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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깊은 밤이 다정하게 (45/123)


#45. 깊은 밤이 다정하게
2022.12.02.


아트 센터가 문을 닫은 시각, 별관 뒤쪽의 정원은 고요했다. 오렌지 빛깔의 조명이 내려앉은 사이로 곱게 놓인 디딤돌을 따라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뺨,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뜨겁던데.”

“그건…….”

“아.”

뺨을 맞아서 뜨거운 것이라기보다는 태서와의 짙은 키스로 인해 열이 오른 탓이 더 컸다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재인의 속내를 알아챈 태서가 시선을 내리며 웃었다.


“춥진 않습니까?”

“태서 씨는요?”

“음…….”

겨울치고는 따뜻한 밤이었다. 가만히 서서 재인을 바라보던 남자가 싱긋 웃었다.


“아까 가려던 온실, 바로 저쪽인데 가 볼래요? 와인은 없지만 구경하기에는 괜찮을 겁니다. 강선 아트 센터 관장님이 온실 꾸미는 데 공을 많이 들이셨다고 하더라구요.”

“그분과 관계가 어떻게 되는데요?”

“조모님이죠.”

“아…….”

외국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유리온실이 저 멀리 부드럽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작고 예쁜 성처럼 보이는 그곳을 바라보던 재인이 고개 저었다.


“왜요.”

“그냥요. 지금은 찬 바람이 반갑네요. 조금, 더운 것도 같고.”

대답하는 재인이 태서의 눈을 피했다. 유리에게 맞지 않은 뺨에 손등을 대며 열을 식히려는 그녀를 바라보던 태서가 웃음을 흘렸다.

본관 메인 아트 센터 안쪽의 사무실에서 나오니 이미 아트 센터 본관과 별관의 조명은 모두 꺼진 후였다. 관람객도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키스를 한 것인지.

넘쳐 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욕심껏 탐했다. 장소도 잊은 채 몰아치는 감각에만 매달렸다. 불씨를 삼킨 것만 같았다.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고, 신경이 불티처럼 탁탁 튀었다. 절절 끓어오르는 피가 태서의 온몸 구석구석까지 빠르게 내달렸다.

어느새 들불처럼 번져 태서를 아예 집어삼키려 한 것. 그것은 뜨겁고도 낯선 욕망이었다.


“후…….”

 
처음 마주한 욕망에 취한 태서는 숨이 부족한 사람처럼 재인의 체향을 달게 들이켰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사이 제 두툼한 가슴팍에 닿은 작은 손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밀어내려는 듯한 힘에 끄떡도 하지 않은 태서가 정신을 차린 것은 잠시 뒤였다. 책상 위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란도 눈치채지 못했던 남자가, 우습게도 재인이 작게 흘린 탄식에 멈칫한 것이다.


“힘들, 힘들어요…….”

 
쌕쌕거리며 내뱉은 재인의 말에 태서가 물고 있던 그녀의 아랫입술을 놓아주며 눈을 떴다. 그제야 제가 재인을 책상 위에 눕혔음을 깨달았다.


“아…….”

 

 
그의 팔에 안긴 채 책상 위에 누운 재인은 숨을 크게 헐떡이고 있었다. 어느새 새까만 머리칼은 풀어져 키보드를 가로지르며 넓게 펼쳐져 있었다.

새까맣게 젖은 눈동자, 탐스럽게 달아오른 뺨, 발긋하게 물든 귀, 감빨아 부풀어 오른 붉은 입술.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은 태서의 턱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여린 몸에서 풍기는 짙어진 체향이 달아서 침이 고였다.


“하…….”


“…….”


“……미안합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하마터면 누군가의 책상에서 일을 저지를 뻔했다. 재인을 일으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 주던 태서는 립스틱이 다 지워진 재인의 젖은 입술에 또다시 홀랑 시선을 빼앗겼다.

그래서 몇 번 더, 입술을 훔쳐 버렸다. 자꾸만 이어지는 짧은 입맞춤 끝에 또다시 키스가 깊어질 무렵, 태서는 재인이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함께 웃고 말았다.

그길로 재인을 이끌고 정원으로 나온 참이었다. 그러니 격정으로 치달으려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건 태서뿐만이 아닐 것이다.

유리온실과 반대편에 있는 조형물에 시선을 두고 있는 재인의 뺨과 귀가 아직도 붉었다. 태서가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재인의 보드라워 보이는 귓가에 속삭였다.


“저기 가면 허튼짓할까 봐 그럽니까?”

