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 누가 누굴 보고 (48/123)


#48. 누가 누굴 보고
2022.12.13.



“그렇습니까?”

“…….”

충격으로 말문이 막힌 지승희의 머릿속에 오래전 남편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당신, 알고 있었어요? 아까 강선 아트 센터 임 관장님께서 우리 유리보고 태서 군 약혼녀라고 하던데. 어떻게 된 거예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강선일 회장님과 약속하신 모양이야.”


“유리 갖기도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유리가 태어날 걸 어떻게 알고 약혼을…….”

 
조성환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들려왔던 건 승희가 친척 오빠를 통해 대훈을 막 소개받고 만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러고 나서 두 달이 지나 유리를 가졌고, 급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가만히 옛 기억을 더듬던 승희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당신, 설마…….”


“윤세나가 미국으로 가기 전에 아버지를 만난 건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태어나지도 않은 애를 두고 그런 약속을 하셨는지는, 나도 몰랐어.”


“윤세나, 아니라며.”

 
그때의 배신감을 잊지 못한다. 잘난 남자이니 스쳐 지나간 여자가 적지는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문제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남편의 유일한 스캔들 상대가 바로 당시 영화계와 브라운관을 주름잡던 배우 윤세나였다는 것이다.

승희는 윤세나를 잘 알고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한국 무용 콩쿠르에서 매번 만나던 사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예쁜 외모와 뛰어난 실력으로 심사 위원의 찬사를 독차지하던 윤세나는 재벌가에서 곱게만 자란 승희를 좌절하게 했다. 아무리 돈과 공을 들여도 사람들의 시선은 승희보다 두 살 어린 세나를 향했다.

그런데 대학 입학을 앞두고 윤세나가 갑자기 텔레비전 광고를 찍었다. 그것을 계기로 연기를 시작하더니 무용을 그만두고 연예계에 들어섰다.

그래서 더 미웠다. 승희가 온 힘을 다해 그렇게나 매달려 온 한국 무용을 윤세나는 미련 없이 그만둔 것이다.

마치, 이딴 건 너나 하라는 듯이.


“윤세나가 당신 애 갖고 미국으로 잠적했다는 거, 헛소문이라고 그랬잖아!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상관없잖아. 당신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고, 어차피 현양 건설 안주인은 당신이야.”


“애 있는 거 맞지? 애는 어떻게 할 건데!”


“윤세나 성격에 애 앞세워 나타나지는 않을 거니까 걱정할 것 없어. 그보다는 앞으로 유리 교육이나 똑바로 시켜. 강선이랑 사돈 맺는 게 보통 일인 줄 알아? 유리가 괜히 이상한 무리랑 어울리지 않게 관리 잘해.”

 
그 후 승희는 이를 악물고 유리를 키웠다. 어디선가 살고 있을 윤세나의 딸을 본 적은 없었지만, 무조건 그 애보다 잘 키우려는 욕심이었다.

최고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최상의 환경을 만들어 주었고, 좋은 것은 모두 딸에게 주었다. 하등 모자람 없이 키운 이유는 분명했다.

윤세나가 한국 무용을 그만둔 후 나간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은 것, 윤세나가 만나던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은 것, 그 모든 것이 승희에게는 치욕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 딸만큼은 저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 무조건 윤세나의 딸보다 빛나야 했다.

딸이 윤세나의 딸 대신에 강선 그룹의 며느리 자리를 차지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 누구도 감히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제 엄마를 똑 닮은 윤재인을 집에 데리고 들어왔다. 그때의 충격이란.


“왜요. 왜 내가 저 애를 맡아야 하는데! 뒤늦게 아비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당신, 우리 유리한테 부끄럽지도 않아?”


“그런 거 아냐. 제 엄마가 아프다고 병원비를 달라잖아!”


“그깟 돈, 거지 같은 것들에게 주면 되잖아! 애는 왜 데리고 오는데!”


“그 돈으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괜히 기자 만나거나 하면 골치 아파. 제 엄마 치료 끝날 때까지만 재단에서 이것저것 가르치면서 붙들어 둬. 일단 고아로 만들어 뒀으니.”

