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지금 떠오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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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지금 떠오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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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지금 떠오르는 사람
2022.10.07.
―집에 있어?
“지금 마트 가려고.”
상화의 전화에 재인이 경쾌하게 답했다.
“놀러 오게?”
―아냐. 우리 배 여사께서 지금 백화점에서 기다리고 계신단다.
“어머니랑 쇼핑하기로 했어?”
―몰라. 갑자기 나오라잖아. 그런데 야, 나 지금 잠깐 목도리 가지러 요가원에 왔는데 누구 본 줄 알아?
“……말하지 마.”
―그 인간, 왜 자꾸 요가원 계단에 얼쩡거리지? 아! 진짜 신경 쓰여!
재인은 결국 남광순 여사의 사과를 받은 뒤 선처했다.
오석동 원장은 그 후로 치과에서 요가원으로 이어지는 계단 근처에서 그녀를 흘끔댔다. 그러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툭 튀어나온 입술을 꾹 깨물고 후다닥 내뺐다.
누가 보면 대단한 순정남인 줄 알겠다. 징글징글한 스토커 주제에.
그래도 아직 경계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재인은 주시만 하는 중이었다. 아무튼, 신경 쓰이던 것이 모두 일단락되었는데 마음이 복잡한 것은 강태서 때문일 것이다.
그가 모든 것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솔직하게 말하며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어 줄 줄 몰랐다. 관계의 칼자루를 넘겨준 것이다.
―듣고 있어? 아니, 차라리 귀찮게 전화나 문자라도 하든가. 그러면 신고라도 하잖아? 가뭄에 다 죽어 가는 개구리처럼 생겨서는 음침하게 구니까 진짜 내가 다 소름 돋잖아.
“응. 일단 놔둬 봐. 요가원 앞이랑 안에 CCTV 있으니까 좀 더 지켜보…….”
오피스텔 건물을 나선 재인이 대로변에 주차된 차를 보고 말을 잊었다.
―재인아? 윤재인!
어느새 허벅지 근처에 떨어진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상화가 그녀를 애타게 불렀다.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인가. 태서가 차를 세웠던 자리에 똑같은 차가 서 있었다. 흔치 않을 새까만 대형 세단을 발견한 재인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너 무슨 일 있어? 윤재인!
“응, 상화야. 아니, 아무 일 없어.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통화를 끝낸 재인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조수석 가까이 다가갔다. 조금까지 복잡하던 머릿속은 그저 반가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새까맣게 선팅된 유리를 똑똑 노크할 생각으로 손을 올리던 재인은 운전석에서 내리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었다.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멀끔한 중년의 사내가 빙 돌아 나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타시죠.”
열린 문 너머로 시커멓게 보이는 차 안을 노려보던 재인의 눈빛에 한기가 돌았다.
“타라.”
열린 뒷좌석 문 안에서 흘러나온 탁한 목소리가 버티고 선 재인을 향했다.
“…….”
몇 년 만에 마주하게 된 대훈이 건넨 불쾌한 초대에 재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친부는 짧은 말 한마디로 기분 상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보는 눈 많다.”
“보는 눈 많은 거 아시는 분이 여기에는 왜 오셨나요.”
조대훈의 집에서 살던 7년 내내, 그는 재인을 철저히 무시했다. 사람들 앞에서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후원자로서 그녀를 칭찬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미소는커녕 눈길 한번 제대로 준 적이 없었다.
그럴 거면 굳이 왜 미국에서 한국까지 데려다 놨는지 모르겠다.
귀찮게 그녀를 고아로 만드는 번거로움까지 감내하면서. 혹시라도 밝혀질 진실이 두려워서였는지, 아니면 그저 저라는 존재가 우스워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윤재인.”
태서가 불러 주었을 때는 그렇게나 감미롭게 느껴지던 제 이름이 지금은 진저리가 쳐질 만큼 끔찍했다. 재인은 저 남자의 머릿속에서 제 이름 석 자를 박박 긁어 지워 내고 싶었다.
아빠라는 존재를 그리워한 적은 없었다.
