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매일 눈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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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매일 눈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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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매일 눈뜨면
2022.12.06.
와장창,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유리네 집에서 요리와 청소를 맡아 하는 과천댁이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떡해요, 어떡해요, 이사장님.”
“유리야, 문 열어 봐. 응? 엄마한테 얘기해. 무슨 일이야, 응?”
지승희가 조심스럽게 잠긴 문을 두드렸지만, 딸아이의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끔찍한 소음은 잦아들지 않았다.
생일 파티를 마무리 짓고 샤워를 끝낸 것은 꽤 늦은 밤이었다. 지승희는 사색이 되어 저를 찾아온 과천댁을 따라 2층으로 향했다.
“머리며 옷, 스타킹까지 온통 엉망이 되어 오셨어요. 냄새를 맡아 보니 와인 같은데, 어디서 그렇게 뒤집어쓰고 오셨는지…….”
“……그래서요?”
“집에 들어오시자마자 장식장에 있던 술을 들고 방으로 올라가셔서 문을 잠그셨어요.”
“그걸 그냥 두고 봤단 말이야?”
“잡았는데, 밀치셔서…….”
과천댁이 유리에게 밀쳐져 어디에 부딪힌 모양인지 손바닥으로 팔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지승희는 안절부절못하는 과천댁에게 내려가 보라고 이르고는 딸아이의 화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이럴 때 한번 들여다보지도 않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지금이야 술에 취해 자니까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훈은 맨정신이더라도 무슨 소란이냐고 화를 낼지언정, 딸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조차 안 할 인물이었다.
“강태서, 강태서……!”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분노 가득한 외침 뒤에 또다시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강태서가 문제였나. 생일 파티가 다 끝나도록 나타나지 않은 예비 사위가 괘씸했다. 유리가 저 난리인 것을 보면 아마도 강태서에게 갔다가 뭔가 사달이 난 모양이다.
“유리야, 엄마한테 말해 봐. 응?”
한참을 초조하게 기다린 끝에야 이윽고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방 안이 난장판이었다. 책장과 장식장의 물건들이 모두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화병은 깨져 있고 테이블은 나동그라져 있었다.
“유리야…….”
아이라인이 다 번져 눈 밑으로 시커멓게 흘러내린 딸아이의 몰골이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심지어 와인에 전 드레스와 머리카락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무슨 일이야. 응?”
“엄마…….”
끔찍한 꼴을 한 채 술 냄새를 풍기는 유리는 반쯤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보였다. 화가 덜 풀렸는지 씩씩거리는 모양새가 이대로 두면 무슨 일을 저지를 듯싶었다.
“일단 씻자. 화병은 또 왜 깼어, 위험하게. 과천댁! 올라와서 여기 좀 치워요!”
지승희가 유리를 조심스럽게 2층의 욕실로 이끌며 계단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세상 곱던 딸의 자태는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와인에 흠뻑 젖은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머리핀의 진주 장식은 오간 데 없었고, 몸에 딱 붙는 드레스의 아랫단은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귀걸이도 한쪽은 사라졌고, 단정하게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은 죄다 헝클어졌다.
“태서 군 때문이니……?”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뚜껑이 덮인 변기 위에 앉은 유리를 내려다보며 승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을 때였다.
코랄빛 립스틱이 번진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던 딸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이내 콧방울이 씰룩대더니 야차 같은 얼굴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흐, 엄마아…….”
“그래, 그래.”
승희가 잠시 고민하다가 유리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마음에 드는 나이트가운이 엉망이 되겠지만, 지금은 딸을 달래 주고 자초지종을 들어야 할 때였다.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내뱉던 유리의 울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때, 승희는 티슈를 뽑아 들고 유리의 뺨과 눈가를 닦아 주었다.
“좀 진정됐어?”
“…….”
“무슨 일이었는지 말해 봐.”
자존심이 상한 듯, 유리는 한동안 입을 꾹 다문 채 욕실 바닥만 노려보았다.
“유리야, 응?”
“……윤재인.”
또다시 딸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에 승희의 미간이 굳었다.
“걔는 또 왜…….”
“윤재인이! 그 더러운 게!”
승희는 인내심을 쥐어짜서 유리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 더러운 게 태서 씨 꼬셨나 봐. 엄마, 나 싫어. 다른 건 다 참아도 윤재인한테는 강태서 못 줘. 내 거잖아. 나 태어나기도 전부터 강태서 내 거였다고 그랬잖아.”
