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지금부터 좀 무례할 건데 (25/123)


#25. 지금부터 좀 무례할 건데
2022.09.23.



“강태서, 진짜 네가 웬일이야. 지난번 입국 환영회 이후로 모임이라는 모임은 다 마다하더니.”

“그러게. 강선 아트 센터에 오면서도 강태서 볼 기대는 안 했는데. 그래도 강선에서 주최하는 행사라고 얼굴 비쳤나 보다?”

어떻게든 말 한번 붙여 보려는 사람들 틈에 선 태서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된 시각에서 벌써 30분이 지났다.

아트 센터에서 열린 자선 행사인 만큼 무채색 계열로 우아하면서도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개중에는 연한 분홍빛이나 물빛, 혹은 코랄빛으로 화사함을 강조한 사람도 있었지만 태서의 눈에는 다 비슷하게만 보였다. 그 어디에도 윤재인은 없었기 때문이다.

무감한 눈으로 갤러리 안을 훑던 태서가 다시 입구 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자꾸만 타는 목은 무알코올 샴페인으로는 해갈되지 않았다.


“너 그거 몇 잔째인 줄 알아?”

“탄산수나 좀 가져와 봐. 이건 달아서 더는 못 마시겠어.”

“또 두통 있어?”

“어.”

태서의 긍정에 준경이 서버를 향해 손을 들었다. 태서는 지근지근하게 죄는 것 같은 관자놀이께를 문지르며 또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윤재인은 결국 오지 않는 것일까. 제가 너무 무리하게 판을 짠 걸까. 하긴, 친부를 피해 숨어 사는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모습을 드러내려면 근사한 미끼가 필요했다.

하지만 강태서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래서 태서는 재인이 자신을 탐내 주기를 바라면서 스스로를 미끼로 던졌다.


“태서는 아까부터 시계만 본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

“혹시 조유리 기다려? 네 약혼자잖아. 왜 같이 안 왔어?”

대답할 가치도 못 느끼는 것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친한 척하며 붙어 오는 것들이 다 귀찮기만 했다.

태서는 탄산수를 가지고 온 준경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무리에서 몇 걸음 물러났다. 탄산수를 몇 모금 마시는 그의 눈길이 전시실 구석구석에 닿았다.


“……없네.”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했다. 같은 곳을 몇 번이나 살피고 비슷비슷한 여자들을 훑어 내며 실망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던 그때.


“…….”

태서는 아트 센터 본관 메인 전시실의 입구에서부터 침묵이 파도처럼 술렁이며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또각. 또각. 또각.

그리고 그 침묵과 함께 들려오는 구두 소리를 따라 무리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비켜서며 소요가 일었다.

공간 속 모두가 마법에 걸린 듯 천천히 멈춰 섰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클래식 음악만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증명했다.

태서의 짙은 눈썹에 힘이 실렸다. 눈을 가늘게 뜬 그는 가까워져 오는 설렘에 초점을 맞추었다.

조금 전까지 야속하리만큼 빠르게 흐르던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지고 있었다. 태서가 기다리는 상대는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침묵과 놀란 눈으로 먼저 그를 애태웠다.

어쩐지 자꾸만 감기려는 눈에 힘을 준 태서가 바짝 마른 입술을 잇새에 슬쩍 물었을 때.


“하…….”

이윽고 모습을 나타낸 상대를 확인한 태서의 벌어진 입술 새로 탄식이 흘렀다.

저마다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은 어느새 흑백 화면의 배경이 되었다. 태서의 눈에는 그들을 배경으로 선, 오직 한 사람만 보였다.


 
윤재인, 강태서의 진짜 약혼녀.

또렷하게 저와 눈을 마주쳐 오는 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서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잘 빠진 눈썹 끄트머리를 약지로 매만지며 슬쩍 고개 숙인 채 웃는 그는 지금 살짝 얼이 빠진 상태였다.


“……돌겠네.”

