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다른 것도 하고 싶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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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다른 것도 하고 싶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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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다른 것도 하고 싶어질 테니까
2022.10.18.
“시카고에서 태어나 오래도록 살았다는 사람이 매운 음식을 왜 그렇게 잘 먹습니까.”
태서는 지금 자두 맛 음료수를 두 팩째 들이켜는 중이었다. 재인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에 적신 냅킨을 내밀었다.
“엄마가 떡볶이를 좋아하셨어요. 한인 마트에서 재료 사다가 자주 해 먹곤 했거든요. 떡이 없으면 대신에 만두나 라면만 넣고도 해 먹었구요.”
“…….”
“못 먹는다고 말하지, 왜 매운 거 좋아한다고 거짓말했어요.”
“거짓말한 게 아니라…….”
차갑게 젖은 냅킨으로 벌게진 입술을 누르던 태서가 겨우 진정됐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내뱉은 숨결에 자두 맛 음료 향이 가득했다.
태서는 재인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가 맛있는 것을 먹고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는 메뉴판의 순한 맛, 보통 맛, 조금 매운 맛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재인이 손가락으로 짚은 것은 그보다 조금 더 위에 있는 매운맛이었다.
시뻘건 고추가 두 개나 그려져 있는.
태서는 울고 싶었고, 실제로 떡볶이를 먹다가 눈물 몇 방울을 훔쳐 내기도 했다.
고추 세 개, 네 개, 다섯 개짜리 메뉴를 고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새도 없었다, 퉁퉁 부은 입술과 따끔거리는 혀를 진정시키기 위해 자두 맛 음료를 쏟아붓기 바빴으니.
“마음 얻으려고 그랬습니다.”
“음…….”
“노력한 겁니다.”
재인이 웃음을 참으며 태서의 앞에 생수병을 내밀었다. 어느 정도 진정된 태서가 입을 헹구고는 재인을 따라 일어섰다.
“점수 따셨어요. 그런데, 점수 더 따는 법 알려 드릴게요.”
“……뭡니까.”
계산을 마친 재인과 함께 태서가 밖으로 나왔다. 땀을 흘리고 난 뒤에 맞이한 찬 바람이 반가웠다.
“저, 어제 그 차 마음에 안 들었어요.”
“차……?”
태서는 저를 바라보며 뒷걸음질로 걷는 재인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집에 데려다주실 때 태워 주셨던 차요. 새까맣고 커다란 그 차, 싫어요.”
젊은 태서에게는 조금은 고루하게 느껴지는 마이바흐는 사실 그의 취향도 아니었다.
회사에서 업무용으로 내어 준 차였다. 어제 오전에 연류동으로 갔다가 장 실장과 함께 출근하는 바람에 회사 차를 타야 했다.
“뭐랄까, 너무 대놓고 ‘나 재벌이오.’, 하는 거 같잖아요. 다음에 우리 만날 때는 다른 차 타고 오세요.”
조금 전 재인은 강태서인 줄 알고 조대훈을 반가워할 뻔했다. 그게 싫어서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태서는 덧붙인 재인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차?”
“설마 차가 그거 한 대뿐이라고 말하려는 거예요? 못해도 두세 대는 있을 것 같은데.”
“차는 한 대뿐입니다. 차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태서의 차는 커다란 몸집을 자랑하는 오묘한 푸른색의 SUV였다. 어제 탔던 마이바흐도 그렇고, 가끔 타는 세단 역시 다 회사 소유였으므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면 새로 한 대 사세요. 그 차, 싫어요.”
“무슨, 차 사라는 얘기를 장난감 사라는 것처럼 말하네요.”
“장난감 사듯이 차를 살 능력 있는 분인 걸 아니까요.”
“……그 말은 내가 뭐 하며 벌어먹는 사람인 줄 대충 안다는 건데.”
태서는 이쯤에서 한 번은 재인에게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재인의 당당함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지만, 그녀의 속내는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장 실장님이 명함 주셨어요.”
“보통은 놀라지 않나.”
재인이 태서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조금은 가소롭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태서는 재인의 손을 바라보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아까부터 재인의 손을 잡고 싶은 것을 참는 중이었다.
손을 잡으면 다른 것도 하고 싶어질 테니까.
“나, 어느 나라 왕세자 명함도 두 번인가 받아 봤어요.”
“…….”
“그중에 한 명은 스물일곱 번째 부인이 되어 달라고 청혼도 했고요. 석유 채굴권을 준다고 했던 것 같아요.”
