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 얌전하게 굴지 않아도 되는 때 (41/123)


#41. 얌전하게 굴지 않아도 되는 때
2022.11.18.



―이제야?

“……네?”

―난 온종일 윤재인 씨 생각한 지 한참 됐는데.

부끄러움을 모르는 남자의 고백에 순간 할 말이 없어진 재인이 탄식과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핸드폰 너머에서도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봐. 종소리는 나만 들었지.

“종소리요?”

―아닙니다. 그래서 결론이 났습니까?

태서의 질문에 재인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며칠간 계속됐던 비와 눈이 그쳤다. 당분간은 포근한 날씨가 이어질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그 예보에 힘을 실어 주듯, 밤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다.

저 하늘을 날아 강태서가 올 것이다. 부디 그가 탄 비행기가 맑은 하늘길을 따라 날아오기를, 무사히 인천 공항에 내려서기를 바랐다.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잖아요. 그때 얘기해요.”

―자꾸 그러면 기대하는데.

“음……. 얌전히 기다리겠다면서요.”

―사실, 그리 얌전한 편이 못 됩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은 낮아진 남자의 음성에 재인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빨아 적셨다. 지금처럼 짙게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입이 바싹 마르는 것 같다.


―때를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때라니, 무슨…….”

―얌전하게 굴지 않아도 되는 때.

재인은 맹수를 조련하는 기분이었다. 강태서는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두고 허락을 기다리는 포식자 같았다. 문제는 조련사도, 먹잇감도 모두 다 윤재인, 자신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뭘 어쩌려고요.”

―재인 씨도 좋아할 겁니다. 얌전한 강태서보다 얌전하지 않은 강태서를 더.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게 나니까. 얌전하기만 하면 재미없잖아요.

재인은 그의 으름장이 겁난다기보다는 기대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긴 숨을 내뱉으며 어느새 빨갛게 달아오른 두 뺨의 열기를 식혀 보려 애썼다.


―걱정하지 말아요. 윤재인 씨의 결정이 무엇이든, 나는 존중할 겁니다. 물론, 바로 단념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의 갖춰서 두 번만 더 추근거릴게요.

두 번만 더 추근거리겠다는 능글거림이 사뭇 당당하고 정중해서 웃음이 났다. 강태서는 이렇게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는 데 능했다.


―듣기 좋네요. 웃는 소리.

“음.”

―직접 보면 더 좋을 것 같고. 웃는 모습.

“…….”

―정색하지 말아요. 지금부터 최소 열여덟 시간 동안은 재인 씨가 생각 마무리할 수 있도록 전화도, 메시지도 안 할 테니까.

“네.”

열여덟 시간 후 한국에 도착할 그가 기다려졌다. 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젖은 머리칼을 감싸고 있던 수건을 화장대 위에 내려놓았다.


―아, 경호원 때문에 불편하지는 않습니까?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요. 밤새도록 집 문 앞에 서 계시는 것 말고는요.”

―다행입니다.

그가 붙인 경호원 때문인지, 요 며칠 특별한 일은 없었다. 눈에 띄게 제 곁을 맴돌던 낯선 남자는 오늘 내내 보이지 않았고, 기분 나쁘게 달라붙던 시선도 오늘은 느끼지 못했다.

재인은 이유가 무엇이든 그의 제안에 따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조대훈과 다시 마주쳐야 한다면, 그건 그녀 스스로 원할 때여야 했다.


“그런데, 잠은 좀 주무셨어요? 시카고 출장이 겨우 3박 5일이라니, 일정이 너무 빡빡한 것 같아서요.”

―사실 잠은 거의 못 잤습니다. 특히 어제는, 음…….

어젯밤을 떠올리는 태서의 음색에 피곤이 묻어났다.


“아, 많이 바쁘셨나 봐요.”

―그것도 그렇지만……. 그냥, 어젯밤에는 누구든 옆에 있었으면 했습니다. 아, 다른 의미는 아닙니다. 사실 자다가 새벽에 깨면 늘 그런 생각이 들곤 했는데……. 이상하게 듣지 말아요.

