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 곁에 있어야 할 사람 (43/123)


#43. 곁에 있어야 할 사람
2022.11.25.



“태서 씨, 나는.”

미련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켰을까. 남자의 미소에 조금은 씁쓸함이 섞여 든다고 느꼈을 때, 그가 순식간에 씁쓸함을 지워 내고 정중하고도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우리, 그림 보러 왔습니다.”

“…….”

“얘기는 그림 다 본 다음에, 와인 마시면서 해요. 우리.”

이 남자와의 시간을 조금만 더 욕심내도 될까. 훗날 꿈처럼 여겨질 이 시간을 조금만 더 연장해도 될까. 답하지 못하고 선 재인이 태서의 손에 이끌렸다.

어느새 아트 센터 문이 열리고, 그를 알아본 직원이 다가왔다. 그의 몇 마디 말에 직원은 정원의 벤치로 향했다. 태서가 뇌물이라며 내밀었던 선물을 챙기러 가는 듯했다.


“부피가 있으니 맡겨 놨다가 찾아갑시다. 코트 이리 줘요.”

고개를 끄덕인 재인이 그의 도움을 받아 코트를 벗었다. 태서가 제 코트 역시 벗어 직원에게 맡긴 후 재인을 향해 팔 한쪽을 슬쩍 내밀었다.


“가죠, 그림 보러.”

그의 눈짓에 따라 재인이 태서의 팔에 제 팔을 걸쳤다. 따스한 공간으로 걸어 들어가는 선남선녀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뒤따랐다.


 

* * *



“이사장님을 누가 환갑이라고 보겠어요. 유리 양 언니라고 해도 믿겠는데.”

“그러게요. 비결이 뭐예요. 숍 어디 다녀요?”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생일 파티가 이어지고 있었다. 지승희가 제게 축하의 말을 건네는 사람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런데 이 기쁜 자리에 예비 사위가 안 보이네요. 태서 군이 바쁜가 봐요?”

“아무리 바빠도 예비 장모님 환갑인데…….”

“어머, 바쁘면 그럴 수 있어요. 그래도 선물은 보내왔겠죠? 지 이사장, 어디 자랑 좀 해 봐요. 모두가 탐내는 사윗감 태서 군 안목 좀 구경합시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도 승희는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 자리에 저만 자식 결혼 앞둔 것도 아니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이해해 주세요.”

고상하게 거절 의사를 밝힌 승희가 현관에서 정원으로 들어서는 계단 쪽만 주시하고 있는 유리의 곁으로 다가갔다.


“또. 손톱.”

“아, 응.”

승희의 지적에 유리가 피가 나도록 한껏 물어뜯어 삐죽삐죽해진 손톱을 주먹 안으로 감췄다.


“언제쯤 온다고 했는데.”

“…….”

지승희가 목을 빼고 태서를 기다리는 것이 분명한 유리의 손을 잡았다. 차갑고 축축해진 딸의 손이 신경을 긁었는지 그녀가 혀를 찼다.

이럴 때 장인이 나서서 사위가 될 강태서를 좀 불러들이면 좋으련만. 대훈은 화미 아파트 조합원의 과반수 득표를 얻어 재건축 입찰을 따냈다는 승리감에 취해 있는 듯했다.

손님들과 술을 주고받으며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모양새가 평소보다 조금 들떠 보였다.

얼마 전, 아무래도 마음이 쓰여서 남편에게 윤재인에 관해 되물었다. 그때 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쓸데없는 거에 신경 쓸 시간에 딸아이 결혼 준비나 잘 시키라고 그랬다.


“누군들 신경 쓰고 싶어서 신경을 써요? 당신이 그 애 단속만 똑바로 하면 문제 될 게 없잖아요!”


“생각이 다 있어. 그러니 당신이나 유리나 소란 떨 것 없어.”


“설마, 정말 그 애가 한국에 들어온 거예요? 당신, 똑바로 말해요.”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상상에 남편을 붙들고 악다구니를 쓴 날이었다.

차가운 남편의 성정상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불안감을 누를 수는 없었다. 예전부터 지승희가 윤세나에게, 그리고 윤세나를 쏙 빼닮은 윤재인에게 가져 온 질투심과 열등감 때문이었다.


“혹시 그 애 한국에 들어오라고 한 게 당신이야? 왜, 엄마 닮아 인물 반반한 딸아이 뒤늦게라도 끼고 살려고? 볼 때마다 그 여자가 생각나서 못 견디겠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윤세나 죽었다고 했잖아!



