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금쪽같은 내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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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금쪽같은 내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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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금쪽같은 내 새끼
2022.11.01.
“조 회장 마음 압니다. 아이들 나이도 다 찼고, 약혼 기간도 너무 길었지요. 딸 가진 부모 마음 모르지 않아요.”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훈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차를 입에 머금었다. 연붉은색의 맑은 찻물이 쪼르륵, 임홍진 여사의 찻잔에 재차 담겼다.
“하지만 아이들 일은 저들에게 맡겨야지. 한두 살 애도 아니고, 가정을 꾸리는 일인데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요.”
“……예, 그렇죠.”
“그러니 조바심 내지 말고 기다려 봅시다. 우리 태서, 가정 이뤄서 잘 사는 모습을 누구보다도 보고 싶은 사람이오, 내가.”
쉽게 입을 떼지 못하는 조대훈의 시선이 찻잔을 향하는 임홍진 여사의 손길에 머물러 있었다. 강선 그룹에서 제일 큰 어르신이고, 이 결혼에 가장 큰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 여기고 만남을 청했다.
그런데 어째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그렇다고 해서 어르신의 말씀에 토를 다는 것은 대훈으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듣자 허니 요즘 현양 건설이 큰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던데.”
“아, 예.”
현양 건설이 화미 아파트와 그 일대 재건축 및 재개발 사업의 입찰권을 따내기 위해 힘을 쓴다는 건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다.
“하필이면 서로 경쟁하는 처지가 되어서, 조 회장 마음도 편치 않겠어요. 어쩌겠습니까. 사업하다가 보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지요.”
“……예.”
강선 건설은 현양 건설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화미 아파트의 재건축 조합에서 가장 원하는 건설사는 국내 아파트 브랜드 선호도 1위를 몇 년째 수성하고 있는 강선 건설이었다.
강선 건설을 견제하고 그쪽으로 기울어진 조합원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뿌려 댄 돈이 얼마였나. 현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대출과 투자를 받아 내느라 또 현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건축 자재 납품 업체와 재계약을 맺으며 온갖 약점을 빌미 삼아 가격을 후려쳐서 지출을 줄였다. 소규모 건설 현장으로 들어갈 자재와 인력을 아꼈다.
최근에 인심이 후해진 은행과 투자를 제안해 오는 곳을 통해서는 현금을 모았다. 심지어 해외로 빼돌렸던 비자금까지 긁어 쓰며 사활을 건 상황이었다.
“그 부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예.”
입찰 업체 선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담당 공무원들과 조합원장들이야 진작에 구워삶아 놓았으니 이대로라면 원하던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여전히 불안한 것은 중론이 강선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더 방심할 수 없었다. 오늘 오전에도 그 지역 상가 조합원장을 만나 적지 않은 돈을 떠안겨 주고 온 길이었다.
“저는 그저, 곧 가족이 될 텐데요. 결혼 당사자 간에 서로 얼굴도 익혔으니 친해질 겸, 서로 집에도 오가며 인사하고 밥도 먹고 그러면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흠…….”
“세간에서는 정략결혼이다 뭐다 말이 많다지만, 어디 그렇습니까. 돌아가신 두 분께서 서로를 향한 믿음으로 아이들의 미래를 약속하신 것을요. 관장님도 아시다시피, 저희는 이해득실 따지며 맺는 혼맥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
“자식으로는 딸 하나뿐이어서, 저는 태서 군을 아들로 생각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태서 군과 술잔을 기울일 날이 자꾸만 기대되어서요. 그런데 아무래도 많이 바쁘겠지요.”
대훈이 웃으며 조심스럽게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직접 찾아와 살갑게 굴며 말이라도 건네주면 좋으련만, 사위가 될 강태서는 쉽지 않았다.
그는 아직껏 사위가 될 태서와 단둘이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지난번 어느 모임에서 보았을 때는 멀리서 눈인사만 해 왔는데, 그 거만함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곁에서 제 딸이 똑같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을 걸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 사위를 등에 업으면 저 역시 어디 가서 고개 숙일 일은 없을 터다.
“그러니 관장님께서도 우리 유리를 손녀다, 생각하시고 평소에도 불러서 이것저것 가르치시면…….”
