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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속수무책으로 이끌리는 중 (50/123)


#50. 속수무책으로 이끌리는 중
2022.12.20.



“김 실장에게 전화해 봐. 회장님 지금 어디에 계신지.”

“예.”

혹시 몰라 재단 사무실에 들러 이것저것 살핀 뒤 집에 돌아오니 남편 대훈이 없었다. 승희가 최 비서에게 지시를 내리며 소파에 앉자 과천댁이 냉큼 두통약과 물을 내밀었다.


“유리는?”

“아직 안 일어난 것 같아요.”

알약을 삼킨 승희가 과천댁에게 가서 일 보라고 손을 내저은 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같잖은 윤재인 때문에 아침부터 소득 없이 바빴다는 게 불쾌했다.

더군다나 그곳에서 강선 그룹의 강태서를 만날 줄은 몰랐다. 저를 대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젊은 놈이 귀하게 자라 무서운 거라고는 없는 모양이다. 인물이야 세상 훤했지만, 어른 어려운 줄 모르는 건 마음에 안 들었다.


“쯧.”

마음 같아서는 좀 더 나긋나긋한 사위를 들이고 싶지만, 딸이 목매는 것을 보니 마음 돌리기는 글렀다. 하나뿐인 딸이 갖고 싶어 하는 건 그게 무엇이든, 어떻게든 구해 줬다. 그러니 남자라고 다를 것 없다.

남편이 오면 상황의 심각성을 알릴 생각이었다. 강태서가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듣고 저와 최 비서를 두고 그딴 협박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재단 사무실에서만 지속해 온 관계였다. 증거가 있을 리 없다.

아까는 기에 눌려 되돌아왔지만 조만간 윤재인, 그 되바라진 것을 데려다 주제를 알게 한 뒤 미국으로 내쫓을 생각이었다. 다시는 한국에 발도 못 붙이게 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강태서도 불러들이게 할 생각이었다. 결혼 전에 잠깐 여자를 만난 정도는 묻어 주되, 유리를 기만한 것은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강태서가 제 진짜 약혼자가 누구인지 안다는 듯 말했지만, 어차피 결혼 약속을 한 당사자 둘 다 고인이 된 마당이었다. 게다가 이 바닥에 이미 소문까지 다 퍼졌다.

이렇게나 크게 일이 벌어졌는데 모른다, 하고 밀어붙이면 제깟 게 뭘 어쩌겠어.


“어딜 감히.”

누가 뭐라고 해도 강선 그룹 강신재 회장의 안사돈 자리는 제 것이어야 했다. 모임에서나 사학 협회 등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어떤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이 승희를 우러르는 것은 현양 건설의 안주인이라거나 현양 재단의 이사장이어서가 아니었다. 강선 그룹이라는 배경에 뛰어난 학벌과 능력까지 겸비한 강태서의 장모 자리가 그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딸 가진 부모라면 모두가 탐내는 강태서는 일종의 트로피였다. 딸을 잘 키웠다는 트로피.


“최고에는 최고가 어울리는 법이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으르렁거리는 강태서를 어떻게 손바닥에 올려놓을지를 고민하며 눈을 굴리던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이에요?”

“아닌데요. 네, 누구세요.”

과천댁이 인터폰에 대고 물었다. 그러고는 잠시 뒤, 작은 마닐라 봉투를 들고 왔다.


“이사장님 앞으로 퀵서비스가 왔는데요?”

“퀵서비스?”

주말 오후에 집으로 퀵서비스가 올 것이 뭐가 있나. 의아한 표정으로 받아 든 봉투를 열어 본 승희의 눈이 커졌다. 사진 몇 장에 이어 나온 것은 메모가 적힌 카드였다.

<선물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강태서>

오늘 일에 대해 입 다물라는 뜻이 분명한 경고에 숨이 콱 막히는 듯했다. 승희의 가느다란 눈이 주방에 선 과천댁을 향했다.

