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 애인 뒀다 뭐에 씁니까 (47/123)


#47. 애인 뒀다 뭐에 씁니까
2022.12.09.


재인의 새까만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신경질적으로 계속해서 벨을 눌러 대는 탓에 초인종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주소, 이 집 맞지?”

“예, 맞습니다.”

“뭐야, 어디 간 거야?”

문밖에서 들려오는 짜증 섞인 목소리는 지승희의 것이 맞았다. 주소를 확인하며 대답하는 남자는 지승희가 늘 끼고 다니는 비서인 듯했다.

재인의 서늘한 시선이 인터폰 화면에서 현관문으로 옮겨 갔다. 어느새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분노가 켜켜이 쌓였다.


“나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새벽에 연락 주셨을 때부터 계속 살폈습니다. 세 시간 전에 잠깐 운동하러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 뒤 나온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남자의 말이 현관문 너머로 분명하게 들려왔다. 재인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뱉었다.


“현관문 두드려 봐. 팔자 좋게 늦잠 자는가 본데, 어떻게든 문 열게 해.”

“예.”

쾅쾅쾅, 망설임 없는 발길질과 주먹질이 현관을 두드려 댔다. 재인이 눈을 감으며 탄식했다.

하긴, 어제 조유리가 그 꼴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강태서와의 연애라는 단꿈에 빠져 이 모녀의 존재를 잊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재인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확인했다. 진동이 울리는 화면에는 <강태서>, 이름 세 글자가 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재인은 태서의 전화를 거절했다. 그러고는 바로 연락처 목록을 내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신호가 간 후, 상대방의 응답을 확인한 재인이 입을 열었다.


“904호예요. 지금 누가 우리 집 초인종을 막 눌러 대고 현관문까지 두드려 대는데……. 아무리 봐도 외부인 같아요. 이 오피스텔에 외부인은 허락 없이 못 들어오는 거 아니었나요? 배달 음식도 밑에서 받아 오는 판에, 외부인이라뇨.”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경비 업체의 젊은 남자 직원과 통화를 끝낸 재인은 여전히 시끄러운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국, 계속 울려 대는 인터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네? 하, 얘 봐. 네에?

“이렇게 남의 집 문을 부술 듯이 굴고 귀찮게 하면 경찰 부를 겁니다.”

시끄럽게 군다고 해서 숙맥처럼 현관문을 열어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곳은 재인만의 공간이다. 그녀가 싫어하는 그 누구도 들어와선 안 될 곳이었다.

얼굴 맞대고 얘기해 봤자 좋을 일이 없을 것은 분명했다. 할 얘기라도 있으면 모를까, 재인은 지승희와 만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사람이 없는 척,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예전이라면 고분고분하게 굴었을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의 재인에게는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경찰? 얘, 불러 봐.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빨리 문 안 열어?

“제가 왜 문을 열어야 하는데요. 남의 집에 찾아와 이러는 거, 불법인 건 아세요?”

―최 비서,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얘, 너 나 누군지 모르니? 그새 잊었어? 어른이 찾아왔으면 빨리 문 열고 차라도 내와야지. 너 내가 그렇게 가르쳤니?

가르치긴 누가 누구를 가르쳐. 재인이 조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누구인지 아니까 문을 안 열어 드리죠. 이렇게 찾아오시면 제가 반갑게 문 열어 드리고 뭐라도 대접해 드릴 줄 아셨어요?”

―……뭐?

“아줌마.”

―뭐, 뭐? 아줌마아?

“냉수든 차든, 줘 봤자 그거 내가 뒤집어쓸 게 뻔한데, 누구 좋으라고 문을 열고 차를 대접해 드려요.”

―네가 미쳤구나?

“미친 건 어제 조유리 같던데요. 집에는 잘 들어갔나요? 제 앞에서 와인 한 병 다 뒤집어쓴 이후로는 못 봐서요.”

―…… 최 비서, 당장 이 문 열어. 어떻게든 끌어내란 말이야!

지승희의 악다구니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부아를 돋울 말 한마디를 더 보태려던 재인이 진동하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부디 강태서가 지하 주차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기를 바랐다. 괜히 올라와 이 꼴을 보게 된다면……. 재인이 고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인터폰을 끊고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태서 씨.”

―재촉하려는 거 아닙니다. 아까 지하 주차장에 들어오면서 통화가 끊어져서 다시 전화한 겁니다. 밑에 와 있어요.

