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세상에 떡볶이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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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세상에 떡볶이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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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세상에 떡볶이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2022.10.14.
모녀는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러니 오랜만에 재인을 만난 대훈이 그 나이쯤의 윤세나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했다.
좀처럼 웃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던 여자. 제게 몸을 내어 주고도 마음은 내어 주지 않던 여자. 제 아이를 갖고도 당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굴던 여자.
그리고 이제는 세상에 없는 여자.
끝끝내 제 것이 아니었던 여자.
“후…….”
대훈이 손을 들어 주름진 눈가를 가렸다.
“나에 대해서나 아이에 대해서나, 당신이 신경 쓸 일은 없을 거예요.”
윤세나는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대훈을 만난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틀렸다. 윤세나는 언제나 대훈의 신경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늘 대훈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던 것과는 반대로.
그러니 애초에 윤세나를 미국으로 보내면 안 되는 거였다. 애를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곁에 묶어 두었어야 했다. 그렇게 했었어야 했다.
저를 차갑게 대하더라도. 원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더라도. 날개를 꺾고 숨통을 조여서라도 그 여자 세상에 저만 존재하게 했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죽기 전에 한 번은 저를 향해 웃어 주지 않았을까. 그게 조소라고 하더라도.
윤세나만 생각하면 가슴에 불이 인다.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미련스럽게 이어지는 후회를 곱씹던 대훈이 짧은 웃음을 뱉었다.
“우습군.”
후회라니, 당치 않다. 그가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감았던 눈을 뜨자 흐릿하던 눈동자가 차게 빛났다.
승희와 결혼하는 것을 조건으로 그녀의 친정에서 받아 낸 투자가 적지 않았다.
그러니 그 당시 그에게서 도망친 윤세나를 붙잡지 않은 대훈의 결정은 옳았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그는 저에게 힘을 실어 준 지승희를 선택할 것이다.
“8년 전보다도 더 제 엄마를 쏙 뺐어. 그렇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주어가 없는 문장이었지만 김 실장은 오래도록 모신 상사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신경 쓰이게 하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쯧.”
대훈은 늘 얌전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제 말을 듣지 않고 한국에 남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윤세나 대신 윤재인이라도 계속 곁에 두고 감시했어야 했다.
제 엄마를 그대로 닮은 딸아이가 제 엄마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순종을 물려받았을 리 없다. 예전에 보여 주었던 순종은, 그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대훈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 아이, 주시해.”
“예, 대표님.”
윤세나가 조대훈을 제 남자로, 제 딸의 아비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조대훈이 먼저 윤세나를 제 여자로, 윤재인을 제 딸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타국에서 홀로 제 아이를 키우다 죽은 여자를 그리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30년 동안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굳건한 믿음을 가진 대훈의 차가 도시의 풍경 속으로 섞여 들었다.
* * *
“그러니까…….”
태서가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재인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토요일 오후 네 시,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리고 지금 태서와 재인이 줄을 선 식당 앞은 그 어느 곳보다도 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불티나 떡볶이>
태서가 저 앞에 보이는 간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제 곁에 선 재인을 내려다보았다.
“떡볶이를 먹자구요.”
“네.”
“나한테 떡볶이를 사 주고 싶다구요.”
“네. 저, 어제 그 옷이며 액세서리 모두 가격도 확인 안 하고 골랐어요. 가격이 엄청날 텐데, 그 부담 다 떠넘긴 건 태서 씨니까. 밥은 제가 사고 싶어요.”
“……밥이 사고 싶다면 그냥 밥을 먹는 건 어떻습니까.”
“밥 먹기에는 시간이 애매하잖아요. 저번에 태서 씨 덕에 맛있는 냉면이랑 만둣집 알았으니까, 오늘은 제가 떡볶이 맛집 알려 드리는 거예요.”
재인이 만나자고 한 곳은 2호선 강남역 11번 출구였다. 차가 막힐 것이 뻔했기에, 그리고 만나면 술을 한잔 기울일 수도 있는 일이기에 태서는 차를 두고 택시를 이용했다.