“……너, 그게, 그게 무슨 말이야.”
“강태서가 윤재인 편을 들었어. 엄마, 그년이 보고 있는데 강태서가 나한테 와인을 쏟아부었단 말이야! 그래 놓고는 내 앞에서 윤재인이랑 손잡고 사라졌어. 엄마! 왜 윤재인이야? 왜 윤재인이냐고!”
울부짖다가 분을 못 이겨 욕실 물건을 집어 던지는 딸을 보는 승희의 시야가 흔들렸다.
“확실해? 태서 군이 윤재인을 만난다는 거, 너 그거 확실한 거야?”
“내가 지금 헛소리하는 거로 보여?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왔단 말이야! 그게 내 남자랑 붙어먹는 게 틀림없어!”
“……유리야.”
“강태서가 그냥 여자 연예인 몇 번 만나고 그러는 거라면 참고 넘어가려고 했어. 엄마 말처럼, 잘난 남자는 그럴 수도 있다고, 어차피 결혼은 나랑 할 거니까 결혼 전에 잠깐 노는 거 정도는 이해하려고 했다고!”
“…….”
“그런데 윤재인이잖아! 내가 걔 싫다고 그랬잖아! 약속했잖아! 걔 미국에서 숨만 겨우 쉬면서 살게 해 준다고 그랬잖아!”
유리의 악다구니에 이어진 통곡에 승희의 숨이 거칠어졌다. 입술을 짓씹는 그녀의 시선이 꽉 닫힌 욕실 문 밖을 향했다. 이 사달이 났는데도 술에 취해 잠만 자는 남편이 미웠다.
“일단 씻고 나와. 알겠지?”
“엄마, 윤재인은!”
“엄마가 알아볼게. 그러니까 오늘은 씻고 자. 술 마시지 말고.”
딸아이를 샤워 부스로 밀어 넣은 승희가 욕실 밖으로 나왔다. 고민 끝에 핸드폰을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유리를 저 꼴로 만든 강태서를 불러 야단치고 싶었다. 하지만 대단하신 강선 그룹의 장남에게 그럴 수는 없다. 얘기 좀 하게 집으로 오라고 한들, 콧대 높은 젊은이가 올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서 승희는 그것보다 훨씬 더 쉬운 방법을 택했다.
“김 실장님, 예전 그 일. 회장님이 아시게 되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면.”
오래전에 묻어 두고 살았던 기억을 더듬는 승희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하셔야 할 거예요.”
남편이 수족처럼 부리는 김 실장에게 전화 건 승희의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윤재인. 윤세나 딸, 그 아이.”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워지는 두 모녀를 떠올린 승희가 알이 굵은 반지를 낀 손을 주먹 쥐었다.
“지금 어디에 있어요?”
핸드폰 너머로 침묵하는 김 실장의 고집이 우스웠다. 김 실장의 비밀을 알고 있는 승희는 남편이 김 실장을 가리켜 충성스러운 개라고 할 때마다 속으로 비웃곤 했다.
그 개가 주인 모르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면서.
더는 남편에게만 맡겨 놓을 일이 아니었다. 김 실장의 대답을 기다리며 걸음을 옮기던 승희는 오래전, 재인이 머물던 계단 아래 창고의 문을 노려보았다.
* * *
“네, 윤재인이에요.”
나갈 준비를 마치고 장 봐야 할 목록을 핸드폰에 적어 내려가던 중이었다. 재인이 화면에 뜬 태서의 이름 세 글자를 확인하고 초록색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받고 보니 너무 급하게 받았나 싶다. 기다렸던 게 티가 날까 싶었지만, 기다렸던 것이 사실이므로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다.
―잘 잤어요?
들려오는 목소리가 좋아서 절로 눈이 감겼다. 지금 깬 건 아닌지, 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네. 그런데,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태서 씨는 잘 잤어요?”
피곤하다고 해서 오후는 되어야 연락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겨우 10시가 넘었을 뿐이다.
어젯밤의 통화는 길게 이어졌다. 핸드폰을 든 채 양치질했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다 서로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풀어졌고,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누고도 머뭇거리는 남자가 쉴 수 있도록 재인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마지막으로 시계를 확인했을 때는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그러니 출장 일정과 시차로 인한 피곤을 풀기에는 수면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을 것이다.
