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또다시 생각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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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또다시 생각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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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또다시 생각나는 건
2022.09.20.
“그러지 마시고! 지금은 한 사람이라도 더 힘을 모아야 할 때라니까요? 이 할머님이 진짜 뭘 모르시네!”
“아, 글쎄! 나는 재개발이고 재건축이고, 반대한다니까?”
광순이 제집 현관문을 두드리는 동 대표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이나 이 집에서 문전 박대 당한 동 대표는 작심한 듯 부드럽게 태도를 바꾸었다.
“여사님. 지금 알 박기 할 때가 아니에요. 이게 저만 좋자고 이럽니까? 우리 화미 아파트 입주민 모두가 잘사는 길이라니까요?”
“알박기는 무슨? 없이 사는 것들이나 그런 짓을 하지.”
광순이 혀를 차며 잘 삶은 오골계 가슴살을 이유식 재료 수준으로 잘게 찢었다. 못 배워 먹어 드센 것들에게 시달리느라 경찰서까지 드나들면서 부쩍 마른 석동에게 해 먹일 보양식 재료였다.
“백날 문을 두드려 봐라, 내가 도장 찍어 주나. 재개발하면 여기저기서 같잖은 것들이 들어와 살면서 강남 물을 흐릴 텐데, 그 꼴을 보라고? 아니, 제깟 것들이 돈만 많으면 다야? 개나 소나 강남인이네, 떠들어 대면 동네 격이 떨어지는데!”
불퉁한 투덜거림은 이내 현관 밖까지 들릴 만큼 커다란 외침이 되었다. 동 대표가 답답함에 발을 구르든 말든, 오골계 녹두죽을 준비하는 광순에게는 이도 안 들어갈 설득이었다.
“예, 신 여사.”
아들이 설정해 준 고상한 클래식 벨 소리가 울려 퍼지자 광순이 스피커폰을 켜고 우아하게 답했다.
―동 대표, 남 여사님 댁에도 왔지요?
“조용한 동네를 이렇게나 들쑤시다니. 다들 돈에 눈이 멀었네요.”
―그런데, 저……. 남 여사님. 즈이 아들 아시죠? 작년에 행정 고시 합격한.
“아이고, 알죠. 그 똑똑한 아드님이 왜요?”
친근하게 답하기는 했지만, 광순은 겨우 행정 고시 합격한 아들을 자랑하는 신 여사가 우스웠다.
행정 고시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떠들어 대나. 그래 봤자 공무원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콧방울을 씰룩거리면서 비웃음을 흘리던 광순은 오골계 가슴살 찢는 일에 열중했다.
―그, 즈이 아들이 그러는데요. 동의서에 사인해 주라네요?
“신 여사.”
들고 있던 오골계 가슴살을 내려놓은 광순이 행주에 손을 닦았다. 그녀의 쭉 찢어진 눈이 매섭게 빛났다.
―아니, 제가 얘기했거든요. 재개발해 봤자 동네 시끄러워진다고. 그런데 아들이 그게 아니래요. 그래서 들어 보니 아들 말이 다 맞는 것도 같고…….
“이러기예요?”
신 여사는 광순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 재개발 및 화미 아파트 재건축 반대 세력 중의 한 명이었다.
화미 아파트 재건축 진행을 위해서는 화미 아파트 전체 입주민의 4/5 동의가, 그리고 동별 입주민의 2/3 동의가 필요했다.
하지만 광순과 뜻을 함께하는 무리가 그 기준 충족을 저지하고 있었다.
광순이 게거품을 물고 재개발을 반대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광순이 소유하고 있는 남광 빌딩은 재개발 예정지 바로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광 빌딩에서 도로 하나 건너 그 지역을 모두 싹 밀고 세련되고 깔끔하게 바꿀 생각이라는데, 그렇게 되면 광순의 낡은 건물에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이럴 거면 남광 빌딩도 재개발 지역에 포함해 주든지. 도로 맞은편에 남광 빌딩 못지않게 낡은 건물을 가졌던 최 여사는 진작에 큰돈 받고 건물 팔아넘긴 후 콧노래 부르고 다닌다던데.
“쯧.”
없이 사는 것들이 그러듯이 돈이 아쉬워 그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각할수록 거슬리고 짜증 났다.
―그게요…….
“그래서, 서명해 줬다고요, 안 해 줬다고요.”
―그게, 아직 안 하기는 했어요.
핸드폰을 노려보던 광순의 눈빛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신 여사. 우리가 흔들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귀족이 괜히 귀족이에요? 귀족이 흔해 빠지면 그게 귀족인가요?”
