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둘만 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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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둘만 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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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둘만 딴 세계
2022.09.30.
―유리야, 그……. 옛날에 너희 집에 얹혀살던 애 있었지?
그런 애가 한둘인가. 기업 이미지를 쇄신한다며 엄마와 아빠가 데려다 집에 살게 했던 아이들은 여럿이었다.
집 안에 별채도 따로 있고 방도 여럿이어서 마주칠 일은 적었지만, 어떻든 유리로서는 엮이고 싶지 않은 무리였다.
유리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의 스피커폰 버튼을 눌러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나 좀 바쁜데. 중요한 거 아니면 나중에 통화하자.”
엊그제 유리의 아빠인 조대훈이 중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며 사다 준 가방은 한국에 없는 제품이었다.
맞은편 의자에 가방을 올려 두고 테이블 위에는 홍차와 스콘을 세팅했다.
유리는 우아하고도 귀족적인 콘셉트로 운영하는 SNS에 새로 사진을 업데이트할 생각으로 저녁도 거른 채 방 안에서 심혈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그러다 N 식품의 막내딸이자 고등학교 동창인 여자애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려나 했는데, 쓸데없는 용건이었다.
―있잖아 왜. 그, 한국 무용 하던 애. 같이 학교 다녔는데 기억 안 나? 아, 이름이 왜 생각 안 나지? 우리랑 동갑인데 엄청 예뻤잖아. 남자들 정신 못 차렸는데. 특히 그 정재훈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윤재인을 묘사하는 것이 분명한 말에 유리가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스피커폰을 해제하고는 치솟은 심술을 담아 애꿎은 홍차를 노려보았다.
―나, 걔 봤어. 옛날 생각 하면 조금 달라지긴 했거든? 그게, 더 예뻐졌다고 해야 하나? 하긴, 걔가 예전부터 연예인 뺨을 몇 대 치고도 남을 만큼 예쁘기는 했지. 그런데 더 예뻐졌더라니까? 걔 나타났을 때 사람들이…….
“그런 얘기는 됐고. 걔를 어디에서 봤는데?”
―그게……. 나 지금 강선 아트 센터 자선 행사장에 와 있거든. 걔가 여기에 있는데?
강선 아트 센터라는 말에 유리가 벌떡 일어섰다. 조금 전까지 공을 들여 꾸미던 테이블이 힘없이 밀려났다.
윤재인이 정말 한국에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윤재인이 강선 아트 센터에 나타날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소수만 초대받는 강선 아트 센터 자선 행사라니. 윤재인 주제에.
―그런데 유리야, 음……. 너 정말 강태서랑 결혼하는 거 맞지……?
유리가 강선 그룹의 예비 며느리라는 것은 유리를 아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다만 재인만 몰랐다.
재인이 유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아서였기도 했고, 유리 역시 재인의 앞에서는 조심했기 때문이다. 예쁜 재인에게 굳이 제가 좋아하는 남자에 대해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무슨 소리야. 그러면 내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뜻이야?”
―그게…… 걔가 강태서 파트너던데?
“뭐? 너, 너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네가 태서 씨를 언제 봤다고?”
유리의 매서운 일갈에 잠시 침묵하던 상대가 다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정말이야! 오빠가 걔 옆에 있는 잘생긴 남자가 강태서라고 알려 줬어. 그런데 강태서 성격 무뚝뚝하다고 소문난 거, 그거 사실 아닌가 봐? 파트너한테 되게 다정한데? 지금 그래서 여기 난리야. 완전히 둘만 딴 세계라니까? 유리 너 정말 강태서랑 결혼하는 거 맞아?
쨍그랑, 백만 원이 훌쩍 넘는 찻잔이 바닥을 뒹굴었다. 테이블을 뒤엎은 유리의 손이 달달 떨렸다.
* * *
“여기예요.”
