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좋아하니까
(51/123)
51. 좋아하니까
(51/123)
#51. 좋아하니까
2022.12.23.
“E&K 대표 둘 다 어린 나이에 큰돈을 굴려서 그런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거만하게 군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친구였어.”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시원시원한 성격이 무척이나 매력적이던데. 사업 파트너로서 더할 나위가 없더군.”
흡족한 표정의 대훈이 크리스털 잔을 들었다. 여태껏 회사에서 대낮에 술을 마시는 일은 없었지만, 오늘이라면 한잔하고 싶었다.
현양 건설의 주식은 요즘 들어 연일 상한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E&K뿐 아니라 미국의 General Standard에서도 적지 않은 돈을 투자받기로 했다.
은행권의 대출도 순조로웠고, 협력 업체 및 납품 업체에서도 앞다퉈 현금이 들어왔다. 입찰이 다가올수록 현양 건설 쪽으로 승리가 기울어지는 판세였다.
“샴페인을 터뜨리는 건 나중으로 미루더라도, 아끼는 술 한잔 정도는 해도 되지 않겠나. 김 실장, 내가 앞서 나가나?”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지내셨으니, 오늘 하루쯤은 휴식을 취하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그래. 그래야겠어.”
“오후 일정 비우겠습니다.”
“급한 건 아니면 전화도 연결하지 마.”
“예.”
김 실장이 나간 뒤, 대훈은 잔을 든 채 일어섰다. 너른 유리창 너머로 저 멀리 우뚝 솟은 강선 건설 건물이 빛나고 있었다.
강태서. 실무 경험이라고는 얼마 되지도 않는 애송이 주제에 저를 상대로 이길 생각을 했나. 일 잘한다고 들었는데, 이번 입찰에서는 영 힘을 못 쓰는 걸 보면 그것도 헛소문인 모양이었다.
“사위가 장인을 쉽게 보면 쓰나. 어른 무서운 줄도 알아야지.”
조소를 머금은 대훈은 이참에 태서가 제게 한 수 배웠다며 인사 오기를 바랐다. 젊은 나이에 패기 넘치는 것은 좋지만, 그것도 적당해야 했다. 제아무리 잘났다고 한들, 눈에 거슬리는 것은 못마땅했다.
강선 건설과 현양 건설의 혼맥은 결국 두 회사의 합병으로 이어질 것이다. 대훈은 나중에 사위가 될 태서에게 훨씬 규모가 커진 현양 건설을 물려주고 싶었다.
강선 그룹은 건설 외에도 크게 전자, 유통, 화학, 금융 쪽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작게는 어린이 재단과 아트 센터 및 종합 병원까지 운영했다. 그중에 강선 건설을 떼어 와 현양 건설에 붙이는 것이 그가 그리는 큰 그림이었다.
“흠…….”
진한 호박색의 액체를 입에 머금어 깊은 풍미를 느끼는 대훈의 입매가 한껏 휘었다. 한낮의 서울을 내려다보는 것은 생각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조금 전, E&K는 현양 건설에 거금을 투자하기로 했다. 이미 증권가에는 알음알음 소문이 퍼진 상태였고, 오후가 되면 공식적인 계약 성사 기사가 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가가 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대가 없는 투자는 아니었다.
비교적 까다로운 조건이었지만, 대훈은 해낼 자신이 있었다. 사람에게는 살면서 기회가 찾아오고, 상승운이 오는 때가 있다고 들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해낼 겁니다. 저를 잘못 보셨다는 걸 깨달으시게 될 겁니다.”
대훈은 저를 가리켜 냉정하고 포용력이 없어서 회사를 이끌어 갈 그릇이 못 된다고 했던 아버지, 고(故) 조성환 회장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눈감는 그 순간까지도 하나뿐인 아들에게 본인이 가지고 있던 주식 모두를 상속한다는 말이 없던 분이셨다.