태서는 재인과 단둘이 있고 싶었다. 게다가 그는 제 영역을 침범받는 것도 싫었고, 되도록 공과 사를 구별하려 했다. 그래서 본가에서 제게 붙여 준 운전기사를 부르지 않은 것이다.
만나고 싶다는 재인의 말에 서두르면서도 옷을 두 번 갈아입었다.
비교적 정장 차림으로만 그녀를 만났기에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편안해 보이는 터틀넥 니트와 회색 슬랙스, 카멜색 코트를 골랐다.
처음 하는 데이트였다. 물론 재인이 데이트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강남역에서 보자는 그녀의 말에 보통의 연인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코스를 떠올린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오는 택시 안에서 상영 중인 영화를 살폈고, 근처 미술관과 분위기 좋은 카페를 알아보았다.
저녁을 함께 먹을 괜찮은 식당도 몇 곳 봐 두었다. 처음 만났던 크리스마스이브처럼, 소탈한 데이트를 꿈꾼 그였다.
그런데 떡볶이라니.
“혹시……. 떡볶이, 싫어하세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올려다보는 재인과 마주한 태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떡볶이를 싫어하느냐고 묻는 그녀의 얼굴은 긍정과 부정의 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설마 세상에 떡볶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미였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안타깝게도 윤재인은 떡볶이를 즐겨 먹는 모양이다.
“세상에 떡볶이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까짓거 매워 봤자 얼마나 매울까. 마음 단단히 먹은 태서가 만용을 부렸다.
“하긴. 그렇죠. 그런데 왜……. 아, 혹시……. 이런 거 드셔 보신 적 없나요?”
이어진 재인의 질문은 태서의 자존심을 은근하게 건드렸다. 마치, 재벌들은 이런 서민 음식을 취급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 같아서 태서가 짙은 눈썹에 힘을 주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다만, 줄을 서야 하니까 재인 씨 다리 아플까 봐…….”
“그만큼 맛집이라는 뜻이죠. 토요일에 이 정도면 줄이 긴 것도 아니에요. 저번에 제 친구랑 왔을 때는 평일인데도 줄이 저 끝까지 이어졌었거든요. 저는 괜찮아요. 태서 씨만 괜찮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요, 우리.”
어쩌지.
태서는 매운 음식에 약했다. 네 살에 영국으로 가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영국에서 자랐다.
그곳에서 매운 음식이라고 해 봤자, 피시앤칩스에 뿌려 먹는 핫소스 정도였는데, 태서는 그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할라페뇨 향이 나는 케첩이나 칠리소스 역시 질색했다.
미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외국 생활에 익숙한 그였기에, 한식을 먹을 때도 간이 세지 않고 담백한 것을 선호했다.
그런데 떡볶이라니.
잠시 허탈한 표정을 짓던 태서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아. 요즘은 짜장떡볶이나 크림 떡볶이도 유행이라던데. 그건 먹어 봤습니까?”
“아뇨. 그것들은 다 이단이죠. 저는 정통파예요. 자고로 떡볶이는 빨개야죠.”
“……저와 같군요.”
체념한 태서가 짧아지는 줄을 눈에 담았다. 벌써부터 속이 쓰린 것 같았다.
* * *
“진작 인사드리러 왔어야 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룸 미러를 보며 한껏 참한 미소를 지어 보인 유리의 미간에 이내 실금이 갔다.
“상투 과자 좋아하세요? 요즘 베이킹을 배우고 있는데, 오늘따라 맛있게 구워져서 꼭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새하얀 바탕에 검정 라인이 들어간 트위드 투피스를 입은 유리가 옷차림을 살피며 다시 한번 얌전하고도 우아한 미소에 눈웃음을 더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시금 눈썹을 찡그렸다.
“맛난 과자 구우니 할머님 생각이 나서요. 할머님, 저 따뜻한 차 한잔 주세요오.”