―어제는 소풍 가기 전날 밤 아이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재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설레서 잠이 안 오더라고.
솔직한 고백에 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잠도 일찍 깨고.
태서의 대답을 곱씹으며 미소 짓던 재인이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왜, ‘이렇지 않을까?’예요? 어릴 때 소풍 앞두고 설렌 적 없어요?”
―아. 소풍을 가 본 적이 없어서.
“어, 학교에서 소풍 안 가 봤어요? 태서 씨 다니던 학교에서는 체험 학습이나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그가 다녔을 명문 사립 초등학교의 커리큘럼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 재인은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소풍 한 번 안 가는 학교가 어디에 있을까.
―있었는데, 가 본 적은 없네요.
하긴, 워낙 대단한 집 아들이니 안전을 생각해서 여러모로 제약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에코백 밖으로 튀어나온 마들렌 틀의 모서리를 매만졌다.
“지금은 좀 춥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우리 소풍 가요.”
재인은 뒤늦게 제가 태서에게 미래의 약속을 내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다가올 봄날에도 함께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들켰을까. 사실, 재인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속마음이었다.
뭐라고 말을 덧붙여야 덜 민망해지려나. 재인의 고민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웃음소리에 잊혔다.
―이제부터 매일 눈뜨면 날씨부터 확인할 겁니다. 따뜻해진다는 말의 정확한 기준을 정해 봐요.
“……꽃이 피면요.”
―아, 꽃.
“아직은 춥구요. 봄이 오려면 멀었어요.”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게요.
재인은 지금 이 순간, 답지 않게 얌전히 대답하는 남자와 마주 서고 싶었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어떤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지 궁금했다.
―그건 그렇고, 우리 몇 시에 볼 수 있습니까?
“아, 지금 막 마들렌 재료 사러 가려고 그랬어요. 재료 사서 오면…….”
―그냥 내가 지금 집 앞으로 갈게요. 장은 같이 봅시다.
“음…….”
―재인 씨 집에 안 들어갈게요.
눈치 빠른 남자의 대답에 재인이 웃었다.
―사실, 이미 출발했습니다.
“네? 벌써요?”
―음, 더 솔직히 말하자면 다 와 갑니다. 유턴하려고 신호 기다리는 중이에요.
정륜동에서 재인이 사는 오피스텔에 오려면 오피스텔 앞 큰 사거리에서 유턴해야 했다.
바로 집 근처에 와 있다는 말에 당황스럽기보다는 반가움이 컸다. 재인이 번지는 미소에 뺨을 꾹꾹 누르며 일어섰다.
“준비해서 내려갈게요.”
―서두르지 말아요. 말도 안 하고 설레발치며 온 건 납니다. 얼마든지 기다릴 테니 천천히 내려와요.
“네.”
―그런데 9층 몇 홉니까.
“904호예요. 혹시 올라오려고요?”
―올라가면, 내쫓을 겁니까?
“네.”
―선물을 내밀어도?
“음…….”
재인이 차오른 기대감을 애써 누르며 말을 골랐다. 사실 선물이 있건 없건, 문 앞에 그가 있다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말은 차마 못 하겠다.
“선물이 뭔지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흠, 그러면…….
“태서 씨?”
태서의 목소리에 노이즈가 섞이더니 더는 들리지 않았다. 통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한 재인이 마들렌 틀이 담긴 에코백 안에 다른 베이킹 도구를 담았다.
재인은 오피스텔 지하에 있는 꽤 넓은 주차장에서 전화가 잘 안 터진다던 상화의 투덜거림을 기억했다. 아마도 남자는 지하 주차장에 들어선 모양이었다.
어차피 나갈 준비는 다 마쳤으니, 그를 기다리게 할 필요는 없었다. 나가기 전, 거울을 보며 마지막으로 옷차림을 살피던 재인이 갑자기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다린다더니, 이렇게 빨리 올라왔다고?”
조금 전에 서두르지 말라고, 천천히 준비하라던 남자는 어디 갔는지. 재인은 태서의 설레발이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입꼬리는 아름다운 곡선을 그린 채였다.
재인이 문 앞에 서 있을 근사한 남자를 떠올리며 인터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
하지만 화면에 보이는 건 태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에 어려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