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짐승 (49/123)


#49.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짐승
2022.12.16.



“하아…….”

어쩌다 이렇게 됐나. 분명히 현관문이 열렸을 때는 안고 위로해 줄 생각뿐이었는데. 겁이 났을 게 분명한 사람을 다독여 줄 생각뿐이었는데.

처음은 분명 그랬다. 속상했을 재인을 안타깝게 여기며 순수한 마음으로 그녀의 등과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던 태서의 눈에 열감이 번진 것은 젖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재인을 마주한 뒤였다. 짐승처럼 곤두서는 본능을 누르자고, 이럴 때가 아니라고 이를 사리물다가.


“더요.”


“응?”


“더, 더 안아 줘요. 세게.”

 
그녀답지 않은 응석에 이성이 날아갔다. 허리를 숙인 것으로 모자라 재인을 안아 들고 입을 맞추었다.

자꾸만 주저앉을 듯이 미끄러지며 숨을 헐떡이는 재인이 안타까워 나중에는 현관 콘솔 위에 앉혀 두고 파고들듯 입술을 탐했다.


“으응…….”

작게 내뱉은 숨소리마저 달콤했다. 저를 받아들이는 작고도 도톰한 입술이 기꺼워 더 안달이 났다. 조금 더, 조금 더. 윤재인을 통째로 삼켜도 모자랄 것 같은 허기였다.

평생 성욕이라고는 없는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윤재인과 눈만 마주쳐도 등골이 짜릿하다. 윤재인의 향기만 맡아도 피가 뜨거워진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젠장, 손끝과 손바닥이 이렇게나 예민한 부위라는 것은 들어 본 적도 없다.

재인을 만질 때마다, 그녀와 닿을 때마다 숨이 거칠어진다. 그녀의 결 좋은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흐르면, 그녀의 보드라운 뺨이, 연약한 목덜미가 손바닥을 간질이면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후우…….”

자꾸만, 자꾸만 애가 타서 고운 사람을 움키고 저를 새기듯 비벼 대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망가질 것을 아는데도. 정수리 위로 벌건 쇳물을 들이부은 듯, 온몸이 절절 끓었다.

귀한 사람이니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실제 하는 행동은 그렇지 못하다. 욕심 채우기에 급해 씹듯이 물어 빨고, 발라 삼키듯 핥았다.

재인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만. 무례하게 굴던 불청객을 잊을 때까지만.

마음먹은 것과는 다르게 마냥 상냥하지만은 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현관의 조명이 수십 번 꺼지고 켜지기를 반복했다.


 

* * *

소파에 앉은 태서의 시선이 재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재인은 커피를 내린다, 쿠키를 꺼낸다, 부산 떨며 주방에서 종종거렸다.


“뭐 안 꺼내도 되는데.”

그만하고 옆으로 오라는 태서의 눈짓에도 재인은 입을 꾹 다문 채 접시를 꺼냈다. 좀처럼 주방에서 벗어나지 않고 바쁜 척하는 재인을 기다리던 태서가 일어섰다. 그러자 재인이 움찔하며 뒤돌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태서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손님 대접하지 말아요. 손님 할 생각 없습니다. 앞으로 자주 올 건데, 편하게 대해요.”

집주인보다 더 집주인처럼 구는 태서의 뻔뻔한 말에도 재인은 행주를 들어 쟁반을 닦았다. 벌써 세 번째 닦는 중이라는 것을, 그녀는 모르는 듯했다.

함께 장을 본 뒤 태서의 집에서 레몬 마들렌을 구워 먹고 그림을 감상하기로 했던 계획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꽤 오래도록 운 재인을 배려해서 오늘은 재인의 집에서 머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울음을 그친 후, 세수하고 나온 재인은 태서를 바로 보지 못했다. 아마도 태서의 앞에서 운 것이 창피하고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왜 자꾸 내 눈 피합니까.”

“…….”

“자꾸 그러면 나 섭섭해지는데.”

하나도 안 섭섭한 얼굴의 태서가 어느새 재인의 뒤로 다가왔다. 뒤에서 안아 분주히 놀리던 손을 잡은 뒤에야 재인이 한숨과 함께 몸에 힘을 뺐다.


“눈 부은 거 놀릴 생각 없습니다.”

“음…….”

놀리기는커녕, 사진 찍어 두고두고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된 게, 눈 코 입 뺨이 퉁퉁 부은 것마저 이렇게나 예쁜 것인지. 핸드폰을 꺼내어 들이밀고 싶었지만 놀린다고 싫어할 재인을 생각해서 겨우 참았다.