여전히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런 모양이다. 태서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재인의 손을 잡고 온실 쪽으로 이어지지 않은 길로 이끌었다.


“밖에서는 못 할 줄 아나.”

“……네?”

“아무도 없는데, 뭐 어때서요.”

“…….”

“누가 좀 보면 어떻고.”

대답하지 않는 재인을 바라보던 태서가 한쪽 눈썹을 들었다.


“나 좀 보죠.”

“그냥, 걸어요.”

“나만 좋았나.”

태서의 투덜거림에 꾹,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던 재인의 뺨이 조금씩 부풀어 오른다. 웃음을 참지 못하는 재인을 보는 태서의 입매도 아름답게 호선을 그렸다.

이렇게나 예쁜 사람과의 시간을 투덜거림으로 채울 생각은 없었다. 태서는 재인의 손을 잡아 조금 크게 흔들었다.


“배고프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저녁을 먹지 않았다. 태서는 제가 배고픈 것도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재인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어느덧 밤 열 시가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배고파요.”

“그러면.”

재인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술을 묻은 태서의 시선이 올곧게 재인을 향했다. 마주한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서 지그시 입술을 말아 무는 그녀가 앙큼하기 그지없었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갑시다.”

태서의 제안에 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달빛이 포근한 밤이었다.

* * *

태서가 재인을 이끌고 간 곳은 작고 오래된 식당이었다. 장 실장이 해장을 위해 자주 찾는다던 곳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쑥갓을 잔뜩 얹어 내는 가락국수 전문점이었다.

깊고도 진한 국물을 맛본 재인은 자연스럽게 소주 한 병을 시켰고, 태서와 반병씩 천천히 나눠 마시며 겨울밤을 곱씹었다.

아삭아삭한 단무지가 담긴 접시 하나만을 가운데 두고 가락국수를 먹었다. 서로의 잔을 채우는 동안 불편함은 없었다. 시끌벅적하지만 운치 있는 공간에서 서로에 대해 알아 가는 시간이 마냥 즐거웠다.

태서는 묘한 매력의 푸른색 대형 SUV의 핸들을 대리운전 기사에게 내어 주었다. 뒷좌석에 함께 앉아 집으로 오는 동안, 재인의 손은 내내 태서에게 잡혀 있었다.


―들어갔습니까.

“네.”

―몇 층이라고 했죠.

“9층요.”

재인이 조금 전까지 태서의 손에 잡혀 있었던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하도 꽉 잡은 탓에 아직도 지잉지잉, 저릿한 느낌이었다. 손을 씻는 동안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가 폈지만 여전히 그의 온기가 맴도는 기분이었다.

그가 뇌물이라고 건넨 조명등을 꺼내어 침대 옆 탁자에 올려 두었다. 마침 작은 전등을 하나 더 살까 고민하던 차였다.

탁, 조명등의 스위치를 켜고 침실 불을 끄고 돌아서니 따스하게 빛나는 조명 덕에 침실 전체가 포근해 보였다.


“고마워요.”

―음?

“뇌물요. 마음에 들었어요. 뒤늦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 같아요.”

―다행이네.

태서는 지금처럼 은근슬쩍 말을 놓는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무례하다기보다는 이상하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피곤하죠? 비행도 오래 했고……. 집에 가면 바로 뻗겠어요. 내일 일요일이지만, 혹시 출근…….”

―다시 내려와요.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아트 센터로 향했을 태서를 떠올리고 혹시 내일 출근하는 건 아닌지 물으려던 때였다. 재인은 갑자기 다시 내려오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왜요?”

―보고 싶으니까.

“…….”

―내가 올라가면, 얌전히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어떻게든 윤재인 씨 집에 들어가려고 수작 부릴 것 같아서.

남자가 솔직하게 털어놓는 시커먼 속내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웃을 때가 아닌데. 나는 심각합니다.

“설마 아직 안 갔어요?”

―미련이 남아서 올려다보는 중입니다. 창밖으로 나, 보입니까?

재인이 커튼을 닫아 둔 창문 앞에 선 채 웃었다. 커튼을 쥔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안 볼래요.”

―냉정하네.

“보면, 차 한잔 마시러 올라오라고 할 것 같아서요.”

―…….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그의 한숨 소리가, 그리고 한숨 끝에 내뱉은 나른한 웃음소리가 고막을 간질였다.


―그래요. 오늘은 여기까지가 맞는 것 같습니다. 아, 잠금장치는 충분히 달았습니까?

