀의 뺨에 입 맞췄다.


“그리고 말인데……. 싫은 것, 굳이 할 필요 있습니까.”


“네……?”

 
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은근해서 재인이 어깨를 움츠렸다.


“우리가 함께하는 이상, 엿 먹일 방법이야 많을 텐데. 굳이 보기 싫은 얼굴 봐 가면서까지. 엮이고 싶지 않은 인간들이랑 엮이면서까지.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음…….”


“나는 재인 씨가 나랑만 엮였으면 좋겠거든.”

 
홧홧해진 재인의 귓가에 짧은 입맞춤을 남긴 태서가 빙긋이 웃었다.


“내 애인을 괴롭힌 사람들을 그냥 놔두자니 괘씸하고. 나를 이용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텐데 내 애인이 그건 싫다고 하니까.”

 
느긋하게 말하던 그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나른하게 웃으며 속삭이는 모습이 묘하게 야했다.


“이제부터 최선을 다해 설득해 볼 생각입니다.”


“음…….”


“베갯머리송사는 여자만 하라는 법 있습니까.”

 
베갯머리송사라니. 그가 자신을 어떤 방법으로 설득하려는 것인지를 깨달은 재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재빠르게 일어섰다. 하지만 느긋하게 손을 뻗은 태서에게 바로 잡히고 말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오늘은 얌전할 테니.”


“음…….”

 
태서는 소파에 앉아 재인의 양손을 잡은 채였다. 오늘은 얌전할 거라고 장담하는 남자를 내려다보니 덜컥 두려워졌다. 오늘‘은’ 얌전하겠다는 것은 내일은, 혹은 내일부터는 얌전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오늘 얌전히 구는 목적이 있는 듯 보였다. 재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태서를 노려보자 그는 오히려 한껏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우리 집으로 가자고 꼬셔야 할 판에, 겁주면 되겠습니까.”


“또 그 얘기예요?”


“말했잖아요. 나는 결론 내기 전에는 집에 안 갑니다. 재인 씨가 우리 집에 가는 게 싫으면 내가 여기에 있을게요.”


“우리 이제 겨우…….”


“나는 누가 내 여자 괴롭히는 거 그냥 두고 볼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 집에 가는 게 싫으면 저번처럼 사람을…….”


“갈게요.”


“…….”


“간다구요. 대신…….”

 
불도저처럼 저를 몰아치는 남자에게 떠밀려 결국 그의 집으로 가는 것을 승낙하고 말았다. 정말이지 여우에게 홀린 것 같았다.

재인이 덧붙인 몇 가지 조건 모두를 손쉽게 승낙한 남자는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재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에 조금씩 열기가 더해진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재인은 급하게 짐을 싸야 한다는 핑계로 몸을 돌렸다. 짐 싸는 내내 자신을 향하던 그의 눈빛을 떠올리니 또다시 뺨에 열이 올랐다.

우선 한 달가량 머물 짐만 간단하게 쌌다. 짐만 쌌는데 새벽이었다. 절대로 혼자 둘 수는 없다며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남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소파에 앉아 서로에 관해 알아 가며 웃는 사이 잠이 들었고, 잠에서 깼을 땐 또다시 소파에 누운 채 강태서의 품 안이었다.

출근 준비를 위해 집에 가야 하면서도 태서는 재인을 집에 혼자 두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재인 역시 그를 따라 평소보다 일찍 요가원에 나왔다. 덕분에 모처럼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대답은 안 하고 왜 멍 때려. 너, 바른대로 말 안 해?”

“그게, 상화야.”

재인은 만나는 남자가 있음을, 그리고 당분간만 그 남자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음을 밝혔다. 입을 떡 벌린 채 저를 바라보는 상화를 보며 재인은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아?”

“……응.”

“네가, 남자를 만난다고? 누구? 어떤 남자? 어디서 만났는데?”

“그게, 음……. 나중에 소개해 줄게.”

