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개판 (33/123)


#33. 개판
2022.10.21.



16663348118206.jpg

“유리야, 일어났니? 그만 내려와. 점심은 먹어야지.”

문밖에서 저를 부르는 엄마 승희의 말을 무시한 유리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였다. 이불 아래 핏발 선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밤새도록 화를 삭이지 못해 씰룩이는 입술과 뺨 역시 퉁퉁 부은 채였다.

태어나 예쁨만 받고 자랐다. 어딜 가나 현양 건설의 어여쁜 외동딸이라며 치켜세워 주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강태서랑 관련된 사람들만 만나면 제 꼴이 우스워지는지.

아무리 강태서가 잘난 남자여도 그렇지. 아무리 강선 그룹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제저녁을 떠올리니 또다시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16663348118213.jpg

“안녕하셨어요, 할머님. 진작 찾아뵀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자주 찾아뵐게요. 저, 할머님이랑 따뜻한 차 한잔 마시러 왔어요.”

 
곱게 미소 지으며 건넨 첫인사였다. 하지만 책상에 앉은 임홍진 여사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당황하여 서 있는데 문이 열렸다. 비서가 들고 온 것은 1인용 다기 세트였다.


16663348118217.jpg

“관장님, 말씀하신 꿀 생강차입니다.”

16663348118217.jpg

“응, 그래. 저 사람도 차 한 잔 줘야지.”

16663348118217.jpg

“네. 차는 뭐로 하시겠습니까?”

 
차를 권하면서도 임홍진 관장의 시선은 여전히 서류를 향한 채였다. 유리는 비서를 향해 같은 걸로 달라 말했다. 비서가 나간 후에도 얼마나 서 있었을까.

달깍, 소리를 내며 펜을 내려놓은 임홍진 관장이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이 나붓하게 접혀 있었다.


16663348118217.jpg

“앉아요. 나한테 줄 게 있다고?”

16663348118213.jpg

“네.”

 
저를 향해 미소 지어 보이는 임홍진 관장을 마주하고 나서야 두 다리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유리는 생긋 웃으며 임홍진 관장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정한 모습이었다. 곱게 올린 흰 머리카락은 세월을 고스란히 드러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기품 있어 보였고 얼굴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주름은 연륜으로 느껴졌다.


16663348118213.jpg

“과자를 직접 구워 왔어요. 요즘 베이킹을 배우고 있는데, 부드럽게 잘 구워져서요. 관장님, 아니, 할머님 생각이 났어요.”

16663348118217.jpg

“갑자기 내 생각은 왜 났누.”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임홍진 관장이 미소를 띤 채 차를 마셨다. 그녀의 눈은 정갈하게 차려진 다탁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16663348118213.jpg

“그게,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요. 저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실 어르신이 계시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태서 씨 할머님께서…….”

16663348118217.jpg

“곱게도 포장했네.”

 
길어지는 유리의 말을 자른 것은 다정하게 느껴지는 임홍진 관장의 말이었다. 유리는 긴장을 삭이며 제 옆에 놓인 상자를 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미소 지으며 하나 드셔 보시라고 보자기 매듭을 풀어 보려던 찰나, 유리 뒤쪽의 문이 열렸다. 비서는 조용히 다가와 유리의 앞에 찻잔 하나를 두고 사라졌다.


16663348118217.jpg

“차 마시러 왔다면서. 들어요.”

16663348118213.jpg

“네.”

 
유리가 매듭에서 손을 놓고 찻잔을 들었을 때였다. 차의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과 향을 음미하던 임홍진 관장이 엷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16663348118217.jpg

“공들여 만들었을 텐데, 가지고 가요. 부드럽게 잘 구워졌다니 유리 양 부모님도 좋아하시겠어. 늙으니 단 게 영 안 먹히네요.”

 
찻잔에 막 입을 대려던 유리는 그대로 멈칫했다. 그리고 동그란 눈을 들어 임홍진 관장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온화해 보이던 미소는 사라졌고, 엄한 표정의 임홍진 관장이 찻잔을 향해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16663348118217.jpg

“그리고. 나는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주말인데도 나온 거라, 약속도 하지 않고 무례하게 찾아온 손님과 한가롭게 차 마시며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요.”

