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 감히 (40/123)


#40. 감히
2022.11.15.



“황 여사, 이러기예요? 내가 지금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쓸 게 많아서 머리가 다 아픈데.”

―여사님, 제 밥줄 끊으시려는 거 아니라면 제발 받아 주세요. 예?

광순은 황 여사에게서 걸려 온 전화에 지끈지끈한 머리를 싸매고 있던 끈을 또다시 집어 던졌다. 재건축 동의서에 도장을 찍은 후 뒤집힌 속을 달래려 누워 있는데 온갖 방해가 넘쳐 났다.


“내가 뭘 어쨌다고 황 여사 밥줄을 끊는대?”

―제가 이 바닥에서 맺어 준 커플이 몇인데요. 좋은 혼맥 맺는 거 도와드리고 덕분에 애들 결혼 잘 시켰다, 그 말 한마디에 힘내서 살아가는 게 저예요.

“아니, 누가 뭐래요? 그리고, 황 여사가 뭐 그 보람 느끼자고 공짜로 일했어요? 참한 아가씨 소개해 준다며 받아 가는 돈이 적기를 하면 말이라도 안 해. 내가 특별히 웃돈까지 얹어 줬잖아.”

광순이 짜증을 내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매만졌다. 같잖은 상대가 자신을 우습게 여기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돈 주시면 뭘 해요.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요. 여사님이 내건 조건 충족할 아가씨들이 요즘 세상에 어디 있어요. 조선 시대여도 안 돼요. 딸 가진 여사님들께 그 조건 들이밀면 제 밥줄이 끊긴다구요.

“이거 봐요, 황 여사.”

―아무튼, 저는 도저히 못 하겠으니까 먼저 내신 돈 다 돌려드리겠다는 거예요. 다른 소리 하지 마시고 제발 계좌 번호 좀 알려 주세요.

“아니, 올해 안에 며느리 보게 해 주겠다고 장담할 때는 언제고 이래요?”

―그건 여사님 조건 듣기 전이구요. 여사님, 제가 솔직히 말씀드리는 건데요. 눈을 좀 낮추셔야 해요. 아니, 많이 낮추셔야 해요.

“뭐가 어째?”

감히 누가 누구한테 설교하는 건지. 광순은 기가 차서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건 여사님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혹시라도 아드님 조건 보고 연락해 와서 아드님과 얘기해 보고, 그리고 여사님과도 얘기해 보고, 그러고도 시집오겠다는 아가씨가 있으면요.

길어지는 황 여사의 말에 베개를 쥔 광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의심해 보셔요. 제대로 된 생각이 있는 아가씨라면 그럴 리가 없어요.

“황 여사!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지금 나를 우습게 여기는 거야, 뭐야? 나한테 이따위로 하고도 강남 바닥에서 계속 그 일 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여사님. 제가 여사님을 우습게 여기는 게 아니고요, 현실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러니 꼭 계좌 번호 문자로 보내 주세요. 네?

“나 참, 일 이따위로 하는 여편네한테는 나도 내 아들 혼사 안 맡겨! 계좌 번호 보낼 테니 한 푼도 빼먹지 말고 돌려보내요. 어디 두고 봐! 능력도 없으면서 돈만 많이 받아 처먹는다고 내가 죄 소문을, 아니, 지금 끊은 거야?”

뭐 이런 게 다 있어. 그런 표정으로 통화가 끊어진 화면을 노려보던 광순은 또다시 밝아진 화면에 뜬 <117동 신 여사> 이름을 보고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잠시 받을지 말지 고민하던 광순은 이내 눈을 내리깔고 초록색 통화 부분을 터치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저 문제가 생겨 상황을 받아들인 것뿐이다. 그러니 떳떳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예, 신 여사.”

평소와 다름없이 교양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신의가 없으시네요? 남 여사님.

“뭐라고요?”

―다 들었어요. 홀랑 도장을 찍으셨다고. 남 여사님 덕분에 재건축 조합원이 정식으로 출범했다네요. 대단한 일 하셨네요, 아주.

비아냥거리는 신 여사의 말투에 광순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이거 봐요, 신 여사. 지금 시비 걸려고 전화했어요?”

―아뇨. 비난하려고 전화했어요.

“뭐예요?”

―조합원장 말 들어 보니 당장 월요일부터 조합 통합하고 재건축 추진한다고 업체 담당자들 다 불러 놓고 공청회를 한다대요? 아주 번갯불에 콩 볶아 먹을 기세던데.

“그래서요?”