“누구 앞에서 운 게 처음이라서, 좀 어색해서 그래요. 내가 왜 그랬나 모르겠어요.”

그 말에 태서의 입이 또 귀에 걸렸다. 윤재인의 뭐라도 되고 싶었던 그가 처음으로 갖게 된 타이틀이었다. 윤재인을 마음 놓고 울게 만든 사람.

태서는 뒤에서 그녀를 안은 채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스슥 스슥, 실내화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재인은 그의 가슴에 폭 안겨 있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태서에게 안긴 채 소파에 누운 것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자연스러운 거 아니에요?”

“음?”

부은 눈으로 흘겨보기까지 하니 사람 미칠 노릇이었다. 태서가 웃음을 참으며 재인을 내려다보았다. 품에 쏙 들어온 부피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서 여간해서는 놔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태서 씨 집에는 나중에 가야겠어요. 갔다간 큰일 나겠어.”

조그맣게 삐죽이는 입술도, 씰룩거리는 코도 빨갰다. 제 가슴팍에다 대고 투덜거리는 재인을 바라보는 태서의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호랑이 굴로 들어가겠다고 했던 것 같아요. 아, 여우인가. 늑대인 것도 같고.”

태서는 저를 짐승에 비유하는 재인의 말을 반박할 생각이 없었다. 저도 몰랐는데, 최근에 확실히 알게 됐다. 강태서는 짐승이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짐승.


“이참에.”

“네?”

“호랑이 굴에서 사는 건 어때요.”

태서는 심상하게 말하며 재인의 정수리에 입 맞췄다. 재인이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굳어 버린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호랑이 굴에 익숙해질 겸.”

“설마, 지금 동거하자고…….”

“여기 살면 아까와 같은 일이 또 있을 겁니다. 보기 싫은 사람 마주치지 말아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삽시다, 우리.”

태서는 재인의 집에 들어가기 전, 장 실장과 짧은 통화를 끝냈다. 간단한 지시를 내린 뒤 그가 출장 다녀온 사이의 조대훈과 정재훈의 동향을 파악했고, 오늘 그들의 동선까지 체크했다.

다음번에는 지승희가 아니라 그들이 들이닥칠 수도 있다.

교양 있는 척 위선을 떠는 지승희나 위엄 있는 척 가식을 떠는 조대훈은 차라리 상대하기 쉬웠다. 가장 큰 위험은 한 번 재인을 납치했던 전적이 있는 정재훈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동거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사생활 보장해 줄게요. 이층집입니다. 나는 1층에 머물고 2층은 통째로 재인 씨에게 내어 줄게요. 잘생기고 든든한 남자 이웃이 있다고 생각해 주면, 안 됩니까?”

나이 서른 넘어 시작하게 된 첫 연애 앞에, 태서는 솔직했다. 여태까지는 좋아하는 사람이 좀 더 웃어 주기를 바라면서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의 안전이 걸린 문제라면 얘기가 다르다. 태서는 저를 선택한 재인의 평온한 나날을 지켜 주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잖아요.”

“1층이랑 2층 사이에 문이 있습니다. 허락 없이 그 문 열지 않을게요.”

철망으로 된 방묘문이기는 했지만, 문은 문이었으니 거짓말은 아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왕 연애할 거, 세상이 시끄럽게 해 보자고 했던 말, 잊었습니까? 남들 하는 건 다 할 생각이고, 남들 못 하는 것도 할 생각인데, 난.”

태서가 빙긋이 웃으며 손끝으로 재인의 어깨를 매만졌다.


“생각해 봐요. 재인 씨가 결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도 오늘 내내 그 문제를 두고 얘기하게 될 겁니다. 오늘, 헤어지기 전에 결론을 보게 될 거고요. 내가 제시한 방향으로.”

“…….”

“나, 협상과 설득에 능한 사람인데. 괜찮겠어요? 재인 씨를 우리 집 2층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나는 수단 가리지 않을 생각인데.”

잘생긴 외모와 현란한 유혹의 기술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어떻게든 재인을 흔들겠다는 말이었다. 예고에 깔린 집요함을 느꼈는지, 재인의 목소리가 한껏 누그러들었다.


“나에 대한 존중은요?”

“존중하니까 2층을 내어 주죠. 아니면 내 방으로 가자고 했을 겁니다.”

“그게 무슨…….”

“사귄 지 며칠이나 됐다고 동거를 제안하나, 싶겠죠. 미친놈인가 싶을 겁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내가 불안해서 그럽니다. 누가 또 재인 씨 못살게 굴까 봐.”