“아니, 아무리 남자를 만나도 그렇지, 만난 지 얼마나 됐는데? 너 한국에 들어온 거 이제 겨우 두 달도 안 됐는데, 길어야 두 달 만났을 남자랑 동거한단 말이야? 야, 차라리 우리 집으로 가.”

재인이 가만히 고개 저었다. 재인이라고 상화의 집을 떠올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대훈이나 조유리, 지승희 그 인간들이 상화마저 흔드는 것은 원치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에 함께 한국 무용을 하며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딱 한 명 있었다. 마음에 벽을 쌓고 있던 재인에게 먼저 다가와 격 없이 마음 써 주던 그 아이는 현양 재단 산하 보육원에 속해 있었다.

재인을 향하던 유리의 괴롭힘이 그 아이에게까지 번져 계속되던 어느 날, 그 아이는 일반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명확한 이유도 없이 현양 재단의 예체능계 특별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죽어라 연습만 해도 모자랄 판에, 너 아주 팔자가 좋구나?”


“…….”


“엄마, 쟤 한국에 놀러 왔나 봐. 아픈 엄마 혼자 미국에 두고 시시덕거릴 마음이 드나?”

 
재인은 승희와 유리가 쏟아 내는 비웃음과 비난 속에서 하나뿐이던 친구를 잃었다. 그 후 한국에 머무는 7년 내내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저로 인해 누군가 피해를 입는 일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태서가 그들에게 당할 리는 없다. 하지만 상화는 그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전혀 없었다. 재인은 상화만큼은 잃고 싶지 않았다. 지금처럼 상화와 직장 동료인 듯 지내는 것과 상화의 집에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우리 엄마 때문에 그래? 야, 배 여사 몰라? 엄마도 너 온다고 하면 반가워하실 거야. 그냥 우리 집으로 가.”

“상화야,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그 남자 곁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

“그 남자가 같이 살자고 꼬셨어? 그 새끼 뭘 믿고 같이 살아!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재인은 화를 내는 상화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를 염려하는 마음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했다.


“그게 사실은, 상화야. 나 한국 온 거 말이야. 복수하러 온 거야.”

“복수? 누구한테?”

“……내가 자기 딸인 걸 숨기려는 사람.”

한마디 했을 뿐인데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화를 알아챈 재인이 겨우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어 보였다.


 

* * *



“네가 하라는 대로 했어. 계약서 확인해 봐.”

“수고했어.”

“그런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네 돈까지 들여서 일을 벌이게?”

앰버가 눈을 찡그리며 아이스티를 들이켰다. 한겨울에도 얼음이 잔뜩 들어간 복숭아 아이스티, 그것도 고급스러운 아이스티가 아닌 L사의 파우더 아이스티만 고집하는 그녀다웠다.

앰버는 대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넉넉한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178cm의 큰 키에 늘씬한 몸매, 붉은 머리칼과 새하얀 피부, 주근깨를 지닌 전형적인 미국 남부인이었다.

우아하고 지적인 외모와 다르게 무척이나 털털한 성격이라는 건 소수만 아는 사실이었다. 내뱉는 말마다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날 정도로 거친 주사를 가진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래, 내 돈 들여서 하는 거니까 회사 망할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내가 한국어 못 하는 줄 알고 저들끼리 내 머리 색이 어쩌고 여자가 저쩌고 속닥거리더라? business manners가 완전 shxx…….”

“한국어 많이 늘었다? 이젠 한국어가 더 편해?”

욕을 내뱉으려던 앰버가 한국어가 늘었다는 태서의 칭찬에 새침한 표정을 짓고는 생긋 웃어 보였다.

“그건 아니고. 평소에도 한국 사람 만날 때마다 쓰려고 노력해. 다 우리 자기 덕분이지.”

앰버가 콧소리를 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미소는 누구나 혹할 만큼 매력적이었지만, 태서는 못마땅한 듯 고개를 작게 저었다.