재인은 그가 하려는 말을 이해했다. 재인 역시 엄마를 떠나 한국에 와 있던 7년 동안 늘 그랬다. 그 전에는 새벽에 깨면 엄마 방으로 가서 엄마 세나를 껴안고 잠들던 그녀였다.

그러다 세나가 죽고, 그 후로는 늘 혼자였다. 그나마 바쁘게 지내는 낮 동안에는 덜했다. 하지만 생각이 깊어지는 밤이면, 잠에서 깬 새벽이면 문득 엄마의 체온이 그리워지곤 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아무래도 새벽에 자다가 깨면 조금 더 외롭게 느껴지니까요. 이해해요.”

―그렇다기보다는. 기억이라는 게, 외면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재인은 잠시 말을 멈춘 남자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음, 조금 당황스럽네요.

“네?”

―잠이 부족하기는 한가 봅니다.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네요. 동정이라도 얻고 싶었나 봅니다.

“아…….”

―재미없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다른 얘기 하죠. 도대체 시카고 피자가 왜 유명한 겁니까? 솔직히 말해 봐요. 시카고 사람으로서 시카고 피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하다고 생각해요?

태서가 갑자기 애먼 피자를 놓고 길게 트집 잡았다. 재인은 그가 갑자기 말을 돌리는 것을 두고 눈만 깜빡이다가 이내 웃음으로 답했다.

그가 꼭 하고픈 말이라면 언젠가는 할 테니까.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를 굳이 채근하여 듣고 싶지는 않았다. 재인 역시 아픈 기억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타인이 제 상처를 함부로 들여다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어색한 위로는 아픈 기억만 들쑤실 뿐이다. 그걸 아는 재인은 남자에게 스치듯 어린 어둠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사실, 좀 과하게 포장되기는 했죠.”

언젠가 그의 사소한 것까지 알게 되는 날이 올까. 타인에 대해 알아 간다는 건 피곤한 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기대되다니.

재인은 문득 그가 숨기고 있을 아픔까지 감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다행입니다. 같은 생각이라서.

“피자 먹으러 갈 거면 저한테 물어보시지 그랬어요. 진짜 맛있는 집 아는데. 참고로 시카고 스타일 아니에요. 콧수염이 멋진 이탈리안 사장님이 운영하는 핏제리아예요.”

재인은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시카고의 단골 핏제리아에서 강태서와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중이었다.


 

* * *

태서는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기 위해 자세를 바꿔 누웠다. 화요일 오전에 인천을 떠나 뉴욕을 거쳐 시카고에 도착해서 일을 마쳤다.

변화된 시차에 적응할 새도 없이 잠자는 시간을 줄여 일했고, 다시 또 지금은 시카고에서 뉴욕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도착하자마자 씻고 옷만 갈아입은 후 다시 강선 아트 센터로 가야 했다. 지금 자야 그나마 덜 피곤해 보일 것이다. 그런데 왜.


“하…….”

잠이 안 온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도착해서 재인을 볼 생각을 하면, 이륙 전까지 재인과 길게 통화했던 것을 생각하면 자꾸만 그린 듯 아름다운 입술이 씰룩거렸다.

사실 오늘은 태서에게 힘든 날이었다. 태서의 친모 유정하의 기일이었기 때문이다. 시차 때문에 잊고 싶은 그날이 거의 서른 시간 넘도록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유명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그곳, 런던의 부촌 노팅 힐. 태서는 그곳에서 친모와 함께 7년 가까이 살았다. 그에게 노팅 힐은 악몽으로만 기억되는 곳이었다.


“아가. 할미한테 오렴.”


“…….”


“나다. 할미야. 내가 미안하구나. 내가……. 아가, 내가 미안해.”

 
유정하는 욕조에서 손목을 그은 지 이틀째로 추정되던 날, 매주 월요일마다 들르는 도우미에게 발견됐다. 잠긴 욕실 문 앞에 웅크린 채 쓰러져 있던 열 살의 태서는 병원에서 깨어난 후 입을 열지 않았다.


“사진상으로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시간을 갖고…….”


“다른 건 다 그렇다고 쳐도, 왜 말을 안 하는 게야. 더 어릴 때도 또박또박 제 생각을 말하던 아이였는데!”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방어 기제입니다. 다그치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큰 충격으로 인해 부분적인 기억 상실이 오면서…….”

