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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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내 사람
2022.10.28.
<일어났습니까? 새벽부터 쏟아지는 비가 멈출 생각을 안 하네요.>
<이불 밖으로 코도 내놓기 싫은 걸 이겨 내고 출근하는 중입니다. 나갈 때 꼭 우산 챙겨요.>
<바람이 찹니다. 옷 따뜻하게 입어요.>
태서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는 재인의 손이 축축했다.
“후…….”
재인이 한숨과 함께 커튼을 걷었다. 겨울비에 물든 도시가 짙은 회색빛으로 젖어 있었다. 희뿌연 하늘과 바람에 나부끼는 가로수. 창밖의 풍경은 8년 전 사고가 났던 그날과 닮아 있었다.
재인은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따뜻한 물을 마셨다. 욱신거리는 왼쪽 발목을 내려다보다가 결국 한 손으로 꾹꾹 주물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였다.
또 그 꿈이었다.
정재훈이 재인을 납치하고 같이 죽자며 사고를 낸 것은 7월 한여름이었다. 그런데 공포감에 짓눌려 있던 탓일까. 아니면 구조될 때까지 계속 틀어져 있던 에어컨 바람 탓일까.
재인은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계절이면 비가 오는 날마다 사고 당시의 꿈을 꿨다. 비 예보가 없는 날에도 그 꿈에 시달리다가 깨어 보면 어김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나 정확한 일기 예보가 또 없지.”
아직 불안정한 호흡을 달래며 재인은 다시 핸드폰의 화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태서와 만났던 토요일 이후 월요일 오늘 아침까지, 그에게서 온 메시지를 다시 읽어 보았다.
“편안한 밤이기를 바랍니다. 나도 그럴게요.”
그가 어젯밤 보내온 메시지를 저도 모르게 따라 읽고 말았다.
재인은 그의 당부와는 다르게 편안한 밤을 보내지 못했다. 피식, 씁쓸한 웃음이 샜다. 재인은 그 남자만이라도 부디 편안한 밤을 보냈기를 바랐다.
잠깐 고민하던 재인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어느덧 떨림은 잦아든 뒤였다.
<우산 꼭 챙길게요. 태서 씨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짧은 메시지를 보낸 뒤에도 재인의 시선은 그와 메시지를 주고받은 화면에 머물러 있었다.
강태서는 좋은 사람이었다. 근사한 외모는 둘째 치더라도, 재치 있는 입담이 좋았고 생각보다 털털한 성격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재인을 대하는 그의 행동과 말에서 배려와 존중이 느껴졌다.
고작 세 번 만났다. 밥 두 번 같이 먹었을 뿐이다. 하지만 재인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보여 준 모습이 억지로 꾸며 낸 것이 아님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일까. 재인은 태서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처음의 계획을 부정하고 싶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벌써부터 그를 이용하는 자신이 싫어졌다.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강태서와 연애를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만약 제가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음을 고백한다면 화내지 않을까? 뭐 하러 그 사람을 이용하려 했을까. 그렇게 접근하지 말걸. 그 사람과 이런 식으로 만나지 말걸.
“차라리 나쁜 남자였으면 좋았잖아요.”
중얼거린 재인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망설임이 길어지는 것은, 후회가 생기는 것은 강태서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를 탓할 게 아니라 자신을 탓해야 했다. 자신의 못남을, 이기심을 탓해야 했다.
재인은 어느새 습관대로 핸드폰의 사진첩을 열어 엄마 사진을 매만지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머릿속에서 악몽은 사라졌다. 오직 강태서, 그 남자만이 재인을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 * *
“말씀하신 대로 주안 엔터테인먼트 리셉션에 사람을 넣었습니다. 오늘부터 바로 출근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재훈 대표에게도…….”
“대표는 무슨. 그 새끼라고 하세요. 개를 붙여 욕하자니 개에게 미안할 지경입니다.”
보고서를 통해 8년 전 사고의 진실을 알게 된 태서는 지난밤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듯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호칭을 정정해 주는 그의 날카로운 눈매에 피곤함이 조금 묻어났다.
