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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이렇게 설레면, 반칙 (28/123)


#28. 이렇게 설레면, 반칙
2022.10.04.



“네.”

“내 약혼녀라고 떠들고 다니는 여자가 하나 있습니다.”

“…….”

“그게, 조금 복잡하기는 한데…….”

생각하니 웃긴지, 잠시 시선을 내리고 눈썹 끄트머리를 살짝 매만지던 남자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신경 쓸 것 없습니다.”

“…….”

재인은 놀랐다. 강태서가 약혼녀에 대해 이렇게나 솔직하게 얘기할 줄은 몰랐다. 차라리 그가 약혼했다는 사실을 숨겨 주기를 바랐다.

그저 자신을 가볍게 만나는 대상으로 여겨 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는 편이 태서를 이용하는 그녀로서는 덜 미안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용하려는 마당에 덜 미안할 방법을 찾는 자신이 우스웠다. 동시에 그가 자신을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껍기도 했다. 만약 태서가 자신을 쉽게 여겼다면 섭섭했으리란 것을 깨달았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환멸스럽기도 했다. 이렇게나 이기적이라니.


“신경 쓸 것 없다는 말도 오해할까 봐 덧붙이는 건데.”

“……네.”

“약혼녀 따로 두고 연애는 윤재인 씨랑 하겠다는 뜻 아닙니다. 나 그런 쓰레기 아닙니다.”

재인은 제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당황한 가운데 그의 말에 마음이 놓이기도 했고, 동시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인은 지금 자신의 포지션이 헷갈렸다.


“그러니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윤재인이 만난 강태서 하나만 생각해요. 그리고 마음 정해지면 말해 줘요. 나랑 연애할 마음.”

재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태서가 빨개진 재인의 귀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천천히 그의 어깨가 낮아진다. 이윽고 태서가 재인의 귓가에 더운 입김을 흩뜨리며 작게 속삭였다.


“얌전히 기다릴 테니.”

멀리서 들려오는 타종 소리에 재인은 어느덧 열두 시가 지났음을 인지했다. 강태서와 함께 맞이하게 된 새해였다. 재인은 어느새 기대하고 있는 저를 깨닫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설레면, 반칙이다.

* * *

태서가 벌게진 눈을 질끈 감으며 긴 다리를 쭉 뻗었다.

제집인 양 2층 거실 한가운데 자리 잡은 고양이를 슬리퍼를 신은 발등으로 슥, 밀었다. 물론 러그 위에 드러누운 털 찐 고양이는 전혀 밀려나지 않았다.

보다 못한 태서가 2층에서 정원으로 이어지는 통창을 열었다. 환기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다. 이참에 저 뻔뻔한 식객이 그만 좀 나가 주기를 바란 것이다.


“밖에 날씨 좋다. 나가서 친구들도 좀 만나고 그래. 그리고 그 김에 너희 집에 좀 가.”

누워 뒹굴뒹굴하던 고양이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암갈색 통통한 몸을 길게 늘였다. 긴 앞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는 볕 잘 드는 곳에 앉아 태평하게 앞발을 핥아 댔다.


―……네?

핸드폰 너머에서 당황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못마땅한 눈으로 고양이를 바라보던 태서가 고개 저으며 다시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했다.


{아니. 특별한 건?}

―네. 평소와 같아요.

{계속 주시해.}

태서의 지시에 수화기 너머의 테드가 하고픈 말을 참듯 입을 달싹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뭐. 말해.}

―저, 그게……. 현양 건설을 대상으로 작업 걸기에는 이미 정보가 충분한 것 같은데요.

{충분하고 안 충분하고는 내가 판단해. 지금부터는 아주 사소한 것이어도 상관없으니 출처 확인해서 보고해. 꾸준히 현금 보내는 계좌에 변경은 없는지 그것도 계속 추적하고.}

―오케이, 알겠어요. 그런데 혹시 최근에 앰버랑 통화했어요?

{……알게 되면 귀찮게 굴 테니 앰버 모르게 진행해.}

―아까 다녀갔는데요…….

태서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서 오늘 새벽에 그렇게나 전화를 해 댄 모양이다. 미리 조심시키지 않은 것은 제 잘못이었다.


{어쩔 수 없지. 수고해.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고.}

통화를 끝낸 태서가 간지럽게 느껴지는 목을 긁으려다가 몇 번 주무르는 것으로 참았다.