“조 회장.”
“예.”
“나는 결혼도 하기 전에 손부 될 사람 미리 오라 가라 할 생각이 없습니다.”
“……예?”
임홍진 관장의 차분한 선 긋기에 대훈이 찬물을 맞은 듯 눈을 껌뻑였다.
“저들끼리 잘 살면 그만이지, 늙은이 비위 맞춰 뭘 합니까.”
“아, 예……. 그렇지요.”
“그리고. 결혼하고도 헤어지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다 마신 차를 내려놓은 임홍진 관장이 대훈을 응시했다. 예의상 보여 주던 온화한 미소를 싹 걷어 낸 표정은 나이 예순이 넘은 대훈마저 얼어붙을 정도로 엄하고 냉철해 보였다.
“결혼도 전에 가족이니 뭐니 하는 것은 아무래도.”
뒷말을 생략한 임홍진 관장이 그제야 엷게 미소 지었다.
“아, 예, 예.”
“얼마 전에 유리 양이 아트 센터에 찾아왔더군요.”
몰랐던 사실에 대훈이 반색하며 고개 끄덕였다. 사실 대훈은 제 엄마 치마폭에서 곱게만 자란 딸아이가 콧대만 높일까 걱정했다. 그래서 아내에게 딸아이 결혼 앞두고 잘 가르치라고 몇 번인가 잔소리도 해 댔다.
한 번은 날을 잡아 유리를 세워 두고 도도하게 구는 것도 상대를 봐 가며 해야 한다고 가르치려 했다. 그런데, 저도 시댁에 예쁘게 보이고 싶기는 한 모양이다. 그 생각을 하니 흐뭇했다.
“그랬군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라 제대로 인사드리는 게 늦었습니다. 아직 가르칠 것이 많은 아이인데, 결례를 범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유리 양이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고요.”
안경 너머로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에 담긴 비아냥을, 웃으며 찻잔을 향해 손을 뻗은 대훈은 읽지 못했다.
“예. 제 엄마가 곱게만 키워서 마음도 여리고 무른 구석이 있습니다. 오래도록 태서 군만 바라본 아이입니다. 결혼 얘기 오가니 마음이 많이 들뜬 모양인데, 모쪼록 예뻐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르신. 아비로서,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립니다.”
자애로운 아비의 미소를 지은 대훈이 깨끗하게 비운 찻잔을 내려놓았다. 결혼에 관한 진척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다 했으니 이제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었다.
“그렇게 곱게 키운 유리 양 결혼시킬 생각에 조 회장 마음이 좋지 않겠어요.”
“예, 섭섭하기는 하지만, 딸아이가 결혼한다고 해서 연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더 큰 인연을 만나 가족을 이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태서 군에게도 든든한 장인이 되어 주고 싶고요.”
대훈이 끝까지 인연과 가족을 강조하며 임홍진 관장의 표정을 살폈지만, 평생을 재계에 몸담아 온 그녀의 속내는 끝끝내 읽을 수 없었다.
“바쁜 와중에 예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는데, 늙은이가 드릴 건 차뿐입니다. 이해해 주세요.”
“아닙니다. 덕분에 이렇게 좋은 시간 보내며 마음의 여유를 갖습니다. 그림도 보고 인사도 드릴 겸, 집사람과 딸아이에게도 종종 들르라 해도 될는지요. 부담 갖지 마십시오.”
“요즘 사람들 그런 거 불편해합니다. 그런 건 나중에, 가족이 된 후에 해도 늦지 않아요. 나도 나이가 들어 마냥 이 자리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니니.”
묘하게 거절로 느껴지는 배려였다. 눈을 가늘게 뜬 대훈은 평소와 같이 고아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는 임홍진 여사와 눈을 마주치고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뭔지 모를 껄끄러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잘난 강선 그룹을 상대하기 때문이라 여긴 대훈의 날카로운 눈빛이 금세 부드러워졌다.