“죽었으니 더 애틋하겠지! 그리고, 왜 말이 안 돼? 예전에도 당신, 그러려고 그 애 이 집에 머물게 했던 거잖아. 첫사랑 꼭 닮은 그 아이, 곁에 두고 지켜보려고. 아니야?”

 
그때 조대훈은 혀를 차더니 침묵으로 일관했다. 묵혀 둔 분노를 터뜨리며 소리 지르다가 제풀에 지치는 건 언제나 승희의 몫이었다.


“유리가 강태서 마음 휘어잡았으면 걱정할 것도 없는 일이야. 애가 뭘 어떻게 했기에, 만난 지가 언젠데도 결혼 얘기가 안 나와?”


“아니, 그러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우리 딸 유리는 누구랑 다르게 천박하지 않아서 남자 홀리고 다닐 줄을 모르는 건데, 그게 잘못이야?”

 
천박하게 남자 홀리고 다니다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던 윤재인을 두고 뱉은 말이었다. 그 말에 대훈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나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내가 나서게 하지 말아요.”


“당신이 나설 것 없다고 하지 않아. 생각이 있다는 말, 못 들었어?”


“우리 유리 눈에 피눈물 나는 꼴, 나는 못 봐.”


“유리가 아니라, 강태서 장모라고 소문내고 다닌 당신 체면 구기고 싶지 않은 거겠지.”


“나만 강선 그룹 사돈 자리 탐냈어요? 당신은 아니었다고? 지켜볼 거예요. 나도 사람 쓸 줄 몰라서 가만히 있는 거 아니니까.”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애 결혼이나 준비해. 아직 사돈 맺을 집에 선물 한번 안 보냈다면서? 도대체 뭘 한 거야?”

 
어떻든 결혼을 성사시켜야 했다. 강선 그룹의 사돈 자리가 탐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승희는 조심스럽게 유리의 손등을 두드렸다.


“온다고 한 건 맞아? 유리야.”

“엄마까지 재촉하지 마.”

“재촉하는 게 아니라.”

조금 전까지는 친구들이 유리에게 강태서는 언제 오느냐고 계속해서 물어 왔다. 지금 그 누구보다도 그가 언제 오는지 궁금한 것은 유리 자신이었다.


“얘, 바쁜 사람이니 그럴 수 있어. 네가 참아야지.”

“어떻게, 뭘 그럴 수 있어? 어디까지 참아 줘야 해? 다른 날도 아니고 엄마 생신인데! 나 강태서 얼굴 딱 두 번 봤어, 엄마. 나, 그 남자랑 결혼하는 거 맞아?”

짜증을 참지 못한 유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생일을 맞이한 제 엄마만큼이나 곱게 차려입은 그녀였다.

크림빛 오프숄더 드레스는 몸에 딱 붙었고, 커다란 진주 액세서리가 귓불과 목에서 영롱하게 빛을 발했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칼에도 세트 머리핀을 꽂았는데, 울분을 참지 못한 탓에 작은 진주 장식이 잘게 흔들렸다.


“유리야. 조급하게 굴지 말고. 어차피 네 남자 될 사람이야. 말이 본부장이지, 대표나 다름없이 일하는 사람인데 오죽 바쁘겠니.”

“엄마한테는 말 안 했는데, 나, 강선 아트 센터에 갔었어. 태서 씨 할머님이 거기 계시다는 거 듣고 선물까지 만들어서 들고 갔었는데, 함부로 찾아오지 말래. 선물도 거절당했단 말이야!”

강태서 본인은 물론이고 그와 관련된 곳에서 자꾸 문전 박대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유리가 코랄빛으로 칠한 입술이 다 지워지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을 때였다.


“유리야…….”

“잠깐, 잠깐만, 엄마.”

작은 크림빛 클러치에서 진동을 느낀 유리가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혹시라도 강태서가 전화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반짝이던 눈동자에 곧 실망의 기색이 차올랐다.


“못 온다면서 전화는 왜.”

오늘 선약이 있어서 못 온다던 친구의 전화였다. 퉁명하게 전화를 받은 유리의 안색이 핸드폰 너머에서 이어진 말을 듣고 창백해졌다.


―……듣고 있어? 아무리 봐도 강태서 맞는 것 같은데. 나, 요즘 만나는 여자가 그림 그리잖아. 점수 좀 따려고 같이 강선 아트 센터에 와 있거든.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강태서가 또다시 웬 여자와 팔짱을 낀 채 강선 아트 센터에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이성은 끊어진 뒤였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현관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뛰듯이 내려갔다.


