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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한 사람 생각만 (39/123)


#39. 한 사람 생각만
2022.11.11.



“내 사무실에서 강남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윤재인 씨 요가원 건물은 안 보입니다. 요가원을 좀 더 높은 곳으로 옮길 생각 없습니까?”

―지금 사무실 전망 좋은 거 자랑하시려고 전화하신 거예요?

태서가 쿡쿡, 낮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 저었다. 어려운 말을 꺼내야 하는 그였기에 일부러 농담해 본 것이었다. 재인의 새침하면서도 편안한 반응이 고마웠다.


“윤재인 씨.”

―네.

“나 내일 새벽에 출장 갑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메시지도 보냈는걸요.

“시카고로 가는데…….”

―아, 정말요?

“가서 내내 한 사람 생각만 하게 생겼습니다.”

―음…….

“그래서 말인데.”

태서는 지금부터 제가 해야 할 말을 재인이 부담 갖고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랐다. 후우, 호흡을 고른 태서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곁에 경호원 둘 생각 없습니까?”

―네?

“시카고에 가 있는 동안 윤재인 씨 걱정 말고, 윤재인 씨 생각만 하려고 그럽니다. 내가.”

―…….

“재인 씨가 불편할 거라는 거 아는데, 부탁 들어준다면 좋겠습니다.”

―왜죠?

윤재인은 똑똑한 여자였다. 그러니 갑자기 경호원을 붙이려는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그 이유를 미리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태서가 재인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밝히기엔, 그녀는 아직 숨기는 것이 많았다. 재인이 스스로 밝힐 마음을 먹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짐을 보태고 싶지는 않았다.

태서가 지향하는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재인이 상처를 덜 받게끔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태서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약혼녀라고 떠들고 다닌다는 여자가 있다고 말했었죠.”

―……네.

“혹시라도 윤재인 씨 귀찮게 할까 봐 그럽니다.”

―……나랑 상관없이, 태서 씨가 그 여자를 싫어하는 거라면 끊어 내면 되잖아요.

태서 역시 진작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쓰러졌던 조모가 충격받지 않도록 참았고, 그다음에는 조대훈 회장을 물 먹이기 위해 참는 중이었다.

사실 태서는 그가 최근에 마음먹은 일을 실행함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그녀의 허락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재인에게 그 사실을 지금 얘기할 수는 없다. 어떻든 조대훈이나 정재훈과 관련된 것은 재인이 모르게 하고 싶었다. 그녀가 태서에게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한은.


“때를 기다리는 중이어서.”

―음…….

“우리 만나기로 한, 토요일 그 시각까지만.”

답이 없는 재인을 향해 태서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재인 씨는 평소처럼 지내면 됩니다. 불편할 건 하나도 없을 거예요. 곁에 있는 줄도 모를 겁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태서는 재인의 요가원이 있을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말해요.”

―혹시, 강태서 씨랑 사귀게 되면 그런 사람을 곁에 두는 게 일상이 되는 건가요?

재인의 당돌한 물음에 태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답 잘해야 하는 거죠?”

―네.

“일상은 아니고, 가끔. 필요에 따라서?”

―음…….

“그런 불편함 다 감수하고서라도 나를 만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 자신감, 뭐죠?

“말 그대로, 자신 있으니까. 그러니까 빨리 결정해요.”

재인이 작게 터뜨리는 웃음소리에 태서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는 조용히 사무실 문을 열고 대기 중이던 장 실장을 향해 눈짓했다.

뜻을 알아들은 장 실장이 급히 업무용 핸드폰을 손에 드는 것을 확인한 태서가 다시 사무실 문을 닫았다. 책상에 걸터앉은 그의 눈은 여전히 요가원이 있을 방향을 향한 채였다.


“혹시 내일이나 모레, 바쁘지 않으면.”

―네.

“내 생각 좀 해 줄 겁니까?”

재인의 웃음소리에 집중한 태서가 눈을 감았다. 또렷한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채였다.


 

* * *



“벌써 안양에 갈 때가 되었어.”

부관장이 보내온 하반기 전시회 일정을 살피며 입을 뗀 임홍진 관장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돋보기안경 너머로 소파에 앉은 아들을 보았지만, 아들 강신재 회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태서 어멈은 죄 없네. 자네 원망, 나에게만 쏟아부어도…….”