 
힘든 일을 겪고 말하지도, 울지도 않는 태서를 살핀 의사는 부분 기억 상실과 함께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제 어머니가 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토요일 저녁에 욕실에 들어가 문을 잠근 친모가 월요일 아침에 발견되기까지. 그 주말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학교 갈래요.”


“……태서야, 말을, 말을 한 게야?”


“학교, 갈래요.”


“아가, 너……. 너, 기억은…….”

 
3개월간 말문을 닫고 죽은 듯이 살던 아이가 눈을 맞추고 입을 연 것은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때였다. 멀쩡하게 말은 했지만, 아이는 친모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만 껌뻑였다.


“이 사람, 누군지 모르니?”


“네. 처음 봐요.”

 
의사가 유정하의 사진을 보여 주며 뭔가 기억나는 것이라도 있는지 조심스럽게 살폈다. 하지만 태서는 지병 악화로 숨졌다고 알려진 친모에 대해서만큼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척하며 태연하게 굴었다.

스스로 잊고 싶기도 했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어린 손주를 걱정하여 차라리 다 잊은 채 살아가기를, 끔찍한 기억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조모의 바람을 들어준 것이다.


“다시 런던으로 갈래요. 그런데 예전 학교는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아가, 할미랑 있자꾸나. 한국에도 좋은 학교가 많아요.”


“가고 싶었던 학교가 있어요. 거기 보내 주세요. 대신 저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해요. 요리와 운전을 할 수 있고, 런던에서 의사소통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으로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확고한 고집에 결국 어린 태서는 다시 런던으로 향했다. 켄싱턴궁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하고 그곳에서 상주하는 두 명의 보호자와 함께 살며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태서야, 곧 어멈 기일인데…….”


“저는 안 가고 싶어요.”


“혹시 뭐가 생각난 게야?”


“아뇨. 그냥, 그러고 싶어요. 생각하려고 하면 마음이 불편해요.”

 
그의 키가 친부에 가깝게 커지기 시작하던 중학생 때, 잠깐 한국에 들어와 있던 중에 마침 친모의 기일이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추모 공원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 물어 오는 조모에게 태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날, 태서는 내리 토했다. 자다가 소리를 지르며 깨고 베개가 다 젖도록 울었다.

기억을 잃은 척한 것은 연기였지만,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꾸며 낼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어린 태서가 매년 그쯤이면 겪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꼴을 직접 본 조모는 그 후로 태서에게 친모에 관한 이야기를 아예 하지 않았다. 기일도 혼자 챙기며 태서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한국에 있지 않고. 기어코 대학까지 다 외국에서 다닐 생각인 게야?”


“네.”


“태서야.”


“저는 그게 편해요. 아버지께서도 저와 한집에 있는 건 불편하실 겁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기만 한 태서였다. 하지만 태서는 그저 기억이 나지 않는 척, 끔찍했던 날들을 외면하려 한 것뿐이었다. 차라리 정말로 기억을 못 한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긋지긋한 두통에도 약 한 알 제대로 먹지 못하는 등신으로 자라지는 않았겠지.”

자조하는 듯한 웃음을 흘린 태서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비행기 창의 덮개를 내리려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을 마주하고는 그대로 두었다.

눈을 감기 전 다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핸드폰이었다. 이미 이륙 전에 몇 번이나 봐서 달달 외운 메시지는 거듭 읽어도 새롭기만 했다.


<태서 씨 좌석은 보나 마나 일등석이겠죠? 일등석은 하늘 위 호텔이랑 다를 게 없다던데. 오는 내내 두 다리 쭉 뻗고 자요. 피곤함이 좀 풀리면 좋겠어요.>

<잘 자요.>

잘 자라는, 다정한 메시지를 보내기 전에 윤재인은 고민했던 걸까. 3분의 시차를 두고 보내온 두 번째 메시지를 곱씹던 태서가 다시 눈을 감았다.


“잘 자라고 했으니, 잘 자야지.”

보고 싶은 이의 웃음소리를 떠올리고 있으니 조금은 두통이 가시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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