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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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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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조금만 더
2022.10.25.
태서는 때를 노릴 줄 아는 사냥꾼이었고, 사냥감이 덫에 걸려드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를 알았다. 그리고 이제는 윤재인 한정, 인내하며 참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보상이 얼마나 달콤할지를 상상하면서.
―무슨 꿍꿍이인 게야.
“말씀드렸잖아요. 곱게 데려오려고 그럽니다.”
―데려오기는 하는 게야?
“마음 얻는 게 먼저라고 하셨잖아요.”
태서는 예정된 노크에 문 쪽을 향해 고개 돌렸다. 태서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장 실장이 들고 온 서류는 그가 오전 내내 기다리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 주세요.”
―오냐. 끊으마.
임홍진 여사와의 전화를 끊은 태서가 꽤 두꺼운 파일을 들었다. 후,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내용이 많았다.
“본부장님. 이번에는 생색 좀 내야겠습니다. 저, 애 좀 먹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위로든 치하든, 제가 말로만 하는 타입 아닌 거 아시죠.”
“감사합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기대 충족시켜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30분. 전화 연결하지 마세요.”
보고서에 집중하겠다는 뜻이 담긴 말에 장 실장이 고개를 숙였다. 팔랑팔랑 종이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태서의 사무실을 나서려던 그때.
“하!”
짧게 내뱉은 한숨 끝에 짧고도 강렬한 욕이 따라붙었다. 장 실장이 문을 닫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재훈, 이 빌어 처먹을 개애새X가.”
날것 그대로의 욕설이 이어졌다. 장 실장이 서둘러 문을 닫았다. 보고서를 준비하며 느꼈던 것을 그대로 읊어 주는 태서를 통해 장 실장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녀의 상사는 바른말만 하는 사람이었다.
* * *
잔뜩 흐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만 같았다. 가득한 먹구름에 연보랏빛으로 물든 밤하늘을 바라보던 재인이 커튼을 치고 누웠다. 눈을 감고 뒤척여 봤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음…….”
이런 날이면 자꾸 왼쪽 다리를 매만지게 된다. 복숭아뼈 위쪽으로 손가락 하나 길이만큼 남은 흉터는 8년 전 교통사고로 인한 골절 수술의 결과였다.
다른 곳보다 조금 더 예민한 부위를 조심스럽게 매만질수록 눈동자는 깊이 침잠했다. 한숨 끝에 손가락 끝이 차가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잠들 수 있을까. 수면 유도제는 먹고 싶지 않은데.
고민하던 재인이 일어나 캐모마일 티백에 물을 붓던 때였다. 연이어 짧게 울리는 진동에 고개 돌리니 침대 위에 놓인 핸드폰 화면이 밝아져 있었다.
<새벽부터 비가 꽤 쏟아질 거라고 하던데, 내일 출근할 때 우산 꼭 챙겨요.>
<밤늦게 미안합니다. 편안한 밤이기를 바랍니다. 나도 그럴게요.>
태서였다. 일이 밀린 탓에 일요일인데도 출근했다가 조금 전에 집에 들어갔다더니, 이제야 잘 준비를 마친 모양이다.
반가운 마음에 깨어 있었다고, 괜찮다고 답을 하려 핸드폰 잠금을 해제하던 재인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다정한 온기가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재인은 지금 저를 감싼 우울감을, 불안과 공포를 태서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고단했을 그의 하루가 무탈하게 끝나기를 바랐다.
어두운 감정은 옮겨 가기 쉬운 법이니까. 고개를 가로저은 재인이 핸드폰을 엎어 두었다. 마음을 놓아 버리면 속수무책으로 강태서라는 사람에게 의지하게 될 것만 같다.
재인은 조금 뜨겁게 느껴지는 머그잔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차를 몇 모금 마셨다.
이불을 덮고 다리를 감싸 쥐곤 비스듬히 누워 몸을 웅크렸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재인의 시선은 은은하게 빛나는 수면등에 고정되어 있었다.
점멸하던 시야가 마침내 새까맣게 물들 무렵, 쏴아,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 * *
“다른 놈들이 널 어떻게 보는지 알아?”
재인은 옆에서 정재훈이 뭐라고 떠들든 말든, 잠긴 조수석의 문을 열기 위해 애썼다. 아무리 노력해도 차 문은 끄떡없었다.
“재인아, 나는 달라. 나는 네가 고아든 아니든 널 존중해. 계속 그래 왔잖아. 알지?”