16663348118213.jpg

“……죄, 죄송합니다.”

16663348118217.jpg

“알면 이제는 함부로 안 찾아오겠지?”

16663348118213.jpg

“네, 네…….”

16663348118217.jpg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나한테 잘 보여 뭘 하누. 그러면, 차 마저 마시고 가요.”

 
빈 찻잔을 내려놓은 임홍진 관장이 일어서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서류를 확인하고 비서를 불러들여 이것저것 확인하고 지시를 내리는 동안, 유리는 투명 인간 취급당하며 뜨거운 찻잔을 든 채 바들바들 떨었다.

찻잔을 깨끗이 비워 내자마자 도망치듯 강선 아트 센터를 나섰다. 뒤늦게 자신을 따라온 비서가 건넨 것은 곱게 포장된 상투 과자 상자였다.


16663348118217.jpg

“이것 놓고 가셔서요. 살펴 가십시오.”

 
유리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집으로 왔다.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임홍진 관장을 찾아갔건만, 더 커진 불안감만 안고 돌아와야 했다.

게다가 늙어서 단 게 안 먹힌다던 임홍진 관장이 마시던 꿀 생강차는 지독하게 달았다. 유리 역시 같은 것을 마셨으니, 모를 리 없다. 인자한 얼굴로 명확하게 선을 그은 것이었다.

요령 부리면서 나에게 살살거릴 게 아니라, 결혼 당사자인 내 손자 마음을 잡으라고. 내 손자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면 내가 너와 마주 앉아 웃을 일은 없을 거라고.

16663348118213.jpg

“늙은이, 곧 죽을 거면서 누구한테 훈계질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유리가 테이블로 향했다. 어제 내팽개치듯 올려 둔 상투 과자 상자를 보자기째 들어 문을 향해 집어 던졌다.

쾅, 투둑. 바닥에 쓰러진 상투 과자 상자를 보고도 분이 안 풀렸다. 유리는 슬리퍼를 신은 발로 마구 짓밟아 대며 이를 악물었다.

16663348151833.jpg

 

* * *

일요일, 갑작스레 당겨진 출장으로 인해 비상 출근한 태서는 재인과 함께했던 어제를 떠올리는 것을 계속 방해받는 중이었다.

3박 5일 일정의 시카고 출장이라니,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누구 탓도 할 수 없었다. 무리를 자초한 것이 태서였기 때문이다.

재인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토요일에는 한국에 돌아오려고 한 탓이었다.

거기다 강선 건설 본부장으로서 실시간으로 쌓여 가는 업무는 해야 했고,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냐며 계속해서 전화해 오는 앰버를 무시한 채 신경 끄라는 메시지만 보냈다.

16663348151837.jpg

“가지가지 하셨네.”

태서는 테드가 메일로 정리해서 보내온 보고서를 다시 한번 읽는 중이었다. 전화로 보고를 받으면서도 몇 번이나 헛웃음을 흘려야 했는데 이렇게 보고 있으니 가관이었다.

태서는 미국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던 중에 같은 대학에서 법을 전공한 앰버와 함께 회사를 차렸다. 그때 할아버지가 남겨 주신 유산 일부를 가져다 썼고, 쑥쑥 성장하는 회사를 살피는 재미에 빠져 졸업을 미뤘다.

하지만 그가 기업의 인수와 합병, 매각을 주 업무로 하는 회사 E&K의 공동 대표라는 것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친부 강신재 회장이나 조모인 임홍진 여사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은 태서가 뒤늦게 방황하느라 공부에 집중하지 못해 졸업이 늦었다고만 알고 있었다.

태서가 할머니의 부름에 따라 한국으로 들어와 강선 건설 본부장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사실 친부의 뒤를 이어 강선 그룹을 총수가 되는 것에 흥미가 없었다.

시대가 어느 땐데 총수 자리를 세습한단 말인가. 거기다 남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 얹는 것이 태서의 스타일이 아니기도 했고, 남보다 못한 친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16663348151837.jpg

“개판이네, 진짜.”