호시탐탐 윤재인을 노리는 인간들에게 틈을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빨리 그녀의 허락을 받아 거슬리는 것들을 하나씩 치워 버리고 싶었다.


“알아요. 윤재인 씨 똑똑한 사람이죠. 재인 씨 일은 재인 씨가 알아서 하겠지만, 남자 친구도 좀 참견하게 해 줘요.”

해사하게 웃으며 눈을 맞추니 재인이 가만히 입술을 말아 물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면 기대가 된다. 더 흔들고 싶어서 몸이 단다.


“재인 씨가 나 없는 곳에서 우는 것도 싫고.”

“안 울어요.”

“내 앞에서만 울면 좋겠습니다.”

예쁘게 우는 거 보고 눈이 뒤집혀서 재인의 입술을 저 꼴로 만든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뻔뻔한 태서는 다정하게 속삭이며 재인의 머리칼을 넘겼다.

윤재인은 보고, 다시 봐도. 새록새록 예쁜 사람이었다.


“호랑이 굴, 꽤 쾌적합니다. 원한다면 당장 구경시켜 줄 수도 있고.”

“이 꼴로 어딜 간다고요.”

“그 꼴에 눈 돌아간 사람 여기 있습니다.”

“…….”

당장 키스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얌전히 두 뺨을 붉히는 재인의 모습에 태서는 정말 제가 호랑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리 날카롭지도 않은 송곳니가 근질근질했다.


“일단, 우리 얘기부터 해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는지 재인이 말을 돌렸다. 어차피 태서는 지승희의 등장으로 많이 놀랐을 재인을 위해 지금은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무슨 얘기 할까요.”

작은 목소리는 낮고도 울림이 있었다. 실컷 울고 난 뒤라서 그런 걸까. 재인은 그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나에 대해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 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뭐든 좋으니 얘기해 봐요.”

한참 고민하던 재인이 입을 열었다. 제 품 안에서 들려오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태서 역시 눈을 감았다.


“나는요, 예전에는 남자라면 치가 떨릴 만큼 싫었어요.”

“지금은?”

“지금도 그래요. 강태서 씨 말고는.”

“아, 그 말 좋은데.”

팔에 힘을 주어 안자 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톡톡, 사이다가 터지듯 가슴께가 간지러워진다. 태서는 큰 숨을 들이켜고 내쉬며 품 안의 윤재인을 만끽했다.


“계속 얘기해요.”

“상화를 만나기 전까지, 나한테는 엄마가 전부였어요. 그게 싫지 않았구요. 엄마는, 내게 결핍을 알려 준 사람이 아니라 충만을 알려 준 사람이었어요.”

태서는 재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즐거운 추억을 들으며 함께 웃었고 엄마가 아프다는 걸 알게 된 후 홀로 한국에 오게 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녀의 어깨와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끔찍했던 사고도, 홀로 감당해야 했던 모친의 죽음도. 모두 보고서를 통해 태서가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재인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은 전혀 달랐다. 같이 한숨 쉬고, 때로는 같이 말을 아꼈다.

태서는 어느새 졸음에 겨워하며 제 이야기를 털어놓는 재인이 서러워지지 않도록, 허전해하지 않도록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늘어놓으니 조금 더 편한지, 재인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그래서 미안했어요. 강태서 씨를 이용하려고 마음먹은 게 부끄럽고.”

“음…….”

“사실, 겁도 났어요. 강태서라는 사람이 조금씩 내 머릿속을 차지해 가는 게…….”

재인의 등과 어깨를 토닥이는 커다란 손의 속도는 일정했다. 태서는 복수를 위해 저를 이용할 생각을 했다고 고백하는 재인의 몸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내가 누군가와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또 두렵고……. 그런데 또 태서 씨를 보면……. 그래서 자꾸…….”

조금씩 늘어지고 끊기던 말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규칙적인 숨소리가 태서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 숨소리를 오래도록 가슴에 새기던 태서가 입을 연 것은 한참 후였다.


“잘 자요.”

낮은 목소리 역시 졸음에 잠겨 있었다. 출장으로 인한 피곤이 겨우 몇 시간의 수면으로 풀렸을 리 없다.

엷은 미소를 띤 채 잠든 태서와 그의 품에 안겨 잠든 재인의 위로 겨울 오후의 햇살이 드리웠다. 이제 막 시작된 연인을 감싸는, 상냥하고도 너그러운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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