존중한다면서 한다는 짓이 납치다. 재인이 입술을 짓씹으며 달리는 차 안에서 나갈 방도를 모색했다. 하지만 문이 두 개뿐인 로드스터에서 눈 벌게진 운전자를 피해 탈출할 방법은 없었다.
“항상 너한테만큼은 진심이었어. 내가 널 지켜본 게 벌써 4년이야. 재인아, 이제는 받아들여 줘.”
끼익, 소리와 함께 차가 멈췄다. 이미 서울에서 한참 벗어난 후였다.
컴컴해진 주변에 그나마 보이는 것은 논과 밭, 산뿐이었다. 재인은 낯선 주변 환경을 살피며 오면서 보았던 이정표를 떠올렸다. 양평 쪽 어딘가였다.
지승희가 들고 다니라며 건넨 핸드폰에 위치 추적 기능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운이 좋다면 누군가 찾으러 올 것이다. 지승희의 감시가 불편하지만, 그래도 눈 돌아가기 직전인 정재훈보다는 나았다.
“다른 새끼들이 널 볼 때마다 내 마음이 어떤지 너는 몰라. 온갖 사내놈들이 죄다 널 벗겨 먹으려고 하는 거, 너도 끔찍하잖아. 그러니까 재인아.”
“……돌아가. 없던 일로 해 줄게.”
“재인아. 다른 말 하지 말고 알겠다고만 해.”
말이 통하지 않는 정재훈을 바라보던 재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있는 힘껏 그를 밀치고 핸들 옆의 문 개폐 조작 버튼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는 두 팔 벌려 재인을 안아 제 품에 가두고는 큰 숨을 들이켰다.
“이거 놔, 놓으라고! 이 미친놈아!”
“재인아. 나밖에 없어. 널 마음 다해 사랑하는 사람은 나뿐이야. 내가 널 세상으로부터 지켜 줄게. 그러니까, 고개만 끄덕여. 응? 지금 당장 나 사랑해 달라는 거 아니야. 내 곁에서 내가 널 사랑하는 것만 알아 달라는 것뿐이야.”
그딴 게 사랑이라면 안 하고 만다. 재인은 차분한 척 자신을 설득하려 하는 정재훈이 끔찍했다.
그는 늘 적당한 거리에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함부로 말도 걸지도 않았고, 시선이라도 마주칠 때면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안심했다. 게다가 연습이 끝난 후 피곤함에 지쳐 기사의 얼굴을 확인하지도 않고 차에 탄 것이 화근이었다.
지승희는 재인이 외부인과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다.
그래서 재인은 외출할 때면 늘 지승희가 붙여 놓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야 했다. 재훈이 운전기사를 매수해서 저를 납치할 계획을 세웠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네가 다른 놈들이랑 뭐가 달라, 너도 똑같아! 내가 싫다는데도 이러잖아!”
“지승희 이사장이 너를 어디다 팔아넘기려는 줄 알아? 재인아, 시간이 없어. 날 받아들여. 내가 잘할게.”
재인은 저를 설득하려는 정재훈을 퍽, 밀치고 몸을 돌려 앉았다.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러 댔다. 아쉬운 대로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 손에 쥐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정재훈의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안 들려? 내려 달라고!”
악을 쓰며 그를 밀치는데 재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재인을 놔주었다. 다시 몸을 돌려 문을 열기 위해 애쓰던 재인은 제 뒤에서 들려오는 선득한 목소리에 그대로 굳고 말았다.
“재인아. 난 널 해치고 싶지 않아.”
“……뭐?”
섬찟한 기운에 재인의 고개가 천천히 재훈을 향했다. 광기에 사로잡힌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 방법만큼은 쓰지 않게 해 줘.”
어이없게도 슬픈 표정을 한 재훈이 긴 한숨을 내었다. 운전석 문 아래쪽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마치 그곳에 날뛰는 재인을 잠재울 수 있는 위험한 것을 준비해 놨다는 듯이.
“도착할 때까지 푹 자지 그랬어.”
“…….”
“그랬으면 너도, 나도 좋았잖아.”
재인은 축축해지는 손으로 벨트를 붙잡은 채 정재훈을 응시했다. 미친 게 분명했다.
미친놈을 상대로 발악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재인은 깨달았다. 지금은 일단 정재훈의 기분을 맞춰 주고 때를 기다려야 했다.
“얌전히 있을 거지?”