“졌네요.”
태서의 투정에 재인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런 그녀와 마주 보는 태서의 얼굴에도 재인을 닮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 * *
“조유리라고 합니다. 관장님께 드릴 것이 있어서요. 안에 계시죠?”
“죄송하지만 지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비서의 안내를 들은 유리의 얼굴에 실금이 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쁘게 미소 지으며 동그란 눈을 빛내던 그녀였다.
“……지금 안에 안 계신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임홍진 관장이 출근해서 사무실에 있다는 걸 알고 왔다. 그런데 거절이라니, 유리로서는 흔치 않은 모멸감에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곧 이성을 찾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약속도 하지 않고 온 것은 저였다. 어쩌면 비서는 제가 누구인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니 갑자기 관장을 찾아와 만나겠다는 사람을 함부로 들일 수 없는 비서 상황도 이해는 갔다. 제 일을 하는 비서를 나무랄 수는 없었다. 관장이 아무나 만나 줄 리 없으니까.
“현양 재단의 후원 사업팀장 조유리라고 합니다.”
유리가 들고 있던 상투 과자 상자를 내려놓고는 명함을 꺼내어 비서에게 내밀었다.
“그렇게 전해 주시겠어요?”
유리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다시 보자기에 싸인 상투 과자 상자를 들고 굳게 닫힌 관장 사무실을 향해 허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명함을 건넸으니 저를 알아본 비서가 알아서 관장에게 안내하든, 아니면 임홍진 관장에게 말을 전한 후 당황하며 관장실 문을 열어 줄 것을 기대한 것이다.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가지고 오신 것은 맡겨 주시면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선을 긋는 비서의 말에 유리의 고개가 천천히 비서를 향했다. 언짢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에도 비서는 한결같이 딱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누군지 모르나 본데…….”
저도 모르게 짜증을 내려던 유리가 큰 숨을 내쉬며 화를 눌렀다. 강태서와 결혼하고 나면 집에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결혼 후 어느 정도 신혼을 즐긴 후 아트 센터에 자리를 하나 내어 달라고 할머님께 말씀드릴 생각이었다.
유리는 나중에 아트 센터에서 일하게 되면 가장 먼저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비서를 해고하기로 했다.
모시는 상사의 가족이 될 사람에 대해 미리 숙지하지 않은 것은 능력 있는 비서가 아니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됐고요. 지금 바로 전해 주세요. 누가 찾아왔는지. 저는 여기서 관장님 오실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요.”
“죄송하지만…….”
소파에 앉은 유리에게 난색을 띤 비서가 이곳에서 기다릴 수 없음을 단호히 안내하려던 때였다. 짧게 울리는 기계음에 비서의 시선이 빠르게 뒤쪽에 놓인 제 책상을 향했다.
“네, 관장님.”
다른 책상에 앉아 있던 비서가 빠르게 전화를 받으며 유리의 앞을 막아선 비서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네, 차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관장님, 지금 손님이 와 계십니다. 네. 현양 재단의 후원 사업팀장, 조유리 씨라고 합니다.”
차분하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두 비서를 차례로 눈에 담은 유리가 훗, 하고 코웃음을 흘렸다. 어서 안으로 안내하지 않고 뭐 하느냐는 불호령이 그녀의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전해 드렸습니다만, 오실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셔서요. 지금 비서실 소파에 앉아 계십니다. 전해 드릴 게 있다고 하시네요.”
유리는 괜히 어깨 부분을 한 번 털어 낸 뒤 벗어 놓았던 코트와 선물을 들고 일어섰다. 턱을 들어 당당히 정면을 응시한 채 눈을 슬쩍 내리깔았다.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비서가 일어섰다. 그리고 책상을 돌아 나와 유리의 앞에 서 있던 비서에게 뭐라 작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유리의 눈 밖에 난 비서가 비서실장인 모양이었다.
“안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깍듯해진 비서의 태도에 유리가 까딱, 고개를 끄덕였다. 또각또각, 관장 사무실로 향하는 유리의 구둣발 소리가 도도하게 울려 퍼졌다.
* * *
그리 무겁지 않은 장르의 영화 한 편을 보고, 분위기 좋은 바에서 와인과 가벼운 안주로 저녁을 대신했다.
“좋은 와인이 있습니다. 준비할 테니 다음에 같이 마셔요.”
“네.”