가뜩이나 머리 아팠는데, 황 여사에 이어 신 여사까지, 같잖은 존재들이 화를 돋우며 덤벼 대니 부아가 치밀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다면서 도장 못 찍게 했던 게 도대체 누구예요?

“어제 동 대표 얘기 들어 보니 내가 도장 안 찍었어도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다던데. 왜 날 탓해요?”

―웃겨, 아주. 당장 눈앞의 돈에 혹해서 집 팔아넘기면 없이 사는 것들이랑 다를 게 뭐냐고 그러더니. 남 여사님, 돈이 그렇게나 궁하세요?

석동이 일을 저질러 돈이 궁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광순은 늘 아래로 보고 있던 신 여사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에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대거리를 하자니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꽉 쥔 주먹을 부들거리고 있을 때였다.


―최 여사 아들이 요 앞에 강남 은행 다니는 거, 아시죠?

석동이 대출을 잔뜩 당겨 받은 주거래 은행 얘기가 나오자 광순이 입을 꾹 다물었다. 힘주어 발랑거리는 콧구멍에서 더운 콧김이 나왔다.

어제 오후, 광순은 강남 은행에 들러 늘 그렇듯 최 여사 아들의 도움을 받았다.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받고, 묶어 놓았던 목돈을 죄다 찾아 당장 급한 곳의 불부터 끈 것이다. 그런데 얘기가 새어 나간 모양이다.


―우리, 화사회에서 남 여사님은 제하기로 했으니 그리 아세요.

“신 여사!”

화사회, 다시 말해 화미사랑회는 화미 아파트에 거주하는 50세 이상의 여성들로 구성된 모임이었다.

가입하기 위해서는 화미 아파트에 10년 이상 거주한 소유주로서, 매달 적지 않은 회비를 낼 수 있는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을 갖춰야 했다.

혜택은 별것 없었다. 수준 맞는 집안끼리 알고 지내며 투자와 교육, 쇼핑 등에 관한 여러 정보도 주고받았고, 매년 화미사랑 바자회를 열어 격에 맞는 봉사 활동을 하며 뿌듯함을 나눴다.

광순은 화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큰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나 받아 주지 않는 모임이라는 것이 무척이나 매력적이어서 올해에는 회장 선거도 나가 볼 생각이었다.


―회원 만장일치로 그렇게 하기로 했네요.

“도대체 이유가 뭐예요?”

―뭐겠어요. 격에 안 맞아 그렇지.

격. 광순이 그렇게나 강조해 온 것이다. 격에 안 맞는다며 못 배운 것들, 없이 사는 것들을 우습게 여기고 무시했다.

그런데 누가 자신을 그렇게 볼 줄이야.

어느새 통화는 끊어진 후였다. 광순의 맞은편에는 화사회에서 제작해서 나눠 가진 달력이 걸려 있었다.

<특별한 품격, 특별한 우리, 화미사랑회>

달력에 적힌 올해의 문구를 응시하는 광순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 * *



“그래서, 올 거야 말 거야. 빨리 말해.”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나 갑자기?

“나 지금 전화할 곳 많아. 너 아니어도 온다는 사람 많거든?”

유리는 지금 무척이나 바빴다. 그도 그럴 것이 토요일 저녁에 계획되어 있는 엄마 승희의 환갑 기념 생일 파티가 더 성대해질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조금 전, 아빠 대훈은 이제 현양 건설의 격이 더 올라갈 거라고 했다. 강남 일대 재개발 사업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치며 유리에게 태서의 마음을 꼭 잡아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현양 건설이 건재하다는 과시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세간에 도는, 강태서가 조유리가 아닌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는 소문을 잠재울 겸, 강선 그룹과의 혼맥이 올해 안에 성사될 거라는 확신도 심어줘야 했다.


―드레스 코드는?

“단톡방에 띄웠잖아. 우리 엄마 생신 축하하는 자리니까 되도록 얌전하고 우아하게.”

아빠 대훈의 회사 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없는 유리였지만, 화미 아파트 일대 재건축 사업이 큰돈이 될 거라는 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장 내일로 다가온 생일 파티의 규모를 키우기로 한 것이다. 애초에 유리가 파티를 기획할 때는 엄마와 아빠의 지인 위주로 초대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친구들을 불러 엄마를 위한 깜짝 이벤트를 열어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강태서의 팔짱을 끼고 등장할 생각이었다. 이번 기회에 그와의 결혼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너 진짜 강태서 불렀어?

“그렇다니까. 장모님 환갑 기념 파티인데, 사위가 불참한다는 게 말이 되니?”

―그러면 그 소문은 뭐래? 그, 저번에 강선 아트 센터 자선 바자회에서…….