“이제 가 봐.”

“What?”

“볼일 다 봤으니까 이제 다시 너 사는 곳으로 돌아가라고.”

“Hey! 나 오늘 새벽에 한국 왔어! 그것도 you 부탁 들어주러 온 거라고!”

“빨리 가. 그 비싼 집 비워 두면 집값 아깝잖아. 가.”

냉정하게 선 긋는 말에 앰버가 눈을 흘겼다. 입술을 삐죽이던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더니 다짜고짜 태서의 앞에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

“나 이거 사 가야 해.”

핸드폰 화면에 적힌 것은 쇼핑 목록이었다. 마스크 팩부터 시작해서 닭갈비 양념, 김, 볶음고추장, 쌈장과 같은 온갖 식재료가 적혀 있었다.


“한인 마트에도 다 팔잖아.”

“맛이 달라, 맛이. 미국에서 파는 건 더 짜고! 더 달고! 덜 맵고! 느끼해!”

“……사 가서 뭐 하게.”

“당연히 우리 자기 요리해 줘야지.”

“너의 자기는 네가 요리하는 거 원하지 않을 텐데. 너 요리 못하잖아.”

조금 전까지 반짝반짝 빛나던 앰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정작 그 눈빛을 받는 태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더는 상대하기 귀찮은 듯 미간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뭘 봤는지 세상 간지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접었다.

투자 수익이 날 때 짓는 미소와는 또 달랐다. 태서를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은 앰버도 처음 보는 근사하고도 사람 설레게 하는 미소였다.


“인정. 태서가 잘생긴 거 인정.”

“그만 가. 바빠.”

“그런데 뭘 보고 웃은 거야? 좋은 건 같이 보자.”

앰버가 목을 길게 뺐지만, 태서는 보여 줄 생각이 없다는 듯 핸드폰 화면을 덮어 치웠다. 내쫓아도 안 나가는 앰버를 더는 참아 줄 생각이 없는지, 태서가 일어섰다.


“뭐든, 살 거 사서 빨리 가. 너의 자기가 기다리는 뉴욕으로.”

“자기랑 같이 왔거든?”

“뭐 하러 집 놔두고 밖에서 자. 집에 가.”

“아직 시차 적응도 못 했어!”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자면 돼. 빨리 가. 집에 가서 쉬어.”

오지랖 넓은 그녀는 태서와 다르게 한국 정서와 찰떡이었다. 게다가 특유의 커다란 이목구비를 활용한 리액션이 크고 목소리도 작지 않아서 늘 주목받았다.

하지만 태서는 앰버와 함께 있으면 피곤했다. 그녀가 싫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수다스러운 라디오를 틀어 놓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태서에게 앰버는 1년에 한 번만 만나면 반가울 사람이었다.

태서의 손에 사무실 밖으로 떠밀리던 앰버가 불현듯 깨달은 표정으로 문을 잡았다. 사무실 밖에서 장 실장과 한 비서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일어서서 그녀를 주시했다.


“Stop!”

“뭐. 왜 또.”

“여자, 여자구나.”

“…….”

“Oh my god……. 태서에게 여자가 생겼어!”

“가.”

“태서한테 여자가! 난 사실 그동안 너 고자인 줄 알고!”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가. 장 실장, 손님 갑니다.”

앰버를 사무실 밖으로 내쫓은 태서가 미련 없이 사무실 문을 닫았다. 철컥, 소리가 난 것을 보면 잠근 것이 확실했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멍한 표정을 짓던 앰버가 뒤돌았다. 자신을 향해 반듯하게 선 두 여자, 그리고 저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비서진을 발견하고도 한참이나 눈만 껌뻑이던 앰버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Holy shxx…….”

“…….”

“보여요? 나 소름 돋았어.”

굳이 정장 재킷의 소매를 걷어 올려 팔을 내밀어 보이는 앰버를 보며 모두가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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