“고양이, 저리 가.”

이사 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생각지 못한 동거인, 아니, 동거묘가 생겼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건축소장을 통해 건축 기간 내내 집 주변을 알짱거리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심하지는 않지만, 어떻든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 태서로서는 그리 달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았다. 공사하는 과정 중에 고양이가 알아서 자리를 뜰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웬걸. 고양이는 공사를 마친 태서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정원에 새로 깐 잔디 위에 드러누워 놀던 고양이는 결국 2주 전, 환기하려 창문을 연 틈을 타서 태서의 집으로 들어왔다.

손으로 휘젓고 소리치고 발로 쿵쿵거리며 위협을 가해 봤지만, 고양이는 저 좋을 곳에 늘어져 식빵만 구울 뿐이었다.


“……이게 무슨 고생인지.”

어쩔 수 있나. 태서는 결국 고양이 사료와 밥그릇, 두툼한 방석과 커다란 캣 타워를 집에 들여놓았다.

처음에는 자주 올라오지 않는 2층의 방 하나를 내어 주고는 거기서 지내게 했다. 그런데 이놈의 고양이는 문도 벌컥벌컥 열고 잘만 나와 2층 거실에서 주로 놀았다.

나가지 않을까 싶어 창문을 활짝 열어 봤지만, 나가는가 싶어도 새벽이면 다시 창문을 긁어 댔다.

아트 센터 직원들이 두고 간 그림을 2층 거실에 둔 것은 실수였다. 이미 벽에 걸린 커다란 그림을 혼자서 다른 곳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결국, 그림 주변을 정리하는 태서의 다리에 들러붙은 고양이 때문에 지금 태서는 목과 코, 눈이 벌게진 채였다.


“청소하잖아. 저리 가라고.”

병원에 데려가 보니 수컷 아비니시안 종이라고 했다. 긴 다리와 날렵한 몸매가 꽤 우아했다. 암갈색의 털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고 제법 잘생겼다.


“팔자에도 없는 집사 노릇이네.”

허탈한 웃음을 짓던 태서가 서둘러 2층 정리를 마무리 지었다. 1층으로 내려가기 전, 잠시 그림을 감상하던 태서는 자연스럽게 어제 이 그림을 바라보던 재인을 떠올렸다.


“워터 타워라고 했었지.”

태서가 1층으로 내려가며 크리스마스 시즌의 워터 타워 이미지를 검색했다. 별로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트리였다.

하지만 그게 윤재인 취향이라면.

워터 타워 앞의 트리가 로맨틱하다던 그녀의 말을 기억한다.

태서는 언젠가는 재인이 나고 자란 시카고에 함께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따분했던 크리스마스 마켓도 그녀와 함께하면 즐거울 것 같았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벌써 설렌다. 태서는 이러는 스스로가 신기하고 믿기지 않아서 자꾸만 새는 웃음을 실실 흘리며 책 한 권을 꺼내어 들었다.


“아.”

1인용 리클라이너에 몸을 묻던 그가 갑자기 떠오른 일정에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시카고 건축 박람회 출장이 다음 주로 당겨져 있던데, 맞습니까?”

―네, 다음 주 화요일 오전 비행기입니다. 오늘 새벽에 박람회 측으로부터 연락받아 일정 변경하여 본부장님 태블릿에 공유해 두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주말에 전화해서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태서가 용건만 간단히 한 후 전화를 끊으려던 때였다. 장 실장이 급히 태서를 불렀다.


―그리고 본부장님. 어제 자선 행사 관련 결제 내역 모두 이메일로 보냈습니다.

“결제 내역? 아, 윤재인 씨 관련된 것입니까?”

―네. 급히 준비하느라 대여가 여의찮아 모두 대여가 아닌 구매 처리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제 개인 카드 하나 드렸잖아요. 그거 쓰신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계속 가지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까 예전에 쓰던 핸드폰으로 결제 알림 문자가 갔겠군요. 그런데, 장 실장님. 다 도와줘 놓고 왜 저한테는 모르는 척했습니까?”

조금은 날카로운 질문에 장 실장은 머뭇거림 없이 바로 답했다.


