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해선 안 될 짓
(44/123)
44. 해선 안 될 짓
(44/123)
#44. 해선 안 될 짓
2022.11.29.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 네가 뭔데, 네까짓 게 뭐라고! 고작 너 따위가 나한테…….”
혐오 섞인 분노를 쏟아 내던 유리의 입이 꽉 다물렸다. 그녀의 정수리 위로 떨어져 새하얀 오프숄더 원피스를 붉게 물들이고 발끝까지 흘러내리는 것은 피처럼 검붉은 와인이었다.
재인은 그제야 유리의 뒤에 선 남자를 보았다. 우아한 자세로 병을 기울이는 태서는 마치 와인을 디캔팅하는 듯 능숙했다.
가느다란 벨벳 줄기가 유리의 머리 위로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쏟아졌다.
“당신한테는 김빠진 맥주도 아깝지만. 마침 들고 있던 게 이거라.”
국내에 단 두 병 남아 있다던 최상급 빈티지의 로마네 콩티였다. 순식간에 그 깊고도 풍부한 향이 아트 센터 구석구석 퍼졌다.
“주제 파악 못 하고 소란 떠는 게 누군데. 고작 조유리 주제에 누구를 때려. 감히.”
태서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느긋하게 쏟아부으며 유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고는 얼빠진 채 근처에 서 있던 직원에게 빈 병을 건넸다.
조금 전까지 살기등등하던 눈빛에 순식간에 부드러움이 섞인다. 태서가 손을 내민 곳은 호흡 곤란을 일으킬 듯 창백해진 유리의 팔꿈치 너머였다.
“이리 와요.”
제 옆으로 뻗어 나온 남자의 손을, 유리가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리고 재인 역시 저를 향해 내민 그 커다랗고도 유려한 손을 바라보았다.
까딱, 재촉하듯 손이 움직였다.
재인의 시선이 그의 기름한 손가락 끝에서 길고도 다부진 팔로, 다시 팔을 지나 강인해 보이는 어깨를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남자의 따스한 눈빛을 마주했다.
“와요. 나한테.”
태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재인은 홀린 듯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에게 이끌려 커다란 홀을 가로질렀다.
* * *
“아…….”
뺨에 차가운 것이 닿았을 때서야 정신이 들었다.
갤러리 안쪽의 사무실로 여겨지는 공간이었다. 태서는 재인을 널따란 책상 위에 앉혀 두고 그녀의 뺨에 젖은 손수건을 가만히 댔다.
“왜 맞고만 있습니까. 그럴 성격 아니잖아요.”
“때리려고 했는데 강태서 씨가 선수 쳤잖아요.”
“미안합니다. 사실, 때리지 않았으면 했어요.”
“왜요. 약혼녀에게 와인은 쏟아부었어도, 맞는 건 못 보겠어요?”
재인이 새초롬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느라 태서의 입꼬리가 씰룩인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럴 리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웃은 남자가 재인의 뺨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조심스러운 손길과 꼼꼼히 살피는 눈빛에 속상함이 묻어났다.
“겨우 그딴 거 때리느라 윤재인 씨 손바닥도 아플 거거든.”
“…….”
“기다려요. 조유리가 재인 씨 찾아와 스스로 자기 뺨 때리며 빌게 만들어 줄 테니.”
“왜 그렇게.”
재인의 입술 새로 쏟아진 말이 탄식하듯 흩어졌다. 태서는 그저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뺨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에게 다정해요.”
“마음에 안 듭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태서로서는 다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페에서 마주쳤던 날 이후, 줄곧 재인이 다가와 주기만을 기다리던 그였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그녀가 나타날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었다.
어쩌면 거절할 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다 그가 내민 손을 직접 잡아 주기까지 했으니.
태서는 그 사실이 못 견디게 기꺼웠다.
마침내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눈치챈 그가 눈썹을 찡그렸다.
“……잠깐 여기 있어요.”
재인은 남자가 혀를 차듯 내뱉은 욕설을 겨우 알아들었다. 조금 전까지 나긋하기만 하던 남자의 목소리에 또다시 분노가 실려 있었다.
“어디 가는데요.”
“아까는 이렇게까지 부은 줄 몰랐는데, 안 되겠습니다. 가서…….”
“할 말이 있어요.”
당장이라도 조유리를 찾아가 두 동강을 낼 듯 몸을 돌리는 남자를 재인이 가까스로 붙잡아 세웠다.