“음,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 있어요?”

―얼마든지. 천천히 준비해요.

“네. 내가 내려갈게요. 그러니까…….”

올라오지 말라고 하려던 재인의 입술이 다물렸다. 또다시 현관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히스테릭한 고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지금 이 문 못 열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윤재인, 네가 그동안 아주 편하게 살았지? 그게 다 누구 덕인 것 같니? 좋게 말할 때 문 열어, 당장!”

들렸을까. 강태서도 들었을까.

마른침을 삼키고 태서의 말을 기다리던 재인이 다시 입술을 뗐다.


“올라오지 말아요. 곧 내려갈게요.”

―……일단은 재인 씨가 하라는 대로 하겠지만.

들은 게 분명하다. 재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굳이 숨기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애인을 아무것도 모르는 등신으로 만들지는 말아요.

“……애인요?”

―애인, 연인, 남자 친구. 어제부로 연애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날 바뀌었다고 발뺌합니까?

이 상황에서도 남자의 느물거림에 웃음이 난다니. 재인은 차가워진 손끝에 온기가 조금 도는 것을 느끼며 꾹꾹 주물렀다.


“발뺌하는 게 아니라…….”

―나 멀쩡합니다. 능력 없고 눈치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 맙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일이라서요.”

―난 나한테 문제 생기면, 그리고 재인 씨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재인 씨에게 상담하고 도움 요청할 건데.

“음…….”

―애인 뒀다 뭐에 씁니까. 못도 박아 달라고 하고, 그림도 걸어 달라고 하고, 때로는 쓰레기도 대신 버려 달라고 해야지.

쓰레기. 태서가 강조하듯 힘주어 말한 그 단어가 지금도 문밖에 서 있는 지승희를 가리키는 것 같은 건 왜일까.

그러고 보면 신기하기는 했다. 적어도 밖에서는 세상 교양을 혼자 다 갖춘 듯 굴던 지승희가 오피스텔 복도에서 소리를 질러 대다니. 그만큼 제 존재가 그녀에게 거슬린다는 뜻일 테다. 그건 꽤 마음에 들었다.

태서의 말을 들으며 재인은 굳이 이런 일에 제가 자존심을 챙길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난처하고 곤란한 상황이라면 지나가는 사람의 도움도 받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하물며 남자 친구라면.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로서는 충분히 서운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음, 그러면요.”

―뭐든 말해요. 자초지종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감히 내 애인에게 문 열라고 협박하는 그 사람, 어떻게 하기를 원합니까.

태서의 말에 재인은 가슴 한구석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꽉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 편. 살면서 엄마와 상화 말고 이렇게나 제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또 있었나.

태서에게 작은 목소리로 부탁하는 재인의 코끝이 빨개진 채였다.


 

* * *



―데리러 와 줘요.

 
그 말에 날듯이 걸어 재인이 보내 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마음이 급한데 1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섰다. 경비 업체 조끼를 입은 남성 둘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9층 버튼을 누르려던 그들은 태서가 이미 눌러 놓은 것을 보고는 닫힘 버튼을 눌렀다.


“하, 외부인이 어떻게 올라갔지? 방명록에 뭐 없던데?”

“그게…….”

“창현 씨 뭐 알아?”

“조금 전에, 현양 재단 이사장 비서라는 사람이 명함을 내밀기에…….”

“뭐? 그래서, 그냥 들여보냈다고?”

“확인할 게 있다고 그래서요.”

조금은 어리숙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시뻘게진 채였다. 태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스크린의 층수를 나타내는 숫자가 바뀌는 것을 바라보았다.


“창현 씨! 신입 교육 때 못 들었어? 입주자와 경찰, 구급대원 외에는 허락 없이 못 들어간다는 거 알아, 몰라.”

“……죄송합니다. 그래도 신원이 확실한 거 같아서…….”

“명함 하나 보고 뭘 확신해. 그리고 아무리 현양 재단 이사장이라고 해도 그래. 그게 누구든 무슨 상관이야. 비상 상황을 제외하고는 규칙에 예외가 없다는 건 기본이잖아!”

재인이 사는 오피스텔의 보안이 확실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오늘 일은 신입 경비 직원의 어처구니없는 실수에서 비롯된 듯했다.

그래도 그렇지.