―윤재인 씨 요청이 있었습니다. 준비를 도와 달라고는 하셨지만, 후에 마음을 바꾸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셔서요. 급한 상황에서 우선순위를 윤재인 씨로 두라던 본부장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태서는 그녀의 곧은 성격과 상황에 따른 판단력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장 실장이 입을 다물어 준 덕분에 어제 그는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재인이 오지 않을까 봐 마음 졸였다. 눈부신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는 깜짝 놀랐고, 오후 내내 그를 괴롭히던 두통 역시 말끔히 잊었다. 태서는 그게 무척이나 좋았다.

아무래도 조만간 제 사람을 하나 늘려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태서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흠, 알겠습니다. 아, 하나 더.”

―네.

“그 초록색 드레스는 누가 골랐습니까?”

태서는 윤재인의 아름다움을 한껏 끌어낸 그 드레스를 고른 사람의 안목을 칭찬해 주고 싶었다. 성과급을 챙겨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태서가 장 실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퍼스널 쇼퍼가 처음에 준비한 옷 중에는 없던 드레스였습니다. 윤재인 씨가 카탈로그 보고 직접 고르셔서 다시 매장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목까지 마음에 든다니. 태서가 흡족함을 숨기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습니다. 월요일에 뵙죠.”

시카고 건축 박람회에 초청되어 시카고에 출장이 잡힌 그였다. 태서는 재인에게 고향을 떠올리게 할 물건을 하나 사다 주고 싶었다.


“뭐가 좋으려나.”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재인의 집 앞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아직 연애할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보면 반가워하지는 않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쿵쿵 울렸다.


“얌전히 기다리겠다고 했으니까, 얌전히 기다려야지.”

태서는 고양이 알레르기의 여파로 근질근질하게 느껴지는 눈가를 꾹 누르며 일어섰다. 재인에게 향하는 욕심을 운동으로라도 풀어내야 했다.

* * *

냉동 블루베리를 섞은 요구르트를 먹으며 핸드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장을 보던 재인의 시선이 소파 옆에 걸어 둔 드레스로 향했다.

재인은 어제 신었던 구두와 들었던 클러치 백, 걸쳤던 액세서리를 모두 잘 담아 두었다. 대여라면 반납해야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태서의 돈을 들여 착용했던 것이니 모두 돌려주는 것이 맞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드레스는 재인의 몸에 딱 맞게 고친 것이었다. 가봉이 아니라 아예 수선했으니 환불은 불가능할 것이다.


“흠…….”

재인은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아예 드레스를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저 드레스를 또 입을 일이 있으려나.

그제 비슷비슷하게 얌전해 보이는 드레스를 준비해 온 퍼스널 쇼퍼에게 몇몇 브랜드의 카탈로그를 요청했다. 그리고 재인은 가격표는 보지도 않고 초록색 드레스를 골랐다.


“비싸겠지. 분명히.”

유럽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D 브랜드의 드레스는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그 브랜드를 좋아하던 재인 또한 조금 저렴한 라인의 원피스로 두어 벌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저 드레스는 소재부터가 남달랐다.

드레스를 한참 바라보던 재인이 일어섰다. 그녀는 몇천만 원이든 푼돈 취급하는 재벌들의 소비 행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강태서 역시 드레스의 가격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저 드레스 한 벌쯤 제가 갖는다고 해서 뭐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드레스는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어떻든 강태서의 돈으로 산 것이다. 그에게 받은 첫 선물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이런 것에 의미를 부여하다니. 강태서를 이용해 먹으려는 주제에.

재인이 또다시 느껴지는 자괴감에 먹던 요구르트를 내려놓았다. 강태서는 생각할수록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래서인지 그와 있으면 자꾸 목적을 잊었다. 그와 눈을 마주한 채 대화에 흠뻑 빠져 있노라면, 가슴 깊은 곳이 따끔거렸다.


“어떡하지.”

머리를 쓸어 올리던 재인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윤재인이 만난 강태서 하나만 생각해요. 그리고 마음 정해지면 말해 줘요. 나랑 연애할 마음.”

 
그의 속삭임이 새겨졌나 보다. 밤새 그 말을 곱씹으며 뒤척여야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고, 그때마다 그와의 키스를 떠올리며 버겁게 느껴지는 숨을 내뱉곤 했다.


“하……. 나가자.”

집에 있어 봤자 답이 없는 생각만 길어진다. 근처 마트에 갈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던 재인이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는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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