점심 준비에 여념이 없는 뒷모습을 확인한 후에 서둘러 봉투 안에 내용물을 담아 추슬렀다. 핸드폰을 집어 드는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어디야.”

―네, 지금 김 실장님께 전화드리는 중인데, 안 받으셔서요.

“됐고, 서재로 들어와. 당장.”

최 비서를 부르는 승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 * *



“전달했습니까.”

―네. 말씀하신 자료 바로 퀵서비스로 보냈습니다.

“반응은요.”

―조금 전에 비서실로 연락이 왔습니다. 본부장님을 만나고 싶다고요.

“피차 봐서 좋을 게 없는 사이인데.”

장 실장의 보고를 받으며 태서가 비스듬히 웃었다. 지난 10년, 현양 건설을 안팎으로 파던 태서의 레이더에 걸린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오늘 지승희에게 보낸 사진은 그중 일부였다. 현양 재단 지승희 이사장과 그녀의 비서 최지환이 오래도록 불륜 관계를 지속해 왔다는 증거 사진이었다.

처음 접했을 때는 그 추잡스러움에 혀를 차며 웃어넘겼던 정보였는데, 나서서 재인을 건드리는 걸 봤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겠죠.

“그러게, 똑바로 사셨어야지.”

사실, 마음 같아서는 아까 재인의 집 앞에서 맞닥뜨렸을 때 그대로 찍어 누르고 싶었다. 하지만 강태서는 때를 아는 사냥꾼이었다. 숨통을 끊으려면 언제 어디를 물어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직은 아쉬워도 발톱을 숨겨야 할 때였다. 재인이 불편하지 않도록 지승희를 살짝 겁주는 것만으로 참아야 했다.


“그따위로 살아 놓고 감히 누구를 건드려.”

짙은 눈썹을 찡그린 태서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저녁잠에서 깬 재인은 소파에 앉아 배달 음식을 뭘 시킬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본부장님,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

“말씀하세요.”

―왜 윤재인 씨에게 약혼의 자초지종을 밝히지 않으십니까? 처음부터 밝히셨으면 조금 더…….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네?

“사실은 내가 네 정혼자다, 얼굴 한번 본 적 없을 조부가 30년 전쯤 너와 내 결혼을 약속했다더라. 무턱대고 그렇게 말하면서 다가오는 남자, 매력 있습니까?”

―……아뇨, 싫네요.

“나도 들을 때마다 어이없던 이야기입니다. 나는 그나마 직접 조부에게 듣기라도 했지. 친부 쪽에 좋은 기억이라고는 없을 사람에게 그걸 뭐 하러 말합니까.”

장 실장의 의문을 풀어 준 태서가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뭘 먹을지 고민하는 모습마저 예쁘다니, 제가 생각해도 제대로 감긴 상황이 우스운 동시에 기분 좋았다.


“내가 얻고 싶은 건 윤재인의 온전한 마음입니다. 어릴 때 조부끼리 정한 약혼, 정혼. 그런 건 상관없어야 합니다.”

―……본부장님.

“네.”

―제가 멋있다고 말씀드린 적 있었나요.

“늘 눈빛으로 말씀하시는 걸 알고 있습니다.”

―…….

“지금은 재수 없다는 눈빛이겠군요.”

태서가 장 실장이 가끔 숨기지 못하고 보여 주는 표정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재인과 함께 푹 자고 나니 세상 개운했다. 잠에서 깼을 때 저보다 먼저 깬 재인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어서 더 좋았다.


“그런 건 나중에, 시간이 흐른 뒤 사실은 이랬다더라, 알고 보면 너랑 나는 운명인 게 분명하다고 너스레 떨듯 웃고 지나가면 될 얘기입니다.”

―그렇네요.

“맞는 말만 하는 상사가 짜증 납니까?”

―……장하십니다.

“주말에 일 부탁해서 미안했는데, 장 실장 목소리 들으니 어째 즐기는 것 같습니다?”

―부정은 안 하겠습니다.