대로변에 차를 댄 태서가 얼굴을 기울였다. 18층 높이의 커다란 오피스텔을 올려다보던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사실 태서는 이미 재인이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었다. 강남 한복판에 있는 신축 오피스텔은 보안 역시 괜찮은 편이었다.
단점은 하나였다. 태서의 회사에서, 재인의 요가원에서, 그리고 오늘 만났던 강선 아트 센터에서 너무 가까웠다. 태서는 아직 재인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문 앞까지 가죠.”
“아뇨.”
“그러면 오피스텔 입구까지만이라도.”
그건 거절하기 힘들었다. 재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서가 미소를 지으며 핸들을 돌렸다.
멀쩡한 지하 주차장을 두고 차 댈 곳이 없다며 오피스텔 근처를 빙빙 도는 남자에게 재인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재인 역시 태서와 대화를 나누는 지금이 좋았다. 머리 복잡한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태서 씨는 어디 사세요?”
“정륜동에 삽니다.”
“아……?”
재인은 오늘 아트 센터에 가기 전까지 정륜동에 있었다. 정륜동의 아늑하고 따스한, 누군가의 집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화장했다.
우연일까. 강태서의 비서가 섭외했다던 그 집이 혹시 강태서의 집은 아닐까. 하지만 보통 재벌들은 좀 더 광활한 집에 살지 않나.
생각에 잠겨 있던 재인은 그 집에 갔던 이틀 내내 러그 위에서 배를 내놓고 자던 암갈색 고양이를 떠올렸다.
“혹시 고양이 좋아하세요?”
“싫어합니다.”
고민도 하지 않고 나온 부정의 대답에 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그럴 리가 없다.
제가 아는 재벌 2세, 혹은 3세들이 머릿속에 스쳤다. 일하느라 바쁘거나 노느라 바쁜 그들에게 집은 단지 부의 과시와 축적의 수단이었다.
그들이 산다는, 모델 하우스처럼 꾸며 놓은 집 대부분은 생활감 하나 없이 휑하기만 했다.
그러니 그렇게나 아기자기하게 공들여 꾸며 놓은 집이 강태서의 집일 가능성은 적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의 체향을 맡고 있노라면 그 집이 그려지는 걸까.
“괜찮은 동네예요. 여기서 조금 멀기는 하지만,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이 있습니다.”
“의외네요. 막, 땅값 되게 비싸고 엄청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그런 동네에 사실 것 같았어요.”
태서가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태서는 재인이 자신의 직업이나, 부의 정도에 관해서 궁금해하거나 물어 오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궁금해할 만도 한데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장 실장을 통해 명함을 건네기는 했다. 그러니 대충 알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태서는 재인이 어디까지 알고 접근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에 따라서 태서 역시 재인에게 어디까지 오픈하면 될지를 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재인의 속내를 짚어 보던 태서가 무언가를 생각해 내고는 미소 지었다.
“아까 낙찰받은 그림, 내일이면 배송이 올 겁니다.”
“네.”
“그러면 언제든 보러 와요.”
“그럴게요.”
“대신, 공짜로 보여 줄 생각은 없습니다.”
“언제는 뭐든 준다더니…….”
“윤재인 씨가 아직 우리 사이에 대해서 확답을 주지 않았으니까.”
강태서는 확실한 사업가였다. 선을 명확히 했고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재인이 얼버무리듯 넘어간 부분을 봐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공짜가 아니면요?”
재인이 태서가 짚어 낸 부분을 못 들은 척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라도 엉큼한 요구를 해 오는 것이라면 실망스러울 것 같았다.
물론 재인이 먼저 그의 집에 그림을 보러 가겠다고 하기는 했다.
사실 그녀는 그때 제가 말을 뱉어 놓고도 놀랐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다. 그게 남자에게는 충분히 도발로, 유혹으로 비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말을 뱉고 난 후였다.
“왜 그렇게 봅니까.”
“지금 그 표정, 찔리는 게 있으신 거죠?”
아까 아트 센터에서 키스한 후, 태서의 눈길이 자꾸만 제 입술에 와 닿는다는 것을, 재인은 모르지 않았다.