“유리야, 갑자기 어딜……!”

지승희의 외침에도 답하지 않은 채 유리가 차고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하얀색 로드스터에 올라타서 조수석에 클러치 백을 내팽개치듯 던진 유리가 핸들을 꽉 쥐었다.


“강태서……. 강태서, 강태서!”

차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핸들을 몇 번이나 내리쳤다. 시야에 익숙한 길이 보이자마자 유리가 액셀을 밟았다.

더는 참아 줄 생각이 없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엄마 환갑 기념 생신인데, 아무리 강태서가 잘났다고 해도 약혼녀인 자신을 이렇게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거였다.

상대 여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가만히 둘 생각은 없었다. 지난번 강선 아트 센터 자선 바자회에 강태서의 파트너로 참석했다는 윤재인 몫까지 더해서 아주 철저하게 망신을 줄 생각이었다.

강태서의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은 조유리뿐이다. 그 누구에게도 그 자리를 내어 줄 수는 없다.

신호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핸들을 돌리는 유리의 얼굴은 독기로 일그러진 채였다.


 

* * *



“마음에 드는 그림은 있습니까?”

“음, 글쎄요. 지난번 그 그림이 가장 좋았던 것 같아요.”

“어쩌지. 그 그림 보려면 우리 집으로 가야 하는데. 갈래요? 우리 집.”

태서의 가벼운 유혹에 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태서와 함께하는 달콤한 시간은 야속하게도 빠르게 흘렀다. 이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그에게 제가 작정하고 접근했던 것을 털어놓아야 했다.


“온실 정원, 구경시켜 주세요.”

“…….”

“우리, 이제 와인 마셔요.”

“흠…….”

태서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재인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재인이 빨리 무언가를 얘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쩔까.”

“네?”

가만히 재인과 눈을 마주치던 태서가 체념한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한쪽 눈을 찡긋하며 씨익, 웃는 모습이 짓궂어 보이면서도 근사했다.


“그럽시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와인이랑 잔을 가져올 테니.”

재인은 제 곁에서 멀어져 아트 센터 메인 전시실 안쪽의 공간 어딘가로 사라지는 태서를 바라보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가 돌아본다면, 지금 제 표정을 의아하게 여길 게 분명했다.

재인은 시선을 멀리 던졌다. 어쩐지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였다.

강태서는 재인이 처음으로 탐낸 사람이었다. 그 전에 욕심내 본 것은 엄마가 조금 더 오래 살기를 바랐던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가까스로 마음이 가는 사람을 만났다. 저를 다정하게 바라봐 주고 상냥하게 대해 주며 마음을 두드리는 사람을 만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런데.


“왜…….”

왜 그 사람의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인지. 물론 그를 이용할 생각으로 접근한 것은 그녀였으니, 자초한 일이었다.

그러나 강태서와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도, 결국에는 조대훈이나 조유리와 엮일 테니 그는 함께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의 곁에 있을 자격이, 재인에게는 없었다.

서글프고 속상한 마음을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를 존중한다면 저에 대해 밝혀야만 했다. 더 큰 욕심이 차오르기 전에, 그의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제가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붉은 입술이 새하얘지도록 깨물며 부츠의 코끝만 내려다보던 그때.


“……!”

갑자기 억센 힘이 실린 손에 어깨가 잡혀 몸이 돌아갔다.


“너……!”

깜짝 놀라 커다랗게 눈을 뜬 재인의 앞에는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홉뜬 유리가 서 있었다.


“네가, 네가 왜 여기에 있어?”

“…….”

“너 혹시, 너……! 네가 태서 씨랑……!”

피식 웃으며 고개를 떨군 재인의 풍성한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졌다.

제가 강태서와 함께 왔음을 감지한 조유리의 분노가 우스웠고, 동시에 이 우습지도 않은 막장을 고스란히 태서에게 들킬 생각을 하니 속이 쓰렸다.

강태서에게 조금 더 제 속을 빨리 털어놓을 걸 그랬다. 이렇게 엉망으로 들켜 버리기 전에.

그렇게 생각한 재인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짜악, 소리에 술렁거리던 아트 센터 안이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곳에 재인이 서 있었다.


“네가,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모멸감에 부들부들 떠는 유리가 재인을 쏘아보았다.

고개가 돌아가도록 힘껏 뺨을 맞은 재인은 오히려 초연했다. 새빨개진 뺨을 그대로 둔 채 천천히 유리를 향해 고개를 바로 했다.

가만히 맞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돌려줄까 고민하며 유리를 노려볼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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