그래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 후, 대훈은 제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때 처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회장 자리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훈은 아직도 아버지의 주식 중 일부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대훈이 다시 잔을 입에 댔다. 분명히 흐름은 현양 건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순풍이 반갑기 그지없다. 지금은 돛을 올려야 할 때였다.
* * *
“갑자기 이사? 그 집 계약한 지 얼마나 됐다고?”
요가원에서 주문한 이른 점심 식사가 도착했다. 본격적으로 먹을 생각에 머리를 묶던 상화가 재인의 말을 듣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게……. 이사는 아니고, 음. 잠시만 다른 사람 집에서 신세 좀 질까 싶어서.”
“멀쩡한 집 놔두고 왜? 그리고 다른 사람 누구? 나 말고 누구한테 신세를 지려고 그러는 건데?”
질문이 쏟아질 만한 상황이었다. 상화의 어머님 명의로 오피스텔을 계약한 게 불과 두 달 전인데 이사라니. 재인이 멋쩍게 웃으며 배달 음식의 포장을 벗겨 내고는 회상에 잠겼다.
“그냥, 복수하고 싶었어요. 그들도 아팠으면 했어요. 그 사람 때문에 모든 걸 다 버리고 한국을 떠나야 했던 엄마가 가여워서. 평생을 추문에 시달리며 숨어 살아야 했던 엄마가 딱해서.”
어제 늦은 저녁으로 삼계탕을 먹은 후, 그의 품에 안겨 잠드느라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투둑, 제 손을 덮은 태서의 손에 눈물이 떨어진 것도 모르고 울음을 참으려 턱에 힘을 주었다.
“솔직하게 말하면요. 나는……. 태서 씨에게 끌려요.”
“이제 와서……?”
“아니, 그러니까. 나 이러는 게 처음이라서……. 우습죠. 이 나이 먹도록 연애가 처음이에요.”
“잘됐네요. 연애 초보끼리 잘해 봅시다.”
“네. 네……?”
“나도 누가 내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는 게 처음이라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남자의 대답에 재인이 웃었다. 저야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다고 쳐도, 세상 아쉬울 것 없는 남자에게 연애가 처음일 리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태서는 그저 빙긋이 웃으며 가만히 손을 뻗어 왔다. 조심스러운 온기가 그녀의 젖은 눈가를 쓸었다.
“아무튼, 겁이 나서 고백하는 거예요.”
“자꾸 뭐가 그렇게 겁이 납니까.”
그를 담고 있던 커다란 눈동자가 바닥을 향했다.
“나는, 엄마가 왜 나를 낳았는지 모르겠어요.”
처음으로 입 밖에 내 본 말이었다. 시선을 마주하지 않아도 그의 부드러운 시선이 저에게 머물러 있음을 느끼며 재인은 말을 이었다.
“하던 일 다 그만두고 미국으로 도망치면서까지. 평생 숨어 살면서까지. 왜 나를 낳아 키웠을까.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그의 침묵이 고마웠다. 재인은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 말을 술술 털어놓는 제가 어색하면서도 멈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우리 엄마였다면 딸이 미웠을 거 같아요. 그 남자도 그렇지만, 딸도 내 인생을 망친 거잖아. 내가 안 태어났으면 엄마는 자유롭게 하고픈 거 하면서 살았을 텐데.”
그 말에 제 손을 꽉 쥐어 오는 그의 손을 느꼈다. 재인이 고개를 들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그런데요. 감히 그런 의심도 들지 않는 게……. 엄마는 날 사랑했거든요. 항상 날 안고 노래 불렀어요. 잠이 들면 내 이마를 몇 번이고 쓸면서 예쁘다, 어쩜 이렇게 예쁘지, 그렇게 속삭였어요. 그게 좋아서 계속 자는 척한 게 한두 번이 아니야.”
“좋은 분이셨네요.”
“응……. 아무튼 그래서요. 그래서 겁이 나요.”
재인이 젖은 입술을 모아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민 티슈를 손에 쥔 채였다.