다시 고개 들어 마주한 윤재인은 외국의 고전 영화 속 여주인공 같았다. 새카만 머리카락을 조금 느슨하게 틀어 올린 모습은 우아하고도 기품이 있었다.

그런데 새하얗고 가는 목덜미로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니 목이 탔다.

손가락 끝으로 그 결을 매만지다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게 하고 싶었다. 종내에는 쥐어 헝클어뜨리고 싶은 욕심에 손이 근질거렸다.

쨍한 초록빛 사파이어로 장식된 단순한 디자인의 금빛 귀걸이와 목걸이가 그녀의 새하얀 피부를 더욱 빛나게 했다.

산뜻한 초록빛 새틴 공단 드레스는 어깨와 빗장뼈, 윗가슴을 살짝 드러내 상큼함과 우아함을 돋보이게 하는 디자인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길이의 스커트 부분은 활짝 펼쳐져서 그녀가 걸을 때마다 펄럭이며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손에 든 작은 클러치가 조명에 따라 금빛으로 반짝였고 드레스와 같은 재질의 초록빛 구두 역시 빛을 받아 은은하게 그 고운 결을 자랑했다.

화려하게 치장한 그녀였지만, 과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중에 가장 빛나는 것이 윤재인이었기 때문이다.


“하.”

또다시 제 귀에만 들릴, 그 촌스러운 종소리가 댕그렁 댕그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태서는 드디어 다시 만나게 된 재인의 아름다움에 새삼 반한 자신이 우스워 헛웃음을 뱉었다. 동시에 평생 모르고 살았던 욕심이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가지런한 이마에서부터 이어진 반듯한 콧날이 깎아 놓은 상아처럼 고왔다. 복숭앗빛으로 물든 뺨과 입술은 더없이 싱그럽고 탐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태서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윤재인의 새까만 눈동자에는 오직 강태서만이 담겨 있었다. 강태서를 오롯이 향하는 그 눈은 태서의 시선을 피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태서는 그 눈이 환장하게 마음에 들었다.


“누구를 죽이려고…….”

중얼거린 끝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낀 태서가 가까이 다가온 재인을 향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어느새 두통은 잊힌 후였다.

모두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강태서와 윤재인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낭랑한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재인의 말을 시작으로 조용하던 공간에 다시금 소요가 일었다.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의 수런거림이 시작된 것이다.

가만히 재인을 내려다보던 태서는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가 편 끝에 손을 뻗었다.

손을 내밀어 줘.

내 손을 잡아 줘.

윤재인에게 닿고 싶은 강태서의 인내심은 여기까지였다.

* * *

악수하자는 건지, 아닌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재인은 태서가 손을 내밀었기에 가까이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아……!”

손끝이 닿았나 싶은 생각이 들자마자 순식간에 사로잡혔다. 재인은 놀랄 틈도 없이 태서의 손에 잡혀 메인 전시실을 가로질러야 했다.

커다란 손이 주는 온기와 힘이 불쾌하기보다는 불편했다. 그 불편함이 가슴 두근거림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재인은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처음 느껴 보는, 기분 나쁘지 않은 불편함에 버겁게 느껴지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 눈으로는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남자의 뒷모습을 훔칠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커튼 안쪽으로 딸려 들어간 재인은 하마터면 너른 가슴팍에 그대로 코를 묻을 뻔했다.


“아…….”

강태서. 오늘 재인을 이 자리에 초대한 사람이며 조금 전 오래도록 눈을 맞췄던 사람. 그가 코앞에서 재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

“…….”

“마주치지 말랬잖아.”

조금은 억눌린, 낮은 목소리가 재인의 귓가에 감겼다. 늘 건네던 존댓말보다 짧은 말투가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저를 배려해서 마지막 인내를 쥐어짜는 듯 느껴져서 기꺼웠다.

남자에게서 전해지는 격정에 재인은 대답을 잊은 채 저도 모르게 눈을 슬쩍 감고 심호흡했다. 여전히 손은 그에게 꽉 잡힌 채였다.