선대 회장이 이끌어 나가던 30년 전만 해도 탄탄하던 현양 건설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조대훈 회장이 기업 혁신을 외치며 두 팔 걷고 나선 후로 회사는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혁신을 외치는데 망해 가는 이유가 뭘까. 의아하게 여기던 태서는 국내와 국외를 아울러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고, 그렇게 오랫동안 현양 건설에 관한 정보를 쌓아 온 것이다.

16663348151837.jpg

“이러면 너무 뻔해서 재미가 없는데.”

태서가 혀를 차며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그는 그저 한 기업의 몰락을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현양 건설과 얽혀 봤자 복잡하기만 할 것이고, 크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득도 없었다.

현양 건설 회장 조대훈이 제 아이를 가진 여자와 딸을 버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도 재벌가의 흔하디흔한 지저분한 사생활이구나 하고 넘겼다.

도덕적으로 해이한 오너를 물고 늘어질 만큼 일하는 데 있어서 정의를 따지는 편은 아니었다. 단순하게 돈이 되면 헐값에 사들여 되팔거나 조각내고, 그게 아니라면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대훈 회장을 그렇게 단순하게만 바라볼 수는 없었다.

버린 딸을 데려와 다시 엄마도 없는 고아로 만든 사람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윤재인을 건드린 것이다. 게다가 약혼자를 바꿔치기한 것은 태서 자신을 농락한 것이었다.

16663348151837.jpg

“영 거슬리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태서는 짧게 울리는 기계음에 고개 돌렸다.

16663348151837.jpg

“네.”

16663348118217.jpg

―본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임홍진 관장님이십니다.

16663348151837.jpg

“연결해요.”

태서가 굳은 어깨를 주무르며 일어섰다. 책상에 걸터앉아 전화기를 바로잡은 그의 시선이 통창 너머로 향했다. 재인의 집이 있을 방향이었다.

16663348118217.jpg

―뭐 얼마나 바쁘기에 일요일에도 출근한 게야. 전화는 통 안 받고.

16663348151837.jpg

“그러게, 바쁘네요. 저라고 출근하고 싶어서 했겠습니까.”

16663348118217.jpg

―너 일 욕심 채우자고 아랫사람들 고생시키지 말고.

16663348151837.jpg

“저, 일 욕심 없어요. 그리고 공짜로 안 부립니다. 수당 다 챙겨 주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16663348118217.jpg

―어제 현양 건설 조 회장 딸이 찾아왔더구나.

임홍진 관장의 말에 태서의 한쪽 눈썹이 삐죽 솟았다. 제가 안 만나 주니 제 할머니를 찾아갔을 여자를 생각하니 입술 새로 불쾌한 헛웃음이 절로 샜다.

16663348118217.jpg

―내게 잘 보이고 싶어서 온 모양이던데, 차 한 잔 주고 돌려보냈다. 네 마음도 못 잡으면서 내 마음은 어찌 잡으려고. 쯧.

못마땅함이 드러나는 임 관장의 말에 찡그렸던 태서가 손을 들어 한쪽 눈을 묻었다. 제 할머니의 냉정한 성정을 아는 까닭에 유리가 어떤 꼴로 쫓겨났을지를 떠올리니 푸스스, 웃음이 났다.

16663348118217.jpg

―그런데, 조금 전에 현양 건설 조 회장에게 전화가 왔다더구나. 조만간 찾아오겠다고 시간 좀 내어 달라는데. 어찌해 주랴.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태서가 입을 열었다.

16663348151837.jpg

“만나 주세요. 대신 조유리에게 했듯이 내치지는 마시고 그냥 적당히 기분만 맞춰 주세요.”

16663348118217.jpg

―어째서?

16663348151837.jpg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게 잠시 시간을 줄 생각입니다.”

16663348118217.jpg

―어차피 끊어 낼 것, 뭐 하러 질질 끌어.

16663348151837.jpg

“필요해서요.”

필요했다. 조대훈이 강선 그룹을 등에 업을 생각만으로 이곳저곳에서 있는 대로 돈을 끌어오도록 마음 놓고 허세를 부려 댈 욕심이. 그리고 재인이 복수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그녀의 마음을 알아챌 시간이.

입꼬리를 끌어 올린 태서가 뒤돌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태블릿을 톡, 건드렸다. 현양 건설에 대한 보고서의 한 부분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더없이 차가웠다.

16663348173584.jpg

16663348173588.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