어릴 때야 몇 번 엄마에게 왜 나는 아빠가 없는지를 물어봤지만, 재인은 똑똑한 아이였다. 엄마의 표정과 눈빛을 읽어 내고 그 후로는 묻지 않았다. 재인은 그저 엄마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하지만 그녀가 한국에 왔을 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비록 엄마의 병원비를 담보로 인질처럼 붙잡혀 한국에 오게 됐을지라도, 태어나 처음 만나게 된 친부에 대한 기대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처음 만나게 된 날, 조대훈은 그녀의 실낱같은 기대를 모두 가위질해 끊어 버렸다.
“제법 영리하다고 들었다. 눈치껏 행동해.”
“……네.”
“잘만 지내면 대학도 졸업시켜 주고 좋은 곳에 시집도 보내 줄 생각이다.”
“…….”
“그러니 유리 엄마 말 잘 듣고, 괜히 사람들이랑 말 섞지 마라. 쓸데없이.”
“…….”
“대답.”
“네.”
그 후로 재인은 7년 내내 친구 하나 없이 지냈다. 그저 인형처럼 조대훈의 아내 지승희가 내리는 지시를 따랐다.
다만 후원의 형식을 빌려 그 집에 묶여 살기 위해 뭐 하나 특기를 만들어 내야 했는데, 그때 지승희가 재인에게 시킨 것이 한국 무용이었다.
지승희가 붙여 준 개인 교사는 보름 정도 재인을 가르쳐 본 후, 국내 최고라는 한양 예술 고등학교에 입학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다.
“똑똑해서 말하는 걸 바로바로 캐치해 내요. 표정도 좋고, 춤 선도 예쁘고요. 몸매는 말할 것도 없어요. 가르치는 보람이 있습니다. 유연성도 좋으니 근력만 조금 키우면 되겠어요. 보석 같은 아이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이네요.”
그때 지승희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어린 재인에게도 숨기지 못했다.
재인은 집에 딸린 연습실에서 무용 연습 할 때마다 지승희의 시선을 느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그녀의 적의 가득한 눈빛이 따라붙는 것은 꽤 기분 괜찮은 일이었다.
무용이라고는 아주 어릴 때 문화 센터에서 한 학기 동안 배웠던 발레가 다였다.
재인의 엄마는 그때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 주며 추억에 잠기곤 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재인 역시 어릴 적 얘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통통하고 짤막한 몸매에 분홍색 튜튜가 그렇게나 잘 어울릴 줄은 몰랐지.”
“배가 이렇게 나와 있는데 잘 어울리긴? 엄마 눈에만 그렇게 보였겠지.”
“음악에 맞춰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흔들고 작은 발을 들어 선생님 흉내 내는 네 모습이 너무나 예뻤어. 너만큼 박자 잘 맞추는 애가 없었어. 내가 천재를 낳았나 싶었다니까?”
“하, 말도 안 돼.”
“그림도 잘 그리는데 화가로 키워야 하나, 아니면 무용의 길을 열어 줘야 하나. 근데 또 잠든 널 보면 너무 예뻐서 세상에 내어놓기도 싫어지고. 매일 심각하게 고민했지.”
“그림을 잘 그리긴? 우리 엄마, 진짜 고슴도치 엄마네.”
“세상에 이렇게 예쁜 고슴도치가 어디 있어? 나는 예쁜 윤재인 엄마지.”
눈을 빛내며 웃던 엄마를 생각하며 연습하는 동안 재인은 행복했다. 콩쿠르에서 상을 받을 때마다 지승희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확인하는 것도 좋았다. 그래서 재인은 연습 벌레가 되었다.
“이번 콩쿠르 심사 맡았던 한 교수가 또 그 애를 칭찬하더라고요. 대충 흉내만 내면 될걸, 저렇게까지 독하게 하는 건 분명히 당신 눈에 들려는 거예요. 정말 싫어요, 그 애.”
“당신이 못 이룬 꿈 아니었어? 유리 무용시키고 싶어 안달이더니, 그 애 밀어주면 되잖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나한테 떠들 것 없어. 그 애 데려오겠다고 했을 때 나더러 입도 뻥긋하지 말라고 했던 건 당신이야. 무용 가르치겠다고 한 것도 당신이고. 난 관여한 적 없어.”