마침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든 재인이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그녀를 오롯이 담은 짙은 갈색 눈동자가 타는 듯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눈, 왜 안 피했습니까.”

“피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다시 한번 눈이 마주치면, 그때는 제 사람으로 묶어 옆에 두겠다고 한 남자였다. 친절하게도 도망갈 기회를 주는 남자의 경고에 잠 못 이루며 고민했던 날들은 끝났다.

아트 센터 안쪽의 소규모 전시실. 통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정원의 오렌지빛 조명에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반듯한 이마 아래 깎아 놓은 듯한 콧대를 기준으로 음영이 드리워졌다.

힘주어 도드라진 턱이, 엷은 미소를 띤 입술이, 매만져 주고 싶은 조금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그리고 그가 내뿜는 열기와 체향이 재인의 손바닥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남자의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재인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강태서의 날것 같은 모습에 숨이 턱, 막혔다.


“나, 지금부터 좀 무례할 건데.”

“…….”

“괜찮습니까.”

재인은 무례함을 예고하는 남자가 겁나지 않았다. 불쾌하지도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다.

오히려 기대되는 것은 왜일까.

눈 안쪽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입이 바싹 말랐다. 자꾸만 호흡이 달린다.


“……물어보는 것부터가 이미, 무례하지 않으신데요.”

재인은 입술을 질근 무는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오늘 강태서와 밤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초대에 응하면서 이미 각오한 것이다.

물론 그가 저를 보자마자 이렇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쏠린 곳에서 제 손을 잡아끌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재인이 그와 하려는 것은 연애가 아니었다. 그를 이용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 내는 것, 엄마의 복수를 하고 자신 역시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 그게 재인이 강태서를 통해 얻어 낼 목표였다.

물론 생각과 현실은 다를 것이다. 각오한 것과는 별개로 두려웠지만, 피할 생각은 없었다. 피하고 싶지 않았다. 재인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싫으면 말해요.”

“싫지 않아요. 각오하고 왔어요. 강태서 씨 사람 될 각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인은 눈을 감아야 했다. 쏟아지듯 덮쳐 오는 남자의 열감과 짙어진 체향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비틀거리는 재인을 한 팔로 안은 태서가 틈 없이 몸을 붙여 왔다.

얼떨결에 짚은 가슴팍을 통해 쿵쿵, 태서의 심장이 맥동하는 것이 손바닥을 타고 그대로 느껴졌다. 얇은 셔츠 너머로 탄탄하게 맞닿은 몸이 말하고 있었다.

이 선택을 너는 돌이킬 수 없을 거라고. 앞으로 많은 것이 변하게 될 거라고.


“윤재인.”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가 주는 울림에 재인이 고개를 들었다. 다시금 눈이 마주치자 금방이라도 흉포해지고 싶은 것을 겨우 참은 태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남자 미치게 하는 법, 공부라도 했습니까.”

공부를 하기는 했다. 책을 보고 영화를 보고, 상화에게서 남자를 유혹하는 비책이라고 표정까지 배웠다. 하지만 배운 것은 아직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오랜 눈 맞춤 끝에 재인이 입술을 벌렸다. 태서는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는 것을 옭아매듯 눈에 새기고 있었다.


“……미칠 것 같나요?”

하, 하고 짧게 웃은 남자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는 이미 재인을 제 품에 가둔 채였다.


“어떤 것 같습니까.”

“모르겠어요.”

“지금부터 생각해 봐요. 시간 넉넉히 줄 테니까.”

코끝에 닿은 남자의 속삭임이 진득한 꿀처럼 지독히도 달았다. 가까워져 오는 남자의 입술에 시선을 빼앗긴 재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질문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훗날 이 키스를 후회하게 될까.

아니.

고민 없이 답을 내린 재인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짚고 있던 그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떨리는 호흡이 섞이는 동시에 스르륵, 재인의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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