 
무용을 배운 거라곤 어릴 때 유치원 발레 교실에 다닌 게 전부라던 아이였다. 그런데 시험 삼아 한국 무용을 가르쳤더니 꽃처럼 피어나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따로 별채를 내주지 않고 집 계단 밑 창고에 머물게 하여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도록 한 것은 그래서였다. 윤세나의 딸이 한국에 머물던 7년간, 그 아이는 늘 승희의 시선 안에 있었다.

딱 한 번, 교통사고가 났던 그날만 제외하고는.

그렇게나 꼭꼭 숨겼는데도 남자를 홀리다니, 제 엄마랑 똑같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한국에 와서 이제는 강태서도 홀린 모양이다.

딸 유리가 바라고 또 바라는 유일한 상대. 그 강태서가 윤재인의 집 앞에 와 있다니. 집에 들락거릴 정도라니, 딸 아이의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태서 군?”

승희는 분노를 삼키며 딸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모멸감에 치가 떨렸지만, 이를 사리물어 숨길 수 있었다.


“네, 말씀하시죠. 제가 이사장님 사위가 맞습니까?”

조롱 섞인 미소를 버텨 내야 했다. 지난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강선 그룹의 예비 며느리로 알려져 온 것은 그녀의 딸이었다. 이 바닥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과거의 일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의심의 싹을 틔우지 않기 위해서는 승희 자신이 떳떳하고 당당해야 했다. 아무리 강태서가 잘났다고 한들, 아직은 그저 서른을 갓 넘긴 애송이에 불과할 테다.


“아직 사위는 아니지. 다만 할아버님들끼리 약속을 하신 건 사실이니까 예비 사위라고는 할 수 있겠지. 임 관장님께서 먼저 우리 유리를 예비 며느리라고 부르셨는데,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나. 맞춰 드려야지.”

“아, 그래서?”

“나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자네를 예비 사위라고 말하고 다니기는 쉽지 않았네. 하지만, 어쩌겠어. 이미 30년 전에 집안끼리 한 혼약인 것을.”

승희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채 저를 내려다보는 태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손에 올려 두고 주무르기 쉬운 사윗감을 원했다.

하지만 딸이 원하는 남자가 강태서였다. 그리고 그녀 역시 강선 그룹의 사돈 자리가 탐났다. 그러니 넘치는 혈기로 조금은 버릇없게 구는 젊은이를 참아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윤재인이라니. 그 아이만은 절대로 참아 줄 생각이 없다. 이것만큼은 분명히 해야 했다. 괜한 소문이 나기 전에 끊어 내야 했다.

듣자 하니 윤재인이 한국에 들어온 게 얼마 전이라고 했다. 그러니 아직 깊은 사이도 아닐 것이다. 조금 자존심은 상해도 그녀가 나서서 철저하게 단속해야 하는 이유였다.


“그런데 자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어떻게 집안끼리 혼약 맺은 우리 유리를 두고 아침부터 더럽게…….”

“이사장님.”

어디서 감히 어른의 말을 끊어 먹어? 승희가 태서를 향해 눈을 찌푸렸다. 그런데 태서는 그녀를 향해 정중한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 여유만만함이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하던 승희가 한마디 더 하려던 때였다. 태서가 긴 팔을 들어 조금 열려 있던 문을 닫았다. 마치, 당신은 들어갈 수 없다는 듯이.

닫힌 문에서 다시 오만방자한 젊은이에게 시선을 돌린 순간, 승희는 저도 모르게 큰 숨을 들이켰다. 좀 전까지 짓고 있던 그린 듯한 미소를 감쪽같이 지워 낸 태서가 사신 같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우습게 보이십니까?”

“……뭐?”

당황한 승희의 눈동자가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태서는 조금 더 고개를 숙여 승희의 귓가에 분명히 들리게끔 속삭였다.


“나를, 진짜 약혼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머저리쯤으로 알고 계시나 봅니다.”

알이 커다란 진주 반지를 낀 손가락이 시커멓게 변하도록 주먹을 쥔 것도, 그 주먹 쥔 손이 벌벌 떨린다는 것도 몰랐다. 승희는 갑자기 아득하게 멀어진 복도 끝을 노려보며 진정되지 않는 숨을 고르려 애썼다.


“자네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삐걱삐걱, 굳은 목을 움직여 겨우 마주한 태서의 눈빛이 서늘했다. 하지만 승희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어떻든 강선 그룹과의 혼맥은 지켜 내야 했다.