“그건, 네가 신경 쓸 거 없어.”

딱 잘라 말하는 유리의 태도가 차가웠다. 유리는 지난번 윤재인이 강태서의 팔짱을 끼고 등장했다는 얘기를 들은 후 엄마와 아빠에게 난리를 쳤다.

직접 강선 아트 센터에 찾아갔다가 무시만 당하고 돌아오긴 했지만, 그 늙은이랑 결혼하는 것도 아니니 그 정도 멸시는 참을 수 있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알고 있는 이상, 더는 윤재인이 한국 땅에서 제멋대로 여우짓 하는 꼴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잖아. 약혼녀인 너를 두고 다른 여자랑 파트너라니, 강태서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네가 뭔데 태서 씨를 평가해? 그리고 그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내가 태서 씨한테 그러라고 한 거야.”

유리는 넓은 아량으로 다른 여자와 함께 자선 바자회에 참석한 태서를 용서해 주기로 했다. 다만 이 부분은 다음에 확실히 짚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저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더는 참아 줄 생각이 없었다.

더불어 윤재인에 대해서는, 벼르는 중이었다. 아빠가 제 앞에 그 반반하기만 하고 재수 없는 애를 데려다 놓을 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더러운 사생아 주제에, 미국에서 숨죽이고 살 것이지, 감히 내 약혼자를 넘봐?

다시금 제 주제를 알게 해 줄 생각이었다. 통화를 끝낸 유리가 애꿎은 태서의 전화번호를 노려보았다. 짧게라도 좋으니 목소리라도 들려주면 좋으련만. 오늘도 바쁠 게 분명한 남자는 무정하기까지 하다.

새치름하게 뜬 눈에 서운함이 서렸다. 유리는 스멀스멀 번지는 불안함을 애써 모르는 체했다. 좋은 것은 항상 그녀의 차지였으니, 결혼이라고 다를 리 없다는 믿음이었다.


 

* * *

씻고 나온 재인이 울리는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의외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동그란 눈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지금 거기는 새벽 아니에요?”

여보세요, 라는 말보다 먼저 나간 질문에 전화를 걸어온 태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재인은 뒤늦게 멋쩍어 코끝을 찡긋거렸다.


―새벽 맞습니다. 한국은 지금 밤 아홉 시가 넘었겠군요. 혹시, 자려던 참입니까?

“아뇨. 조금 전에 들어온걸요. 그런데 이 시각에 어쩐 일로…….”

한국 시각으로 밤 아홉 시가 넘어 전화한 걸 타박하는 게 아니었다. 새벽에 전화했을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걱정이 앞서서였다.


―이제 곧 비행기 탈 겁니다.

“아.”

―보고 싶은데 볼 수는 없고.

“음…….”

―메시지만 보내자니 목소리라도 듣고 싶고.

재인은 어느새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고 있었다. 입꼬리가 조금 올라간 채였다.


―그러니 혹시라도 일찍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라면, 좀, 봐주죠. 많이 참다가 전화한 겁니다.

태서의 유혹 섞인 엄살에 재인이 간질거리는 뺨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고개 저었다.

내일이면 그를 만난다. 재인은 어쩌면 제가 그의 메시지를, 전화를 계속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전화가 이렇게나 반가운 것을 보면.


“얌전히 기다리겠다고 해 놓고 자꾸 이렇게 메시지 보내고 전화하면 반칙이에요.”

겨우 꺼낸 말이 투정처럼, 혹은 앙탈처럼 들릴까 봐 후회됐다. 재인은 아직은 냉정해야 한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흔들립니까?

“…….”

―누가 감히 윤재인을 흔들지.

태서의 뻔뻔한 중얼거림에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다독이던 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수화기 반대편에서도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 아직도 고민 중입니까. 내가 그렇게나 매력이 없어요?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윤재인이 만난 강태서만 생각하라고 했잖아요.

하지만 이렇게나 부드럽게 속삭이는 남자의 솔직함 앞에서 냉정함을 가장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애꿎은 쿠션 모서리만 매만지던 재인이 결국 입을 열었다.


“사실은, 자꾸만 강태서 씨 생각이 나요.”

입을 열자마자 튀어나온 것은 진심이었다. 그 어떤 고민도 거치지 않은 말에 재인이 먼저 놀라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좋아할까. 방금 제가 한 말을 듣고, 강태서는 웃고 있을까.

윙크하듯 눈을 접어 웃는 남자의 근사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런데 핸드폰을 통해 들려와야 할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재인이 의아함에 그를 부르려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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