제 옷 소매 끝을 그러쥔 작고 하얀 손을 바라보던 태서가 다시 그녀를 향해 섰다.
“얘기해요.”
“……강태서 씨, 능력 있는 남자죠?”
“어떻게 보입니까.”
자신감 넘치는 얼굴에 조금은 거만한 미소가 번졌다. 어마어마한 재력이나 뛰어난 업무 능력을 차치하고서라도, 강태서는 넘치도록 매력적인 남자였다.
역시, 재인은 그를 향하는 욕심을 억누르고 싶지 않았다. 솔직하기로 마음먹은 것 역시 따지고 보면, 그가 탐나서였다. 탐나는 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지금 나를 향하는 그 관심이 줄어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조심스럽게 건넨 질문에 태서는 한쪽 눈을 찡그리듯 웃으며 재인을 응시했다. 역시, 무리인 걸까. 충분히 이기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질문을 던진 재인은 남자의 침묵이 길게만 느껴졌다.
“나는.”
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서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금 당신이 살인을 저질렀대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거니 여길 것 같은데.”
“……장난하는 게 아니에요.”
“뭐가 문젭니까. 빚이 많습니까? 쫓기고 있어요? 협박당하고 있습니까? 다 내가 해결 가능한데.”
빙글거리며 여유롭게 답하는 남자의 시선에 사로잡혀 있던 재인이 이윽고 눈을 감았다. 한숨 쉬듯 털어놓은 것은 평생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사실이었다.
“현양 건설 조대훈 회장, 그 사람이 내 친부예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태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 약혼자인 조유리의 이복 언니라구요. 내가.”
“아.”
태서가 잘 빠진 눈썹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가 없었다.
윤재인에 관해서는 이미 발 사이즈까지 알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정체를 숨기고 접근했던 그녀가 이렇게나 빠르게 자신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태서는 재인이 조부 간의 약속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음을 알아챘다. 즉, 재인은 강태서의 진짜 약혼녀가 조유리가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얘기를 왜 하는 겁니까? 굳이.”
“……말해야 할 것 같았어요.”
지그시 입술을 물고 눈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재인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 목적을 위해 아무런 상관 없는 사람을 이용하는 게,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어요.”
역시, 윤재인은 너무 착하다. 욕심을 부릴 줄 모른다. 태서는 그런 윤재인에게 욕심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태서의 눈빛이 진득하게 가라앉았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지만. 미안해요. 이제라도 말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강태서 씨를 속이고 싶지 않아요. 당신에게 피해 주고 싶지 않아요.”
태서가 들고 있던 젖은 손수건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다고 조잘거리며 속내를 고백하는 재인의 붉은 입술을 그대로 빨아 삼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죠.”
“태서 씨, 생각보다 좋은 사람 같아서요. 그러니까,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나에게 휩쓸리지 마세요. 우리는 여기까지…….”
“아니.”
태서가 단호한 태도로 재인의 말을 잘라 냈다. 재인이 의도를 가지고 다가온 것을 알면서도 반겼던 그였다. 그러니 모든 것을 털어놓은 여자를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여기까지가 아니라, 여기서부터.”
“……무슨 말이에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윤재인이 강태서에게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은 때부터. 윤재인이 강태서를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라고 여긴 때부터.”
재인의 고개가 기울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운 얼굴을 옅게 찌푸렸다. 태서는 곱게 실선이 간 미간에 입 맞추는 상상을 했다. 그의 입꼬리가 야릇하게 휘었다.
“재인 씨가 원래 하려던 대로 해요. 그게 뭐든 나는 따를 테니.”
“……강태서 씨. 나랑 엮이면 약혼녀의 언니랑 엮이게 되는 거라구요.”
“아하……?”
“아하라뇨. 그렇게 느긋하게 반응할 일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강태서 씨를 어떻게 보겠어요.”
“느긋하다니. 내가 막장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되게 생겼는데.”
남자의 태연한 반응에 재인이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흥분한 거 모르겠습니까.”
“저기요.”
“원래 하지 말라는 짓이 제일 재미있는 법이죠. 어릴 때 어른들 몰래 그런 짓 한번 안 해 봤어요?”
“이건 그런 수준의 얘기가 아니잖아요.”
재인의 타박에 태서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어느새 재인의 무릎이 태서의 허벅지 근처에 닿아 있었다. 무릎을 통해 느껴지는 남자의 탄탄한 몸을 모르는 척하는 그녀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런 수준이 아니니 내가 더 흥분하는 겁니다.”