“……그 새끼에게 어제저녁부터 사람을 붙였습니다. 아직은 특이 사항 없습니다.”
“만나는 인간, 동선 모두 빼놓지 말고 살피라고 하세요.”
“네. 살펴보다가 이상한 점이 있으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비서 쪽은 알아보는 중입니다.”
“부탁합니다.”
개인적인 부탁이 늘고 있었지만, 장 실장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강태서는 그의 말처럼 칭찬과 격려, 위로를 말로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제 개인 통장에 새겨지는 숫자를 통해 그의 칭찬과 격려, 위로를 이미 여러 번 체험했다. 그때마다 힘이 나고 충성심이 솟아난 것은 당연했다.
오전에 확인해야 할 서류에 전자 서명을 마친 태서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오늘부터 태서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본부장님. 윤재인 씨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윤재인 씨에게 사람을 붙이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아니죠. 능력 없는 놈들이나 제 여자 속박하는 겁니다.”
“…….”
이제는 아예 제 여자란다. 장 실장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짧은 시간 안에 그렇게나 푹 빠질 수 있는 건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선을 아는 그녀였기에 근질거리는 입에 힘을 주었다.
“얼마나 쉽습니까. 여자 주변에만 사람 몇 명 붙여 놓으면 되니까. 하지만 좋게 말해 보호지, 감시나 다름없습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재인 씨는 하고 싶은 걸 하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 자유를 침해당해야 한다면, 그건 피해자인 윤재인이 아니라 가해자인 정재훈 그 개……, 아니지, 그 또라이 새끼. 아, 그 새끼한테는 무슨 욕을 가져다 붙여도 부족한데?”
새로운 욕을 떠올리려는 태서의 노력 앞에 장 실장이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한 태서가 욕할 때마다 입에 짝짝 붙게 잘한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굳이 욕을 가르쳐 줄 필요는 없었다.
“아무튼, 죄를 지은 놈이 두 다리 못 뻗고 사는 게 맞습니다. 그게 정의 아닙니까? 내가 윤재인의 곁에 사람을 붙이게 된다면 그건 그 사람이 원할 때, 혹은 동의를 얻고 난 뒤에나 가능할 겁니다. 그것도 말 그대로, 위험을 대비한 경호원일 거고.”
“네.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나가려던 장 실장이 태서를 향해 다시 고개 들었다.
“사람이 몇 명 더 필요합니다. 노련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시간 좀 걸리더라도 찾아봐 주세요. 최대한 빨리.”
“어떤 업무로…….”
“조대훈 회장 쪽에 붙여요.”
“……네?”
“아트 센터에 왔던 날 이후로 소문났을 겁니다. 어쩌면 이미 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겠군요. 지금에서야 그 생각이 났습니다. 벌써 사흘이나 지났는데, 내 실수입니다.”
강선 아트 센터에서 있었던 자선 행사가 지난주 금요일이었다. 장 실장은 뒤늦게 윤재인이 조대훈 모르게 한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윤재인은 자신이 한국에 와 있다는 걸 조대훈 쪽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나 때문에 용기 내 그 자리에 와 준 거니까요. 그러면 최소한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손은 써 놔야죠.”
“그게 본부장님 때문이라기보다는…….”
“나 때문입니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로 하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그 목적을 위해 본부장님을 이용하려던 게 아니었을까요. 장 실장의 생각을 짐작했는지 태서가 재빠르게 뒷말을 막았다.
그렇다는 것은 강태서 역시 그 가능성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모든 것을 보고, 알고 있으면서도 태연하다. 장 실장은 그의 자신감에 행운을 빌어 주며 돌아서려 했다.
“그리고, 강선 건설은 화미 아파트 재건축 및 근처 강남 일대 재개발 입찰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에 장 실장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었다. 화미 아파트 재건축을 위해 강선 건설이 뛰어온 세월은 짧지 않았다. 강신재 회장의 염원이 서린 일이기도 했다.