재인이 처한 상황에 불쾌함을 느낀 태서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고는 숫자가 7이 되었을 때 앞에 선 남자 둘 사이를 헤치고 우뚝 섰다.


“미안합니다. 좀 급해서.”

“아, 예…….”

딩,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태서가 긴 다리를 쭉 뻗었다.

엘리베이터 양옆으로 길게 난 복도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성큼성큼 빠르고 큰 보폭으로 향한 곳은 소란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아직 오전이었다. 태서가 904호로 향하는 동안 현관문을 열고 내다보는 주민들은 모두 눈살을 찌푸린 채였다.

잠시 후, 태서는 재인을 협박하며 소리 지른 것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현양 건설에 대해 털어 온 게 몇 년인데, 조대훈의 아내이자 현양 재단의 이사장인 지승희를 모를 리 없다.


“아이고, 정말.”

뒤에서 오던 경비들이 태서를 지나쳐 뛰었다.


“이렇게 소란 피우시면 어떡합니까!”

태서는 경비가 그들의 일을 하도록 잠시 기다려 줄 생각이었다.

길게는 아니고, 1분 정도만.

* * *



“여기에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가시죠.”

“손 떼십시오.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죄송합니다만, 이곳 방침이 입주자 외 외부인 출입 금지입니다. 저희 신입이 잘 몰라서 들여보낸 모양인데…….”

“최 비서, 일 이따위로밖에 못 해? 내가 지금 여기 몇 분째 서 있는 줄 알아?”

“죄송합니다, 이사장님.”

“아 이사장님이고 뭐고, 나가시죠. 이러시면 저희는 경찰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고성과 재촉이 오가는 사이, 초인종을 노려보며 서 있던 지승희는 제 앞을 막아서는 커다란 남자의 넓은 등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당신 뭐야.”

감히 누구 앞을 막아? 불쾌함에 눈을 좁힌 승희는 평소 신경 쓰는 미간에 깊은 주름이 몇 개나 간 것도 몰랐다.

일련의 소동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904호의 초인종을 누른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네.

그러고는 인터폰을 통해 들려온 재인의 목소리에 허리를 살짝 숙여 인터폰 가까이 다가갔다.


“나 왔습니다. 문 열어 줘요.”

남자의 낮은 목소리에 어이없게도 바로 달칵, 문이 열렸다.


“아침부터 집에 남자 들이는 꼴이 제 엄마를 빼다 박았네. 웃겨, 진짜.”

강태서가 아침부터 재인의 오피스텔에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그녀였다.

지승희가 코웃음을 치며 남자를 비켜서게 할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 괘씸하기 그지없는 윤재인이 사는 집 문이 드디어 열렸다. 이 상황을 놓칠 그녀가 아니었다.

들어가서 먼저 반반한 얼굴이 엉망이 되도록 몇 대 후려칠 생각이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지금의 분이 풀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줌마라니.

지난 8년이 편했던 모양이다. 자신의 앞에서 눈 한번 맞출 줄 모르고 늘 바닥만 보며 살던 아이가 기어오르는 것이 영 마뜩잖았다.


“누군지 모르지만, 비켜…….”

“누군지, 모르십니까?”

여태껏 등만 보여 주었던 남자가 승희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조금은 어두운 오피스텔 복도 아래에서도 훤하게 빛나는 인물이었다.

이 얼굴을 어디서 봤더라.

승희의 날카로운 눈빛이 눈앞의 남자를 향했다. 하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남자 연예인 누구를 데려다 놔도 기죽지 않을 만큼 잘생기고 건장해 보이는 남자는 웃었다.

승희의 매서운 눈초리가 가소롭다는 듯이.

기분이 상한 승희가 비슷한 것들끼리 논다며 한마디 하려던 때였다.


“하긴. 이사장님을 만나 뵌 적은 없죠, 제가.”

승희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번지는 것을 애써 부정했다.


“……나를 알아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남자는 싱긋이 웃으며 마치 재인의 집 문 앞을 지키듯이 섰다.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표정이 자연스러워서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렇게나 저를 팔고 다니신다던데.”

“그게 무슨…….”

남자가 자신과 지승희의 사이에 끼어들어 서려는 최 비서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내리뜬 시선은 여전히 승희를 향한 채였다.


“내가, 이사장님 사위라고.”

“…….”

“내가.”

기가 찬다는 듯 웃는 남자의 존재를 알아챈 승희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탁한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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