“자꾸 장난칠 거면…….”
“장난 아닌데. 그리고 덧붙이자면 나는 몰래 할 생각은 없습니다.”
“네?”
“이렇게 된 거, 우리 제대로 연애하죠. 사람들이 다 알게. 요란하게. 세상이 다 들썩거리게.”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재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조유리 따위, 내가 알 게 뭡니까. 그 여자, 딱 두 번 봤다고 얘기 안 했나.”
“……두 번을 봤든, 한 번을 봤든, 약혼한 건 맞잖아요.”
“글쎄……. 내가 기저귀 뗄 무렵 할아버지들끼리 손주 손녀 결혼을 약속하기는 했다는데.”
조금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는 남자가 여운을 두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약혼녀의 언니랑 연애한다니, 해선 안 될 짓이에요. 우리를 두고 말이 많을 거예요. 나는 상관없지만 태서 씨는…….”
“상관없으면 나랑 합시다. 그, 해선 안 될 짓.”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속삭이며 재인의 부푼 뺨 가까이 얼굴을 기울였다. 재인은 갑자기 공기 중의 산소가 부족한 것 같았다. 숨이 콱, 틀어막혀 겨우 내뱉은 숨이 가늘었다.
“그리고 이미 윤재인이 주는 달콤함을 알아 버렸는데.”
태서가 재인의 뺨을 간지럽히듯 문질렀다. 빨갛게 부어오른 뺨에 어린 열기를 어루만지듯 감쌌다.
통증과 함께 느껴지는 간지러움에 재인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러자 그의 뜨거운 시선이 달아오른 뺨에서 탐스러운 입술로 옮겨 갔다.
“고작, 조유리나 조대훈 따위 때문에.”
“그 둘뿐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해 떠들어 댈 세상 사람들 시선도…….”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재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느새 자신의 입술을 덧그리고 있는 남자의 눈빛이 지독하게 야했다.
“나보고 당신의 접근을 경계하고 의심하라고.”
“…….”
“지금, 경고하는 겁니까? 친절하게도?”
“……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우리가 선을 넘기 전에……. 내가 강태서 씨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경고예요.”
“친절하네, 당신.”
작게 속삭인 그의 반듯한 입술이 천천히 휘었다. 재인은 눈을 내리뜨고 제게 다가오는 남자의 입술을 응시한 채 숨만 겨우 몰아쉬었다.
남자는 여태껏 건넸던 유혹이 다 예고편이었다는 것처럼 날것의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짙어지는 그의 체향이 긴장한 재인을 달래듯 감쌌다.
“그런데 어쩌지. 당신의 친절이 날 더 흥분시켰는데.”
“…….”
“이게 마지막이라니, 이것만 무시하면 선 넘을 수 있다는 거잖아.”
“그건…….”
“윤재인이 나랑 엮인다잖아.”
쿵, 쿵, 쿵. 맥동하는 심장 박동에 또다시 아득해졌다. 이러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나는 지독하리만큼 속속들이 엮이고 싶거든요. 윤재인 씨랑.”
아까 재인이 뱉은 말이었다. 약혼녀의 언니랑 엮이게 되는 것이라고. 그 ‘엮인다’는 말이 이렇게나 야하게 들릴 말이었나.
“손가락, 발가락까지 모두.”
귓가를 간질이는 은밀한 속삭임에 입술을 물었다. 그의 입술이 귓가에서 뺨을 스치며 입술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 재인은 그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리는 것을 눈에 담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 남김없이.”
마침내 고개를 기울인 태서의 코끝이 재인의 코끝을 스쳤을 때. 재인은 열기가 일렁이는 밤빛 눈동자와 마주해야 했다. 그녀는 책상 모서리를 잡고 있던 제 손이 하얘지도록 자신이 힘을 주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다.”
느리게 코끝을 비비며 재인의 체향을 들이켜던 그가 숨을 멈춘 순간. 찰나의 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지고, 이내 재인 역시 그를 따라 숨을 멈추었다.
벌어진 입술이 느릿하게 스미듯 닿아 온다. 숨이 뒤섞이고 서로의 향기에 휘감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감당하기 힘든 열기에 잠식되어 감은 눈앞에 그의 잔상이 어룽졌을 때.
“아…….”
속을 내보인 틈으로 그가 쏟아지듯 들이닥쳤다.
재인이 태서의 품 안에 무너져 내렸다. 어쩔 도리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