* * *
머리를 싸매고 있던 광순이 일어나 앉았다. 이부자리 옆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마셨지만 속이 풀리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아들의 표정이 좋지 않아 금쪽같은 내 새끼에게 무슨 일이 있나 관심을 기울이던 차였다. 그러다 오늘 아침, 석동을 깨우려던 광순은 문 너머에서 아들이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설마 또 그 요가인지 요괴인지 하는 불여시 때문에 우는가 싶어 한숨이 절로 났다. 그
런데 이른 아침부터 전화가 왔다. 스팸 전화겠거니 하고 넘겼는데, 요즘 들어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가 잦았다는 생각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콩팥 은행 대출과에서 연락드렸습니다.
“어디요?”
―당신의 콩팥, 모두의 기쁨, 콩팥 은행 대출과입니다. 남광순 고객님이 맞으십니까?
직원이 노래하듯 낭랑하게 읊어 주는 은행 이름은 광순이 태어나 처음 들어 보는 곳이었다.
광순은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아침에 전화해서 헛소리해 대는 여자를 향해 욕을 퍼붓고 싶은 것을 참았다. 교양 있게 혀를 차며 웃기지도 않은 전화를 무시하려 했다.
“내가 남광순이기는 한데, 나는 그런 은행이랑은 거래 안 해요.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죄송합니다만 저희 쪽에 남광순 고객님께서 대출받으신 이력이…….
“이것 봐요! 보이스 피싱, 뭐 그런 건가 본데! 장난질도 상대 봐 가면서 쳐야지! 내가 그런 거에 혹해서 넘어갈 사람으로 보여요? 어디 아침부터 전화해서 못 배운 것들이나 넘어갈 소리를 하고 있어.”
―고객님, 진정하시구요. 저는 마지막으로 안내해 드릴 것이 있어서 연락드린 겁니다. 만약 원치 않으신다면 이후 발생하는 추심 행위에 대해…….
“뭐, 추심? 당신들, 콩밥 한번 먹어 봐야지, 어? 우리 아들이 강남에서 잘나가는 치과 원장이야! 내가 강남에 빌딩도 세운 사람인데, 추시임? 얻다 대고! 얻다 대고 사기를 치려고!”
“고객님, 저희는 고지 의무가 있습니다. 이미 우편으로 여러 번 보내 드렸지만…….”
상대가 뭐라 떠들든 시답잖은 통화를 끝내려는 광순의 귀에 기계음처럼 빠르고 무성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출 원금 오백만 원에 대한 이번 달 이자를 연체하신 부분, 저희는 분명히 안내해 드렸습니다. 이미 한 차례 연체 기록이 있는 개인 고객님의 경우에는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지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러니 지금과 같은 전화 받으시는 게 불편하시다면 원금과 이자를 상환해 주시기 바랍니다.
“뭐라는 거야.”
찡그리며 통화를 끝냈지만, 어딘가 찝찝했다. 그래서 아들을 살살 어르고 달랜 끝에 아들이 광순의 핸드폰으로 몰래 모바일 대출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석동은 코를 훌쩍이며 제가 가지고 있던 돈에 대출받은 돈을 보태서 주식과 코인에 손을 댔노라 실토했다.
대학 동창을 통해 얻은 정보를 믿고 투자하여 처음에는 재미를 좀 봤지만, 결국에는 손해를 봤노라 고백했다.
“아들, 괜찮아. 말해 봐. 얼마라구?”
“……오.”
“오백?”
그때까지만 해도 눈을 내리깔고 제 눈치를 보는 석동을 바라보는 광순의 표정은 자애로웠다. 여린 마음에 잃은 돈이 아까워 몇 날 며칠을 고생했을 아들이 딱하기만 했다.
“남자가 사회생활 하다 보면 그 정도 돈은 쓸 수도 있지. 누구 집 아들은 술 한 번 사 마시는 데 몇백씩 쓴다더라. 괜찮아. 응?”
“흑, 흐윽, 엄마…….”
“걱정하지 마. 엄마가 다 메꿔 줄게. 날린 돈이 얼만데 그래. 오백만 원이면 돼? 그 돈만 갚으면 되는 거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에게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했더니 이렇게 되고 말았다. 곱게 자라 세상 물정 모르는 아들도 이번 기회에 돈 무서운 줄 알았을 터다.
그러니 그까짓 오백만 원, 좋은 경험 했다고 치고 처음부터 없던 돈으로 여기면 그만이다.
그렇게 여긴 광순이 아들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런데 석동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