“차 식습니다.”

단 한 문장으로 들을 생각이 없음을 표현한 신재가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탁의 찻주전자를 향해 손을 뻗는 그에게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강 회장.”

“예. 관장님.”

모자지간임에도 살뜰한 호칭은 없는 사이였다. 비즈니스적인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는 둘의 침묵이 길어지는 가운데 쪼르륵, 맑은 찻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임 관장이 어느새 나이 예순에 가까워진 아들을 바라보았다. 세월을 비껴가지 못한 아들의 머리칼에도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죽은 남편 강선일을 똑 닮은 강건한 체격과 날카로운 이목구비는 여전했다. 손자 태서의 미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셋이 그만큼 닮았으면서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나…….


“한 번쯤은 같이 가야지.”

“…….”

안양의 추모 공원에 같이 가자는 말을 꺼낸 것은, 임 관장 역시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신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마음, 그 분노. 그만 거둘 때도 되지 않았나.”

“거두라는 건.”

따뜻한 차가 가득한 찻잔을 응시하는 신재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고인다.

한때는 세상 누구보다도 어머니를 존경한다고 말하던 아들이었지만, 아들은 30년 넘게 “어머니”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 눈을 바로 보는 일도 없었다.


“잊으라는 건데.”

“…….”

“차 잘 마셨습니다.”

두 번째 찻잔을 채운 그대로 둔 신재가 일어서서 그대로 임 관장의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임 관장이 다탁에 놓인 찻잔 두 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경을 내려 두고 꾹 감은 눈 위로 마른 손등을 얹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흩어지고 옅어질 줄 알았던 아들의 분노는 오히려 짙어졌다. 그 위로 원망, 후회, 복수, 허탈함, 그리움과 같은 무거운 것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다가오는 금요일은 태서의 친모 유정하의 기일이다. 재벌가에서 사랑받고 자란 유정하는 밝고 환한 사람이었다. 태서의 조부인 강선일 회장이 직접 고른 며느리였고, 그만큼 예뻐했다.

그러나 정작 결혼 당사자인 강신재는 그 결혼을 원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부자간의 대립 속에서도 결혼은 이루어졌고, 사랑을 바랐던 유정하의 욕심으로 어찌어찌 태서가 태어났다. 그러나 태서가 태어난 날, 강신재는 제 짝이라 여겼던 여자를 잃었다.


“연희가 죽었습니다. 이제 마음 편하세요?”


“신재야…….”


“두 분 원하시는 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오래오래 사세요. 그래야 제가 이 지옥을 어떻게 살아 내는지 지켜보실 수 있을 테니.”

 
울부짖던 아들은 지금의 태서보다도 젊었다. 원했으나 죽은 여자, 원치 않았으나 태어난 아이. 그 둘을 두고 비탄에 빠졌던 강신재는 그날부터 마음의 문을 닫았다.

유정하는 남편의 외면 앞에 무너져 갔다. 결국, 그녀가 마지막으로 택한 것은 태서를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증오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으로부터는 멀어지되. 그를 똑 닮은 아이를 키워 내며 아내의 자리는 지키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유정하가 아직 어린 태서와 단둘이 영국으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임 관장은 말리지 못했다. 살겠다고 노력하는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붙잡았어야 했지, 내가. 곁에 붙들고 어떻게든 살자고 그랬어야 했어.”

중얼거리던 임 관장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후회 가득한 임홍진 여사의 눈빛이 달력을 향했다. 남편도, 아들도 챙기지 않는 불쌍한 여자의 기일을 20년이 넘도록 챙기는 것은 시어머니였던 그녀뿐이다.

유정하는 나이 마흔도 전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것도 하나뿐인 어린 아들 태서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

오래전 기억을 더듬는 임 관장의 눈가에 회한이 쌓였다.

* * *

태서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턱을 들었다. 머플러 밖으로 드러난 코가 빨개진 채였다. 1월의 시카고 날씨를 참을 수 있는 것은 재인 때문이었다.


“하마터면 못 볼 뻔했네.”

화요일 아침에 한국을 떠나와 뉴욕을 거쳐 시카고에 도착하니 화요일 점심때였다.