어느덧 집 앞이었다. 재인은 담백하게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그 와인을 함께 마시게 될 제 모습이 어떨지 그려지지 않아 답답했다.
“지난번, 재인 씨가 마음에 든다고 했던 그 그림을 그린 작가 전시회 일정이 곧 잡혀 있더군요. 다음 주 수요일부터, 강선 아트 센터에서.”
“……잡혀 있는 거 맞아요? 태서 씨가 직접 잡으신 거 아니고요?”
재인의 말뜻을 알아챈 태서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트 센터는 내 소관 아닙니다. 뭐, 입김이 작용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데 이번은 정말 아닙니다. 이미 기획되어 있던 전시예요.”
제 개입을 부인하며 재인을 내려다보던 태서가 손을 뻗었다.
차가워진 손끝을 잡아 말아 쥐는 손길은 다정했고 동시에 조심스러웠다. 그래서일까. 놀랍게도 재인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 넣으면 따뜻할 텐데. 주머니에 손 넣지 않은 거, 내 마음대로 해석했습니다.”
“…….”
“이것도 눈치가 없었습니까?”
사실 재인 자신도 몰랐다. 그의 온기에 붙잡히고 나니 그녀도 원했던 것도 같았다. 재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제 손을 감싸 쥔 그의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태서는 재인의 손을 주먹 쥐게 한 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주먹 전체를 감싸 쥔 상태였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재인의 손이 최대한 덜 노출되도록. 그의 손안에서 재인은 제 손등 일부만 겨우 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엄마가 그랬다.
재인은 세나가 아프기 전까지 해마다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과 불꽃놀이를 함께 구경했다.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며 작은 장식을 하나씩 사고, 핫초콜릿을 사서 마신 후에 워터 타워 앞으로 가서 가장 좋아하는 트리를 보는 코스였다.
그 밤, 재인의 엄마는 어린 재인의 작은 손을 내내 이런 식으로 쥐곤 했다.
재인은 시선을 내려 울컥함을 감추며 고개 저었다. 흔한 손깍지가 아닌, 아끼듯 손을 잡아 주는 그의 온기가 마음에 와닿지 않을 리 없다.
“화요일부터 출장이 잡혀 있습니다. 토요일 저녁에 시간을 비워 두겠습니다. 데리러 올게요. 그림 같이 봅시다. 옷은 편하게 입고 와요, 오늘처럼. 뭘 입어도 예쁘니까.”
약 일주일의 시간을 더 준 셈이다. 그 전까지 그녀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갈등할 터였다. 조대훈에게 복수를 꿈꾸며 강태서의 사람이 될 각오는 했지만, 그가 제안하는 연애는 다른 문제였다.
마음 가는 대로 수락하자니, 결국은 그를 이용해야 할 제 양심이 그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재인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심란한 가운데 두 뺨이 붉게 물드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지겹게 들었던 예쁘다는 말인데, 그가 하는 것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재인은 그와의 관계를 결정지어야 할 일주일이 참 짧다고 느껴졌다. 동시에 또 일주일 후에야 그를 만날 수 있다니, 일주일이 길게 느껴지기도 해서 헛웃음이 났다.
“재인.”
그녀에게 익숙한 영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나직한 목소리에 재인이 감정을 추스르고 고개를 들었다.
“눈 옵니다.”
그의 콧잔등에, 재인의 속눈썹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재인은 눈을 깜빡이며 저를 바라보는 강태서를 눈에 담았다.
다정하고도 사려 깊은 눈 맞춤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저 눈 맞춤만으로도 주변의 소음이 차단되고 세상이 하나둘 지워진다.
재인은 어느새 코끝에 다가온 그의 향기를 맡으며 사락, 눈을 감았다.
태서의 입술보다도 먼저 눈송이가 재인의 입술에 닿았다. 붉은 입술에 닿아 사르르 녹아 버린 그것을 태서가 훔치듯 가져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상냥한 온기가 머물렀다.
오늘, 봐서 좋았다고.
조금 더 함께 있고 싶다고.
하지만 기다리겠다고.
추위를 잊게 하는 따스한 입맞춤에 오히려 가슴 한구석이 시큰해져 온다. 전해져 오는 그의 마음을, 재인은 아끼듯 조심스레 품었다.
재인은 예감했다. 또다시 강태서, 이 남자 때문에 설레고 이 남자 때문에 미안한 밤이 될 거라는 것을. 쉽게 잠들 수 없는 밤이 될 거라는 것을.
어느새 조대훈에 대한 걱정은 잊은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