말끝을 늘여 애교를 보태 보았다. 평소에도 필요할 때는 잘만 하던 여우짓인데 오늘따라 어색하게 느껴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유리가 차를 멈춘 곳은 강선 아트 센터의 너른 주차장이었다. 오늘 유리는 제 시할머님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임홍진 관장을 만나러 온 참이었다.
임홍진 관장은 엄하고 냉정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엄마와 함께 인사드린 적은 몇 번 있었지만 혼자 찾아온 것은 처음이다. 그러니 어려움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유리였지만, 긴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엄마, 듣고 있는 거야? 윤재인 그게 한국에 와 있다니까?”
“……일단 아빠한테 말씀드려서 확인해 볼 테니까 기다려.”
“뭘 기다려! 그 여우 같은 게 지금 태서 씨랑 있다잖아! 왜 기다려야 하는데? 싫어! 지금 당장 내 앞에다 윤재인 데려다 놓으라고!”
“조유리!”
“엄마가 나서서 알아볼 수 있잖아!”
윤재인이 강태서와 함께 강선 아트 센터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바로 그날, 유리는 눈 시뻘겋게 뜨고 악을 써 가며 엄마에게 제 불안함을 토로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철부지 보는 듯한 시선과 뻔한 다독임이었다.
“도대체 왜 불안해하는 거야? 윤재인 그까짓 거한테 네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니? 유리야, 엄마 봐. 아니야. 엄마가 네가 갖고 싶다는 거 안 준 적 있었어?”
“……아니.”
“네가 원하는 건 다 갖게 해 줬어. 그렇지?”
“응.”
“너는 차근차근 결혼 준비만 하면 돼. 요리 수업, 다도 수업 빼먹지 말고, 이제부터는 시간 나는 대로 강선 아트 센터 관장님도 좀 찾아뵙고.”
“걔 치워 줘. 엄마, 알았지? 걔 치워 달라고.”
“유리야, 태서 군이 무심하게 굴어도 결혼은 정해진 일이야.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하든, 무슨 말이 돌든 신경 쓸 것 없어. 엄마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날, 유리는 태서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따지기 위해 몇 번이나 전화했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방향을 잃은 분노는 고스란히 재인을 향했다.
제 엄마만큼이나 더럽고 헤퍼서 남의 남자에게 꼬리나 치고 다니는 게 분명해.
그렇게 생각한 유리는 초조한 마음에 아트 센터에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지금 가장 잘 보여야 할 사람을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임홍진 관장이야말로 강태서의 주변 인물 중에 이 결혼에 가장 큰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예비 시아버지인 강신재 회장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도 나눠 본 적이 없었기에, 그나마 어린 유리를 향해 미소 지어 주던 임홍진 관장이 만만했다.
하지만 번번이 자리를 비운 임홍진 관장 때문에 헛걸음만 했는데, 오늘은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을 통해 임홍진 관장이 출근한 것을 미리 확인하고 왔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유리는 임홍진 관장에게 강태서의 예비 신부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인정받아야 했다.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할머님. 앞으로는 자주 찾아봬도 될까요? 손녀딸이다, 생각하시고 편하게 대해 주세요.”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풀어 보려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꾹꾹 누르던 유리가 뭉개진 입술 화장을 확인하고는 혀를 차며 립스틱을 꺼냈다.
화장을 고친 유리의 시선이 조수석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얌전히 놓인 것은 오늘 오전에 만들어 한 김 식힌 상투 과자였다.
고운 비단 조각보로 섬세하게 포장한 상자의 매듭에 빨간 열매가 달린 나뭇가지를 꽂아 장식했다.
잠시 숨을 고른 유리가 차에서 내렸다. 코트의 깃을 반듯하게 눕힌 후 고급스럽게 포장한 선물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강태서랑 결혼하는 건 나야. 감히 내 남자 근처에 알짱거리는 것들을 내가 그냥 두고 볼 것만 같아? 엄마랑 아빠가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움직이면 돼.”
관장 사무실이 있는 아트 센터 본관을 향하는 유리가 고개를 높이 들었다. 특유의 도도한 표정을 지은 유리의 동그란 눈이 표독스럽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