딸을 위해서라도, 남편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저 자신을 위해서라도.


“항간에 떠도는 소문 따위를 믿고 예비 장모에게 이렇게 무례해서야 되겠나?”

눈을 부릅뜬 승희를 한참이나 응시하던 태서가 다시 빙긋 웃어 보였다. 사뭇 다정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시선과 달리 낮은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라…….”

태서의 시선이 느긋하게 옮겨 간 곳은 승희의 곁에 선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최 비서였다. 불안함을 느낀 승희가 최 비서를 곁눈질하며 이를 사리물었다.


“제가 가십을 좋아해서.”

“…….”

“이사장님께 열 살 어린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도 들었습니다만.”

“…….”

“그것도 20년 넘게 사귀셨다던데.”

“도,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 지른 승희의 호흡이 떨렸다. 사색이 된 건 승희의 뒤에 선 최 비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서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었다. 승희는 그린 듯 휘어져 올라가는 태서의 입꼬리가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아. 사귄 게 아니라 그냥 같이 잠만 주무신 건가.”

“자네!”

“그 말도 웃기네요. 같이 잠만 자기는 무슨, 딴짓을 더 했을 텐데. 그렇죠? 한국말 참 재미있어요.”

더는 대꾸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승희를 향해 태서가 슬쩍 몸을 기울였다.


“그러게.”

“…….”

“똑바로 사시지 그러셨어요.”

“…….”

“누가 누굴 보고 더럽대. 감히.”

승희의 거친 숨소리를 확인하듯 가까이에서 속삭인 태서가 다시 허리를 쭉 폈다. 승희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당분간 조 회장님 만날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씨근덕거리는 승희를 향해 태서가 상냥하게 눈을 접어 미소 지었다.


“원하시면 내일이라도 시간을 내 보겠습니다. 퍽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게 될 것 같은데.”

“아, 아니…….”

“여기에 더 볼일, 있으십니까?”

입술을 꽉 다문 채 태서를 노려보던 승희가 휙, 돌아섰다. 솟구친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그녀의 등에 태서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조만간 댁으로 선물 하나 보내 드리겠습니다. 마음에 드실 겁니다.”

승희는 태서가 뭘 보내든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에 함축된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이 주변에 얼씬거리지 말라는, 입을 조심하라는, 윤재인을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 분명한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승희는 돌아보지 않고 최 비서를 앞세워 복도를 걸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동안, 현관문 밖으로 고개만 내밀고 자신을 쏘아보는 이들의 시선 따위는 너절하기만 했다.


“어떻게 할까요?”

“윤재인 연락처 알아내.”

“예, 알겠습니다.”

최 비서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 승희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윤재인의 집 앞에 선 채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강태서를 눈에 담았다. 분해서 일그러진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저 넘치게 잘난 남자는 지승희의 사위여야 했다. 죽어 버린 윤세나 따위가 아니라.

* * *



“미안해요. 음, 어떻게 된 거냐면, 흡……!”

밖에서 지승희와 무슨 실랑이를 벌인 건지, 한참 만에야 집 안에 들어선 태서에게 변명하려던 재인은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현관에 들어선 태서가 그녀를 안아 제 품에 가둔 탓이었다.

태서는 재인을 강하게 끌어안고 허리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그리고 마치 재인의 체향을 맡듯, 오래도록 숨을 들이켰다. 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저기, 태서 씨…….”

당황한 재인이 고개를 들고 뻣뻣하게 서 있자 목의 부드러운 살갗을 타고 태서가 깊은숨을 내쉬는 것이 느껴졌다.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던 재인은 어느새 그가 한 손으로 제 뒷머리를 감싸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등과 어깨를 살짝 두드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토닥. 토닥. 토닥.


“잘 자랐네요. 윤재인 씨는.”

“…….”

“저런 사람 곁에서도. 이렇게나 반듯하고 예쁘게.”

“…….”

“어머님이 잘 키우셨나 봐요.”

속삭이는 다정한 말에 시야가 흔들렸다. 현관 천장의 조명등이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흐릿해졌다.


“흐…….”

어쩌지 못하고 흐른 눈물이 태서의 너른 가슴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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