“잠금장치 세 개나 달았어요.”

―두 개 더 답시다. 어떤 늑대가 문 열어 달라고 꼬실 수도 있으니.

재인이 다시금 웃음을 터뜨리며 거실로 나왔다. 의자에 앉아 식탁 위로 엎드려 차가운 표면에 뜨끈한 뺨을 댔다.


“들어가세요.”

―집에 가면, 아마 뻗어 잘 것 같습니다. 내일 오후는 되어야 일어날 듯한데.

아마도 저처럼 긴장이 풀려 잊고 있던 피곤함이 쏟아진 탓이리라.

그런데, 이 남자도 긴장하기는 할까.

무드등 옆에 놓여 있던 산타 복장을 한 작은 곰 인형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자 아까 그가 가져간 엘프 복장의 곰 인형이 떠올랐다. 그제야 둘이 커플 아이템을 나눠 가지게 된 것임을 깨달았다.

유치한데, 유치해서 좋았다. 서른 넘어 시작한 연애가 성숙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재인에게는 첫 연애였다. 그것도 수많은 고민 끝에 시작하게 된 연애였다.

연애.

저도 모르게 그 단어를 떠올린 재인의 뺨이 다시 불긋하게 물들었다. 저와는 영영 상관없을 줄 알았던 단어였다.

헤어지기 전,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지 물으려던 재인에게 태서는 분명하게 속삭였다.


“이제, 우리는…….”


“연인.”

 
태서가 눈가를 나긋하게 접어 웃으며 힘주어 말한 단어에 재인이 간지럽게 느껴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가 내린 관계의 정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표정 보니 무르고 싶은가 본데. 서운하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하고픈 얘기가 있을 겁니다. 그런 건 다 내일로 미루죠. 오늘은 다른 거 하지 말고 윤재인은 강태서만, 강태서는 윤재인만 생각하다가 잠들기로 해요.”

 
달콤한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헤어져 집에 들어오자마자 태서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푹 쉬세요.”

―내일…….

“내일, 그림 보러 갈게요.”

언제 만나면 좋을지를 가늠하는 남자에게, 재인은 눈을 꾹 감고 속삭였다.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

“……싫어요?”

―아니. 너무 좋아서.

이어진 즉답이 귀엽게 느껴져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뇌물이 정말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네. 아주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쏙 들어서.”

열린 침실 문 너머로 여전히 은은한 빛을 내는 조명등을 살핀 재인이 허리를 곧게 폈다.


“상을 주고 싶을 정도예요.”

―상이라면……. 나, 기대되는데.

“내일,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레몬 마들렌을 구워 줄게요.”

수화기 너머가 침묵에 잠기자 재인이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뭔가 다른 것을 기대한 것일까. 멋쩍어지려는데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들떠 있었다.


―……분명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레몬 마들렌이라고 했습니다.

“네. 저번에 구워 달라면서요. 집에 오븐은 있어요? 마들렌 틀은 나한테 있는데.”

핸드폰을 타고 하아, 하고 낮게 흐르는 탄식이 야릇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또다시 아까의 키스가 떠올랐다.

아트 센터에서, 재인은 장소도 잊은 채 태서가 주는 감각에만 매달렸다. 첫 키스를 했던 곳과 같은 장소였지만, 처음과는 달랐다. 처음보다 진득했고 처음보다 깊었다.

어지러움에 붙잡을 곳이라고는 오직 강태서뿐이었다. 밀려오는 그를 받아들이다가 나중에는 그의 옷을 말아 쥐고 가까이 잡아당겼다. 더 닿지 못해 안달했던 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 느껴 보는 선명한 욕망이 버겁고 두려운 가운데 궁금했다. 온몸이 긴장으로 굳지만 않았다면, 그가 이끄는 불길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좋았다. 정신을 못 차릴 만큼.

문득 더위를 느낀 재인이 고개 저었다. 떠오른 생각을 털어 내려 내일 사야 할 것들을 살피려던 때였다.


―재인.

낮게 울리는 부름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의 목소리는, 특히 지금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은 언제 들어도 좋았다.


“네.”

그의 목소리가 가져다준 여운을 만끽하느라 뒤늦게 대답한 재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어제와 같은 세상인데 달리 보인다.

커튼 틈새로 어룽지는 도시의 불빛은 조금 더 상냥해 보이고, 새 무드등 때문인지 집 안은 조금 더 따스해 보였다.


―지금이라도, 다시 나올래요?

재인이 쿡쿡,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깊은 밤이 다정하게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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