그와의 키스는 좋았다. 비교 대상이 없음에도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스킬을 떠나, 그에게 동화되어 키스하는 동안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이 그 증거였다.
뜨거웠던 입맞춤을 떠올리면 자꾸만 가슴이 들썩거렸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는 중이었다. 재인은 처음 느껴 보는 설렘을 애써 눌렀다.
그와 자연스럽게 키스를 나누는 것은 아직 부담스러웠다. 조금 더 그와 가까워지면서 시간에 맡기면 될 일이다. 재인이 새침한 표정으로 태서를 바라보자 태서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마저도 기가 막히게 근사한 남자였다. 재인은 저도 모르게 같이 웃고 말았다.
“그런 사람으로 보지 맙시다. 윤재인 씨에게 쉬운 남자라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인 씨를 쉽게 보는 건 아닙니다.”
“흐음…….”
“레몬 마들렌.”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재인의 동그란 눈이 더 커졌다.
“레몬 마들렌 구워 줘요. 윤재인 씨가 직접.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레몬 마들렌으로.”
“……제가 베이킹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아시고 그런 조건을 거세요?”
발리에서 아이들에게 레몬 마들렌을 나눠 주며 밝게 웃던 재인을 생각하던 태서가 대답 없이 웃고는 이윽고 기어를 바꿨다. 마침내 멈춘 차 안에서 그가 재인을 향해 몸을 틀었다.
“못 하면 배워서라도?”
윙크하듯 웃는 남자와 마주한 재인이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재인의 웃음소리는 태서를 닮아 점점 유쾌해졌다. 강태서의 웃음은 전염성이 컸다.
레몬 마들렌쯤이야. 다행히 제일 자신 있는 메뉴였다.
태서는 고개 끄덕이는 재인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기다려요. 문 열어 줄 테니.”
날렵하게 차에서 내린 태서가 차 앞을 빙 돌아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재인이 차에서 내리니 바로 앞이 오피스텔 현관이었다.
“날도 춥고, 옷이나 신발도 불편할 테니 좀 걷자는 말도 못 꺼내겠고.”
태서가 툴툴대듯 말하며 재인이 입은 코트의 깃을 여며 주었다.
“손, 줘 봐요.”
아트 센터에서 내내 잡고 있던 손이었다. 재인의 입장에서는 못 내어 줄 이유가 없었다. 다만, 아까는 분위기를 조금 탄 것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태서를 향해 뻗는 손이 조금은 어색했다.
부끄러워하는 재인과는 다르게 뻔뻔한 얼굴을 한 태서가 저를 향해 뻗어 온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소중한 것을 들여다보듯 재인의 손을 살피고, 귀한 것을 어루만지듯 엄지로 살살 그녀의 손바닥을 쓸던 남자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아…….”
태서가 재인의 손바닥 한가운데 입술을 묻고 길게 숨을 들이켜며 손의 주인을 응시했다. 탄식과 함께 내뱉은 숨을 잊은 재인이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그리 길지는 않은, 하지만 충분히 짜릿하게 느껴지는 입맞춤을 손바닥에 남긴 그가 다시 허리를 폈다.
그러자 재인이 하이힐을 신고도 목을 한참 꺾어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키만 큰 것이 아니었다. 너른 어깨는 또 어찌나 듬직한지.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 설 때마다 체격 차이를 실감했다.
“헤어지기 싫다고 하면.”
“…….”
“집에 보내기 싫다고 하면 뭐라고 할 겁니까.”
“……수작 부리지 말라고요.”
예상했던 답변에 태서가 쿡쿡 낮게 웃었다. 장난스러운, 그렇지만 다정한 눈빛으로 재인을 바라보던 그가 한숨과 함께 표정을 바꿨다.
“나. 윤재인 씨에게 할 말이 있는데.”
태서의 깊어진 눈빛과 진중해진 얼굴에 재인이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