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할 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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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할 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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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할 말이 있어요
2022.11.22.
<인천 도착했습니다. 덕분에 오는 동안 잘 잤어요. 저녁에 봅시다. 먼저 가서 기다릴게요.>
태서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한 재인이 드레스 룸의 문을 열었다. 편하게, 평소처럼 입고 오라고 한 그의 말을 기억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편하게 입을 수는 없었다.
재인은 결정을 앞둔 긴장감에 설렘이 섞인 것을 인정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아끼는 옷을 입을 생각이었다. 윤재인의 모습 그대로 강태서를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말하고 싶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과 엮이면 어떻게 되는지를 판단하는 건 그의 몫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비난받더라도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부디 그가 덜 상처받기를 바랐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지만.”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다는 사실에 강태서가 화를 낼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러니 오늘이 그를 만나는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털어놔야 한다는 양심과 목적을 위해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고집 사이에서 수없이 갈등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그에게 선택권을 주자는 것이었다.
사실 이제는 일이 어그러질까 봐 걱정되는 것보다 자신에게 실망할 그가, 화를 낼 그가 두려웠다.
재인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강태서와.
“도대체 이게 무슨 감정인데.”
씁쓸하게 번진 후회를 지워 낸 재인이 옷을 꺼내 들었다. 애써 담담해 보이려고 입가에 힘을 주었지만, 어쩔 수 없는 미안함에 착잡함이 묻어 나왔다.
* * *
준비를 마친 재인이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서자마자 경호원이 그녀를 안내했다. 집 앞에는 태서가 보낸 차가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세단은 지난번 재인이 싫다던 차와 종류도, 색도 전혀 달랐다. 상앗빛 가죽 시트에 앉아 강선 아트 센터로 향하는 내내, 그의 섬세한 배려에 두 뺨이 간질거렸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다독이느라 복잡한 상념을 잊었다. 어느새 차가 서고, 문이 열리자마자 재인의 눈앞에 불쑥 나타난 것은 커다란 손이었다.
“안녕.”
듣기 좋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이윽고 고개를 드니 허리를 굽힌 채 저를 향해 손을 내민 강태서가 있었다.
재인은 반가운 마음에 설렘이 드러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주저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안녕, 이라고 하면 나도 안녕, 해야 하는 거죠?”
태서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재인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제 옆으로 이끌었다.
“잘 지냈어요?”
“네. 태서 씨는요?”
“어때 보입니까.”
“잘 지내신 거 같은데요?”
잘난 남자를 마주 보며 재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피곤해 보일까 봐 비행기 안에서 장 실장 마스크 팩을 하나 빼앗아 썼는데, 효과가 있나 봅니다.”
“아, 피곤하죠?”
긴 비행과 짧지만 빡빡했을 출장 일정 때문에 컨디션이 엉망일 게 분명했다. 재인은 태서가 무리해서 시간을 냈음을 상기했다.
“피곤했습니다. 재인 씨 만난 지금은 피곤이고 뭐고 생각도 안 나고.”
조금 딱하다는 표정으로 태서를 바라보던 재인은 듣기 좋은 말에 걱정을 미뤘다. 아트 센터 본관까지 이어진 정원의 가로등 아래에서 근사하게 차려입은 태서를 뒤늦게 눈에 담았다.
짙은 회색 슬랙스 위로 블랙 라운드 니트를 입은 그는 세련되고도 편안해 보였다.
그 위에 걸친 밤색의 오버사이즈 코트가 부드러움을 더했다. 정장을 입을 때와는 다르게 자연스럽게 이마를 덮은 머리칼 역시 두근거릴 만큼 매력적이었다.
“이렇게 보니 또 새롭네.”
제가 할 말을 대신 하는 태서를 향해 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통했나.”
“아…….”
재인은 그의 시선이 닿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차림새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인은 깔끔한 디자인의 블랙 시폰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붙는 블랙 진은 아름다운 다리 선을 드러내기에 충분했고, 그 위로 짙은 고동빛 코트를 걸친 채였다.