태서가 쿡쿡 웃으며 관자를 카트에 담고는 재인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 섰다. 눈이 마주치자 재인이 웃어 보였다. 태서 역시 윙크하듯 눈을 접어 웃었다.

잠에서 깼을 때, 둘은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태서로서는 처음 겪는 평온한 고요였다. 누구와 함께 잠에서 깬 적 자체가 처음이었기에 태서는 오늘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을 예감했다.

서로를 얼마나 바라봤을까. 누가 먼저 웃었는지는 모르겠다. 웃음도 하품처럼 전염된다는 것을, 태서는 재인을 만난 후에 알게 되었다.


“이번 주까지만 주말 빼앗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저는 받은 만큼 일한다는 것만 알아 주세요.

“잘 알죠. 정재훈, 조대훈 쪽 빈틈없이 주시해 주시고. 현양 건설 노조 측은.”

―계속해서 접촉 중입니다.

“내일부터는 바쁠 겁니다. 앰버는?”

―내일 오전에 도착합니다.

“테드에게 받은 자료 취합해서 스탠바이하세요.”

―네.

장 실장이 제 사람임을 확인한 이후, 태서는 뉴욕의 테드와 장 실장을 연결해 주었다.

그때 장 실장은 태서가 미국 동부와 남부의 굵직한 기업을 집어삼킨 E&K의 공동 대표인 것을 알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가 가진 막대한 정보력과 자금력을 마주하고 줄 잘 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후, 장 실장은 직접 테드와 통화하며 정보를 주고받고, 더욱 넓어진 반경에서 태서를 도왔다. 그러니 지금 그가 스탠바이하라는 지시를 바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오늘, 재인과 이야기를 마친 후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뭐 먹을지 정했습니까?”

오늘 하루는 재인의 집에서 머물며 데이트하기로 했다. 정재훈이나 조대훈을 고려하여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야 하기도 했고, 재인이 퉁퉁 부은 상태로 나가는 것을 꺼린 탓도 있었다.


“삼계탕 어때요?”

“보자…….”

자꾸만 재인이 있는 쪽으로 고개가 기울고, 어깨가 내려간다. 몸의 중심이 기울어 그녀를 향했다. 손과 귀가, 눈이, 코끝이, 입술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담는다.

단시간 내 강태서를 사로잡은 윤재인에게, 태서는 속수무책으로 이끌리는 중이었다.


 

* * *



“글쎄, 유리가 어린애도 아니고. 배고프면 알아서 밥 먹겠지. 다 큰 딸이 밥 안 먹는다는 게 나까지 같이 고민해야 할 일이야? 당신이 오냐오냐 키워서 애가 그렇게 유약한 거잖아!”

못마땅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아내 승희의 전화를 받던 대훈은 초조해하는 김 실장의 표정을 본 후 한숨 지었다.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에 어르신 선물 사 들고 강선 아트 센터 쪽이나 기웃거려 봐. 그만 전화 끊어. 중요한 미팅 있으니 방해할 생각 말고.”

혀를 차며 통화를 끝낸 대훈이 일어섰다. 옷매무새를 확인한 후 김 실장, 그리고 회장실 밖에 있던 다른 임원들과 함께 향한 곳은 현양 건설 대회의실이었다.


“반갑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조대훈입니다.”

대훈은 잘 알려진 비즈니스적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두툼한 손을 내려다본 여자가 생긋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반캅습니다. Amber Young입니다.”

“어, 한국어를 할 줄 아십니까?”

“한국어 인사를 연습해 오셨다고 합니다.”

통역사가 덧붙인 말에 대훈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붉고 긴 머리칼을 틀어 올린 여자 역시 한쪽 눈을 접어 웃었다.

미국 동부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미국 전역으로 범위를 넓힌 E&K의 공동 대표 중 한 명이 이렇게나 젊을 줄이야. 상대가 제 딸 또래의 젊은 여자인 것을 확인한 대훈이 정중한 손길로 자리를 가리켰다.


“앉으시죠.”

나이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관록은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릴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에 대훈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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