천천히 고개 끄덕이는 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훈의 눈이 번들거렸다.
“약속해.”
재인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착해. 네가 착하게 굴면 나도 부드럽게 대해 줄 거야. 너 아픈 건 나도 싫어. 재인아, 오늘 밤은 나에게도 특별해.”
미친 소리를 지껄인 재훈이 기어를 바꿨다. 재인은 그 모습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공포심에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을 알아챈 재훈이 음악의 볼륨을 높였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제1 악장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유려하게 흘러가는 피아노 소리에 맞춰 재인의 심장이 재빠르게 뛰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와중에도 시선은 재훈의 너머, 운전석 문 아래쪽에 머물렀다.
“이제 다 와 가. 이 산만 내려가면 돼. 예쁘게 꾸며 놨거든? 기대해.”
아까는 그래도 드문드문 집이 보였는데 이제는 집도 잘 보이지 않았다. 구불구불 이어진 오르막길이 어느 순간부터 완만해지더니 이내 가파른 내리막길로 이어졌다.
음악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신경을 긁는 피아노 선율에 점점 숨이 가빠졌다. 전방에 급커브를 알리는 표지판을 확인한 재훈이 슬쩍 브레이크를 밟을 때였다.
“재인아! 이거 놔! 위험해!”
재인이 이를 악물고 핸들에서 재훈의 손을 떼려 했다. 둘의 실랑이가 계속되는 사이 끼익, 끼이익,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와 함께 도로 곳곳에 타이어 밀린 자국이 남았다.
몸싸움을 벌이는 사이, 그의 머리칼은 엉망으로 흐트러졌고, 얼굴과 목 곳곳은 재인에게 긁혀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으로 핸들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차라리 같이 죽자.”
“…….”
“네가 날 원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자. 다른 새끼들이 널 눈에 담는 거, 더는 보기 싫어. 같이 죽으면 영원히 함께할 수 있겠지.”
“……차 세워.”
“아니.”
부르릉, 성능 좋은 로드스터의 엔진음이 낮은 짐승의 위협처럼 느껴졌다.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창밖의 어둠이 휙휙, 밀려났다. 재인이 숨을 몰아쉬며 소리 질렀다.
“멈추라고!”
“아니.”
무섭도록 차분하기만 한 재훈이 힘껏 액셀을 밟았다. 부웅, 소리와 함께 몸이 앞으로 쏠리는 순간.
“사랑해, 윤재인.”
재인을 바라보며 웃는 재훈이 핸들을 놓았다. 그의 두 손이 재인을 향했다. 재인이 최대한 그에게서 멀어지려 바닥을 짚은 발에 힘을 주고 다리를 쭉 뻗었을 때였다.
쾅.
벼락이라도 떨어진 듯한 굉음과 함께 몸 전체가 위로 솟구치며 반쯤 접혔다. 퍽, 하고 어깨와 머리가 차창에 마구잡이로 부딪혔다.
온몸을 강타하는 충격 속에서 시야가 빙글빙글 돌고 세상이 몇 번이나 뒤집히기를 반복하는 동안 재인은 안전벨트만을 붙든 채 버텼다.
“으으…….”
겨우 눈을 떴을 때 곳곳에서 터져 나온 에어백 사이로 피투성이가 되어 눈 감은 채 신음하는 재훈이 보였다. 재인은 지금이야말로 그에게서 도망칠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온몸이 무거웠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눈앞이 흐려지는 가운데 왼쪽 다리에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제 다리가 찌그러진 차체에 끼어 있음을 깨닫자마자 사방이 어두워졌다.
그녀를 에워싼 것은 빛 하나 없이 시커먼 공포였다.
어둠이 그녀를 삼키고 소리마저 잡아먹었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몰려든 추위에 덜덜 떠는 재인이 부를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엄마…….”
다리를 짓누르는 무게와 아픔 때문에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재인이 흐느끼며 도움을 청하려 눈만 굴리던 그때.
드륵, 드르륵, 드르르륵.
어딘가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재인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온 힘을 다해 팔을 뻗었다.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 가까이 다가가고자 아픈 다리에도 힘을 주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까스로 손끝에 닿은 그것이 핸드폰임을 인지한 순간, 재인이 눈을 떴다.
퍼붓는 빗소리, 손에 쥔 핸드폰, 낯익은 천장.
태서에게서 온 메시지에 현실로 돌아온 재인이 가까스로 숨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