“이렇게 되면, 누가 봐도 커플인데.”
재인은 답하지 않았다. 능청맞게 구는 태서를 향해 슬쩍 눈을 흘기고는 그가 이끄는 대로 발을 내디뎠다.
조금은 휑하게 느껴지는 겨울의 정원을 지나 아트 센터 건물을 향할 때였다.
“와인을 준비해 뒀습니다.”
“여기서 마실 수 있어요?”
“일단 그림부터 보고 난 다음에요. 아트 센터 별관 뒤쪽에 외부에는 공개하지 않는 온실 정원이 있습니다. 거기서 마시죠.”
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까부터 제 손을 잡지 않은 반대쪽 손에 들린 커다란 종이 가방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건 뭐예요?”
“아, 이건.”
태서가 멋쩍게 웃으며 들고 있는 종이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뇌물.”
“뇌물……?”
“오늘, 나 잘 봐 달라고요.”
아트 센터 본관 입구에 선 그가 종이 가방을 열어 꽤 부피가 큰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나, 조금 긴장해야 해요? 또 막 엄청 비싸고, 그런 건가?”
“아니, 전혀. 그렇게 비싸지는 않습니다. 시카고에서 이걸 보고, 재인 씨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출장을 다녀온 그가 사 온 선물이 뭘까. 재인은 면세점에서 샀을 만한 것들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리본을 풀었다.
붉은 벨벳 리본이 풀리고, 새하얀 상자의 뚜껑이 열렸다. 동시에 재인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었다.
“이게……, 뭐예요?”
침대 근처에 놓기 알맞은 무드등 같았다. 조금 투박하다 여겨질 만큼 두꺼운 유리로 된 조명 장식이 짙은 색감의 목제 받침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시카고에서 사 왔다고 하기에는, 더군다나 관심 있는 여자에게 주고 싶어서 사 왔다기에는 조금 의아한 물건이었다.
“역시, 못 알아보네요.”
얼떨결에 태서에게서 상자째 건네받은 재인의 시선이 그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그의 손은 조명등 곁에 얌전히 놓인 작은 곰 인형 두 개를 향했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산타를 재인 씨가 갖는 게 좋겠습니다. Santa’s little helper, 이건 내가 갖죠.”
태서는 빨간 산타 복장을 한 곰 인형을 다시 조명등 곁에 내려놓고 초록 엘프 복장을 한 곰 인형을 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뭐지. 줬다 빼앗는 건가.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한 재인은 다시 조명등을 향해 손을 뻗는 그를 바라보았다. 태서가 조명등 뒤쪽의 작은 스위치를 켜자마자.
“아……?”
부드럽고도 따스한 느낌의 불빛에 이상하게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아무런 말도 없이 미소만 띤 채 저를 내려다보는 태서와 조명등을 번갈아 보던 재인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거, 혹시…….”
태서의 웃음이 조금 짙어졌다. 그는 재인이 들고 있던 상자를 가져가 들고는 재인에게서 몇 걸음 물러났다. 근처를 두리번거리다가 가까운 전나무에 바짝 붙어 서서는 조명을 조금 높이 들어 보였다.
“아……!”
선물의 정체를 깨달은 재인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조명을 들고 저를 향해 웃는 그가 재인에게는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보였다.
엄마와의 추억이 담겨 있는 워터 타워 앞의 트리는 그녀의 겨울을 밝혀 주던 존재였다. 그 트리를 그대로 옮겨 온 듯한 착각에 재인은 순간 먹먹해졌다. 웃고 있는데 코끝이 시큰거렸다. 이상하게 마음이 울컥했다.
“표정이 왜 그래요. 역시, 좋은 건 그저 두고 봐야 하는 겁니까?”
“…….”
조명을 근처 벤치에 내려놓고 가까이 다가온 남자를, 재인은 고개 들어 마주했다. 붉어진 눈가를 숨길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그저, 그를 눈에 담고 싶었다.
“그때 마음에 든다던 그림을 갖고 싶지는 않다고, 그래야 더 소중한 느낌이 들 거라고 했죠. 그 말이 생각나서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인부들이 해체 작업 하는 거 보니 여태껏 안 깨지고 버틴 게 다행이더라고.”