열일곱 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마주한 시차에 적응할 새도 없었다. 내내 건축 박람회 관련 주최 측과 미팅했고, 내일 있을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야 했다.

수요일 오후부터는 이틀간 건축 박람회에 참여하여 업체들을 대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한 후, 몇몇 기업의 담당, 그리고 단체장과의 미팅이 밤늦게까지 약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금요일 새벽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피곤함에 절어 있는 장 실장에게 쉬라고 말한 뒤, 홀로 쌓인 서류를 검토하던 태서는 바쁜 일정에 밀려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다 미뤄 둔 채 호텔을 나섰다.


{비켜요. 위험합니다.}

워터 타워를 배경으로 트리 전체의 모습을 담아 사진 한 장 찍자마자 인부들이 나타났다. 트리 주변의 바리케이드를 걷어 내더니 그 자리에 사다리를 세웠다.


{지금 해체하는 겁니까?}

{보면 모릅니까?}

무뚝뚝한 인부의 대답에 태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마 해체 직전에 직접 눈으로 보고 사진 한 장 건진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그래도 밤에 빛나는 트리를 볼 수 없는 점은 아쉬웠다.

트리는 작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시선을 끌 만큼 커다랗지도 않았다. 어떻게 보면 강선 백화점 본점 앞을 꾸민 트리보다도 작은 사이즈였다.

진초록색 커다란 전나무는 온통 붉은색으로만 꾸며져 있었다. 붉은 리본과 붉은 오너먼트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는데, 유일하게 붉지 않은 것이 꼭대기에 꽂아 놓은 새하얀 별이었다.

5개의 팔을 가진 일반적 형태의 별이 아니었다. 어른 주먹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울퉁불퉁한 구체는 꽤 두꺼운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다.

별이라기보다는 조명등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그런데 유리가 전체적으로 균등한 두께로 매끈하기보다는 투박하게 굴곡진 형태여서 세월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인부들이 묵묵히 해체 작업을 하는 와중에 오너먼트 몇 개는 바닥에 떨어지기도 했고, 깨지기도 했다. 태서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인부 한 명에게 다가갔다.


{저 꼭대기 위의 별 장식이 혹시 특별한 겁니까?}

{특별할 게 뭐 있습니까. 특별하다고 해 봤자, 여기 트리를 세운 이후로 유일하게 매년 꼭대기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 말고는 없을 겁니다.}

{한 해도 빠짐없이?}

{그렇죠. 저것도 구식이라 무겁기만 하지. 요즘은 가볍게 얼마나 잘 나오는데 안 바꾸는지, 원.}

툴툴거리며 해체 작업을 진행하는 인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해체하다가 장식물이 깨지면 어떻게 됩니까. 혹시, 불이익이 있습니까?}

{그런 게 있을 게 뭐가 있어요. 깨지면 깨지는 거고, 그러면 또 비슷한 걸 새로 사서 달아 놓는 거지. 장식을 훔쳐 가는 사람도 태반입니다.}

{그래도 이건 시에서 관리하는 거 아닙니까?}

{관리는 무슨. 저기, 밀레니엄파크의 트리는 아무래도 관리를 엄격히 하는데, 이건 그냥 곁들이라고 보면 될 거요. 딱히 값나가는 것들도 아니고.}

해체 작업을 한참 바라보던 태서는 제 근처에 떨어진 오너먼트를 주워 들었다. 손가락 크기 정도나 될까. 산타처럼 붉은 옷을 입은 곰 인형이었다.


{맘에 들면 가져요.}

{그래도 됩니까?}

{여기, 이거랑 짝이 맞겠네.}

인부가 내민 것은 초록색의 산타 엘프 복장을 한 곰 인형이었다. 태서는 얼떨결에 작은 인형 두 개를 들게 되었다.


{시카고 사람 아니죠?}

{네.}

{기념은 될 거요.}

{감사합니다.}

인형 두 개를 코트 주머니에 넣고 뒤돌아서려던 태서가 다시 인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 트리 관리자랑 통화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뭐 하시려고?}

{여러모로 좋은 일이죠.}

아직 트리 꼭대기에 달린 별을 바라보는 태서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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