“적어도 당신은 가만히 내 말 들어 줘야지! 내가 이런 하소연을 당신 아니면 누구한테 하겠어! 당신이 다른 여자에게서 낳아 온 딸이 볼수록 짜증 난다고 어디 가서 떠들지도 못하는데!”
저를 두고 싸우는 부부간에 오가는 고성을 자장가 삼아 자는 날이 많았다. 지승희와 그녀의 딸 조유리의 멸시도, 낯선 곳에서의 지독한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적어도 제 존재가 이 집에 분란이 되고 있다는 것.
그거면 됐다. 거기다 미국에 있는 엄마가 고액의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억울한 것은, 재인은 지승희가 말하는 것처럼 조대훈의 눈에 들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딸을 남 대하듯 바라보는 친부는 재인에게도 마찬가지로 남이었다.
“회장님께서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
조대훈은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했을 때도 비서를 보내온 남자였다. 그때 비서가 건넸던 돈 천만 원이 치욕스러워서 재인은 비서가 보는 앞에서 그 돈을 찢었다.
장례를 마친 뒤 함께 한국으로 가자며, 조대훈이 그녀의 입양을 고려 중이라는 소식을 전하는 비서에게 코웃음 쳤다. 친딸을 입양한다니, 시카고 땅에 잠든 엄마가 들었다면 얼마나 웃었을까.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
그만큼 무정한 남자가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무척이나 급했나 보다. 그래도 보는 눈은 최소로 하고 싶었는지, 운전기사도 없이 비서에게 운전시켜 찾아온 모양새가 우스웠다.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타라.”
“할 얘기 없습니다.”
더는 두고 볼 수만은 없었는지, 뒷좌석 문을 붙잡고 서 있던 비서가 재인을 채근했다.
“타시죠.”
“…….”
“기다리십니다.”
잠시 꽉 막힌 것처럼 여겨지는 숨을 후, 하고 내뱉은 재인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어디 한번, 진짜 시끄럽게 만들어 볼까요?”
재인이 목소리를 키우며 고개를 치켜들자 비서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오랜 시간 조대훈의 곁에 있었던 베테랑답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러시면 강제로 모실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 강제로 끌고 가 보세요. 강남 한복판에서 젊은 여성이 납치당하는데 사람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 같아요? SNS 스타 되고 싶으세요?”
“납치라뇨. 회장님은 재인 씨의 아버…….”
“그만. 모르시나 본데, 저 고아예요. 아버지라는 사람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내 의사에 상관없이 강제로 끌고 가겠다는 게 납치가 아니면 뭐죠?”
“…….”
“현양 건설 회장님께서 딸뻘 되는 어린 여자를 억지로 차에 태우려고 했다는 목격담은 어때요. 사람들이 떠들어 대기 딱 좋을 텐데?”
조금씩 쏠리기 시작한 사람들의 시선에 비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재인의 두 주먹이 잘게 떨렸다. 그녀는 아직도 열린 뒷좌석의 어둠을 쏘아보았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면 전화로 하라고 하세요. 주소 알아내신 것을 보면 제 전화번호도 이미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조대훈이 주먹을 꽉 쥐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났다.
“피차 얼굴 봐서 반가울 사이는 아니니까.”
“김 실장.”
난감해하던 비서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바로 열린 문을 향해 허리 굽혔다.
“예.”
“그냥 가지.”
“예, 알겠습니다.”
탁, 차 문이 닫히고 이내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재인은 풀썩, 길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친부를 향해 소리를 질러 댔다. 통쾌함이나 무서움보다 더 먼저 그녀를 덮친 감정은 분노였다. 분노 밑바닥에 깔린 슬픔 따위는 늘 그렇듯 무시했다.
냉담하기만 한 친부에게 이만큼의 감정을 내비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용히 때를 기다리다가 한 방에 치고 싶었는데, 뭔가를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들켜 버렸다.
“괜찮으세요?”
“…….”
몇몇 사람들이 재인에게 다가왔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일어선 재인이 휘청이며 근처 벤치에 앉았다.
어떻게 해도 조대훈의 손바닥 안이라면.
잠시 고민하던 재인이 핸드폰을 들었다. 지금 떠오르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