“엄마랑 상화 말고는, 살면서 내게 소중한 사람이라고는 없었어요.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인연을 만들어 나가고 관계를 지속하는 것을 멀리했거든요.”
“음…….”
“그래서, 지금 강태서 씨와 시작하는 연애가 내게는 큰 도전이에요. 태서 씨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도,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아주 서툴 거예요.”
“아주 잘하고 있는데?”
재인은 태서가 여태껏 잡고 있던 제 손을 놓는 것을 눈에 담았다. 그의 큰 손이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오더니 이내 양 뺨을 잡아 그를 마주 보게 했다. 괜스레 느껴지는 부끄러움에 재인이 눈을 꼭 감았다.
“그런 나라서, 내가 처한 복잡한 상황과 더불어 우리 관계를 망칠까 봐, 그리고 태서 씨에게 피해를 줄까 봐 겁이 나요.”
“내가 아는 윤재인은 아주 용감하던데.”
“어떻든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던 게 사실이니까. 당신을 이용하려고 했던 게 미안했어요. 하지만 오래 망설인 이유 중에는 연애라는 걸 해낼 자신이 없다는 게 크기도 했어요.”
재인은 속내를 털어놓고 느낀 후련함과 미안함에 아랫입술을 꾹꾹 씹으며 눈을 내리떴다.
“강태서 씨는 참 이상해요. 왜 나한테 화를 안 내요? 내가 당신을 지저분한 곳으로 끌어들인 건데.”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화를 왜 냅니까.”
태서가 귀엽다는 듯, 재인의 두 뺨을 꾹 눌렀다가 떼었다.
“고민한 게 무색할 정도예요. 너무 다 받아 주는 거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 좋은가. 내 어디가 좋아서 이렇게 무르게 굴어요?”
더한 짓을 했었어도 받아 줬을 거라는 듯 웃는 남자의 미소를 마주한 재인이 무안함에 입술을 삐죽였다.
“다른 이유 있겠습니까. 윤재인 씨가 예뻐서.”
재인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예쁘다며 추근거리는 남자들을 질색하던 그녀였는데, 이상하게 강태서의 대답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예쁘다고 말하는 그의 눈빛이 한없이 따뜻하게 느껴진 탓일까. 재인은 계속 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한테 이렇게 다 털어놓는 건 복수를 계속하고 싶어섭니까, 아니면 복수하고 싶지 않아섭니까? 어떻게 하고 싶어요?”
재인의 의견을 묻는 태서의 말투와 시선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재인이 가만히 그를 내려 보다가 눈을 내리떴다.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엄마를 아프게 했던 그 사람들이 고통받기를 원하다가도, 그런 마음을 먹는 자신이 싫었다. 양심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움도 정이라던데, 그들을 생각하는 시간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조대훈 회장과의 관계를 세상에 밝히고 싶습니까?”
“…….”
“마주치기도 싫은 거잖아. 그 사람들이랑.”
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그냥 어딘가 신이 있다면, 자신이 나서기 전에 그들을 벌하기를 바랐다. 그런 허황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재인은 친부와 아무런 상관 없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조대훈이 그녀를 그와 상관없는 고아로 만들었을 때, 재인은 엄마와의 연이 끊어진 것은 속상했지만 친부와 연이 이어질 리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할 수만 있다면, 제 몸에 남아 있을 그의 피를 다 뽑아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재인 씨가 그런 식으로 나에게 접근했던 건, 결국 언젠가는 세상에 재인 씨의 친부에 관해 밝힐 각오도 했다는 건데.”
“사실은 그랬어요. 그 사람은 나를 숨기고 싶어 하니까. 내가 그 사람의 딸이라고 드러내는 것이 그 사람에게 복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태서 씨를 통해서 내 존재를 알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재인이 태서를 반듯하게 응시했다.
“나는 이제 강태서 씨를 이용하고 싶지는 않아요.”
“왜죠.”
질문에 떠오른 대답은 단 하나였다.
좋아하니까.
뒤늦게 어떤 말을 할 뻔했는지를 깨달은 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