입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현양 건설이 아무리 돈을 풀고 있다고 한들, 절대로 강선 건설이 뒤처지는 판국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본부장인 태서가 그것을 모두 백지화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올 상반기, 강선 건설은 성하 신도시 개발에 집중할 겁니다. 조만간 각 팀에 공지 띄우겠습니다. 그 전까지는 장 실장만 알고 있어요. 아, 질문받지 않는다고도 덧붙여야겠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화미 아파트 재건축 입찰을 따내는 것은 회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현장 상황 모르면서 내린 지시입니다. 말은 쉽죠. 하지만 아닌 건 아닙니다. 현양 건설처럼 돈 뿌려 가며 할 바에는 안 하는 게 낫습니다.”
“그래도…….”
“화미 아파트는 현양 건설에 줍시다. 나는 적극적으로 밀어줄 생각입니다.”
탄탄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업계 1위를 수성하고 있는 강선 건설이었다. 만약 현금 쏟아붓는 것으로 현양 건설과 대결을 한다면 현양 건설은 얼마 안 가 백기를 들 수밖에 없다.
그것을 아는 장 실장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재개발 입찰 경쟁에서 손을 떼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다니. 장 실장이 태서의 결정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입을 달싹일 때였다.
“화미 아파트는 현양 건설 주고, 나는 현양 건설을 먹어야겠습니다.”
“……네?”
장 실장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선 건설 본부장 사무실 안에 이야기를 엿들을 사람은 없겠지만, 너무나 놀란 나머지 현실을 자각하고자 한 것이다.
“왜 갑자기 현양 건설을…….”
“글쎄요.”
너른 가슴을 당당하게 편 태서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피식, 웃었다. 약간은 불량해 보이는 그 미소가 이상하게 섹시하게 느껴진 탓에 장 실장의 가슴이 조금 뛰었다.
강태서의 잘남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 근사하게 빛나는 남자의 새로운 매력 포인트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장 실장이 요즘 누리는 복지 중 하나였다.
“조금 괘씸하잖아요.”
태서가 빙글빙글 웃으며 통유리창 저 먼 곳을 응시했다. <요가 만다라>가 있을 방향에서, 더 나아가면 재인의 집이 있을 방향이기도 했다.
“현금을 뿌려 가며 상도덕을 어긴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본주의 사회인데 그게 왜 문제가 됩니까. 돈지랄도 능력입니다. 자기가 돈 뿌리고 싶으면 뿌리는 거지.”
“그러면…….”
“내 약혼자를 바꿔치기한 것도 모자라서 멀쩡한 딸을 고아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내 사람 건드리는 꼴, 나는 못 봅니다.”
“아…….”
결국은 윤재인이었다. 요즘 들어 기승전윤재인이 된 태서의 일상에 겨우 익숙해지나 했는데, 그 끝이 한 회사의 존망을 향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어디 멀쩡하기만 합니까. 사람을 이렇게나 쥐락펴락하는데.”
말끝에 씨익 웃어 보인 남자는 여러모로 심장에 해로웠다. 잘생긴 것도 그렇지만, 자꾸 이렇게 놀랄 만한 말을 한다. 문제는 그게 허풍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현양 건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지만, 그 회사를 꿀꺽하겠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금력과 냉철함, 그리고 정보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쉽게 해낼 듯이 말하는 강태서에게서는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조용히, 비밀리에 진행될 겁니다. 강선 건설과는 상관없이 내 사람들이 할 거예요.”
“……네.”
거만하게 느껴질 만큼 당당한 자신감으로부터 위압감을 느낀 장 실장이 저도 모르게 큰 숨을 내쉬었다.
겨우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인제 그만 나가 보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또다시 숨통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 본부장님, 무슨…….”
조금 전까지 세상 한량처럼 웃고 있던 남자는 어디 가고, 맹수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그런데 장 실장, 내 사람 맞습니까?”
느른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장 실장을 올려다보는 태서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속내까지 꿰뚫어 볼 듯이 날카로운 눈빛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목 주변을 매만졌다.
대답에 따라서 덜컥, 맹수가 제 목덜미를 노리고 덤벼들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