“그래서, 훔쳤어요?”
촉촉해진 눈과 빨개진 코를 찡긋거리며 재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재인은 마주 선 남자가 주저하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제 뺨을 매만지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
“처음에는 훔칠 생각도 하기는 했고.”
“……말도 안 되잖아요.”
“moonstruck이라는 단어, 당연히 알겠죠.”
그의 속삭임에 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랑에 빠져 약간은 이상하다는, 혹은 사랑에 빠져 미친 것 같음을 뜻하는 형용사를 묻는 태서가 이 순간 예뻐 보였다.
그래, 예뻐 보였다.
“윤재인을 알아 갈수록, 내가 미친놈이 되더라고.”
사랑에 빠져 정상적으로 사고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뜻하는 그 단어를 통해 재인을 향한 제 마음을 고백하는 남자가.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달에 쾅, 하고 부딪혀 치인 사람처럼.”
“…….”
“생각지도 못한 사고였습니다. 그렇게 내 세상을 뒤흔든 사람이,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게, 내 하루를 차지하는 게 다른 누구도 아닌 윤재인이어서 꽤 좋았고.”
재인이 얼굴을 기울였다. 제 눈가를 쓸어 만지는 다정한 손에 뺨을 묻은 채 스스로 미친놈임을 고백하는 남자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아끼듯 바라보는 눈빛이 애틋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그가 키스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인은 지금 이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탐나는 사람을 오래도록 눈에 담고 싶었다.
그와 마주 서서 서로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반짝이는 기억으로 남을 것을 알았다. 그래서 눈 한 번 깜빡이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남자를 이용할 수 없음을. 이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을 지저분한 일에 끌어들이려 했던 제 이기적인 계획이 얼마나 대책 없고 멍청했는지를.
“걱정하지 말아요. 훔치려다가 마음 고쳐먹었습니다. 시카고 경찰에 잡혀 들어가면 보고 싶은 사람 못 볼까 봐.”
태서의 농담에 재인이 짙어지는 웃음을 숨기지 않자 그 역시 눈을 접으며 마주 웃었다.
“새 크리스마스 장식을 구매할 수 있도록 기부하고 대신에 트리 꼭대기에 있던 장식을 받아 왔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크리스마스트리를 그대로 다 옮겨 오고 싶었지만.”
재인은 고개 저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태어나 받아 본 선물 중에 제일 마음에 들었다. 저를 위해 조명을 들어 올려 철 지난 크리스마스트리가 된 남자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혹시, 선물이 마음에 들어서 우는 겁니까.”
젖은 눈 밑을 닦아 내는 손길이 한없이 다정했다. 재인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건, 내 고백이 마음에 든다고 해석해도 되는 겁니까.”
재인이 잇새에 아랫입술을 물었다. 턱과 코끝에 힘을 주고 왈칵 쏟아질 것 같은 감정을 꾹 눌렀다.
이렇게 얼굴 보고 결정 내리기로 한 덕분에 지금이라도 그를 놓아줄 수 있게 되었다. 그에게 추한 꼴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기로 했다.
“강태서 씨.”
“응.”
‘응’과 ‘음’ 사이의 모호한 발음으로 대답하는 그의 낮은 음성이 듣기 좋았다. 그 한마디 말이 조금은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 탓에 우리는 여기까지가 맞는 것 같다고, 설렘을 알게 해 주어 고맙다고, 당신을 이용하려 한 것이 미안하다고.
결국, 이별을 말해야 하는 재인의 아쉬움이 짙어졌다.
아쉬움이라니, 겨우 그런 단어로는 부족했다. 슬펐다. 왜 당신이 하필이면 조유리의 약혼자인 것인지.
조대훈과 연관된 사람인 것인지. 왜 이렇게나 멋진 사람인 것인지. 왜 나는 당신의 고백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것인지.
“할 말이 있어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재인이 제 뺨을 감싼 태서의 손을 잡아 천천히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