―그렇긴 그렇죠.
“이럴 때일수록 집안 단속하고 마음 굳게 먹어야죠. 우리 아이들한테 이 좋은 강남 노른자 땅, 안 물려줄 거예요?”
―물려 줘야죠……?
“나는 신 여사 믿어요. 우리가 애들을 어떻게 키웠어요? 그저 곱게, 고생이라고는 모르게,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소리만 듣게끔 키웠잖아요. 티끌 하나 안 묻히고 키우려고. 안 그래요?”
―예, 예. 그럼요.
“그러니 애들이 뭘 알겠어요. 그냥 주변에서 그럴듯한 말로 속살거리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너어무 착하고 순진해서.”
너무 착하고 순진하기만 한 아들 석동을 생각하자니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몹쓸 것들을 상대하면서 광순 자신도 힘들었지만, 여린 아들이 입었을 상처가 걱정되었다.
“그러니 힘을 냅시다. 우리가 옳았다는 건 훗날, 역사가 알아줄 거예요.”
―예, 예. 알겠어요. 그러면 저는 남 여사님만 믿고 아들 입 딱 다물게 할게요.
“그래요. 날 풀리면 차 한잔하고요.”
광순이 통화를 끝마치고는 손질한 오골계 살을 들고 일어섰다. 주방으로 향하는 그녀의 얼굴에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하여간, 돈이라면 그저 좋다지. 쯧.”
격에 맞는 사람 만나기가 이렇게나 어렵나. 광순이 고개를 저었다.
* * *
한 해의 마지막 날인 금요일 오전, 태서는 화미 아파트 관련 회의 중이었다.
조합원 측에서 강선 건설과 현양 건설, 두 곳 중의 한 곳을 최종적으로 선택하겠다고 알려 온 것이 조금 전이었다. 그에 긴급하게 각 부서의 회의 요청이 쇄도한 탓에 예정에 없던 회의가 잡혔다.
비공식적인 발표였다. 재건축과 재개발을 위한 입주민 동의도 받지 못한 상황인데 조합원 측에서 몸이 달아 입찰 업체를 축약하여 발표한 것이다.
“조합 측에서도 이번에는 어떻든 해내겠다는 의지가 있는 겁니다. 셋으로 나뉜 조합도 통합을 앞두고 있다고 하니 우리도 이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의합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우리가 우세하다고는 해도, 현양 건설을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맞습니다. 우리도 입주민을 설득해야죠. 현양처럼 조금 더 입주민들을 고려해서…….”
“아니, 뭐 그러면 적자 날 일을 하자는 겁니까?”
“누가 그러자고 했습니까? 그저 조금만 더 주민 의견을 들어서!”
“주민 의견 더 반영해서 막 퍼 주자는 거 아닙니까, 지금!”
“아니 그러면 뭐 좋은 의견이라도 있습니까?”
“주민 동의는 조합원 측에서 해결하겠다고 했습니다. 거의 다 된 것으로 알아요. 그러니 우리는 입주민보다는 조합원에게 조금 더…….”
알맹이 없는 논쟁을 듣던 태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펜의 뚜껑을 덮었다.
각 부서 부장들의 요청에 따라 태서가 마지못해 주관한 회의였다. 그사이 늘어난 정보라고는 노골적으로 입찰에 열을 올리는 현양 건설에 관한 소식들뿐이었다.
“지금까지 나온 의견은 결국 자선 사업하자는 거 아닙니까. 대상을 조합원으로 할지, 입주민으로 할지 그거 결정하자고 회의 요청하셨습니까? 그런데 그 자선 사업, 여기 계신 분들 월급으로 하실 생각인 거죠?”
내내 노려보던 회의 자료를 덮어 밀어내는 손길이 거침없었다. 태서는 순간적으로 싸늘해진 회의장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훑으며 혀를 찼다.
“모르시나 본데.”
남자의 낮은 목소리에는 짜증이 역력했다. 긴장감이 감도는 회의장 안, 누구 하나 입을 떼는 이가 없었다.
“화미 아파트 일대 재개발, 우리는 그거 아니어도 먹고삽니다.”
태서의 일갈에 회의에 참석한 전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본부장님, 하지만 화미 아파트 일대 재개발은 회장님의 숙원 사업입니다!”
“누가 그거 모릅니까? 지금 그 아파트 재개발에 목숨 거는 건 우리가 아니라 조합 측이라는 뜻입니다.”
“네……?”
“적자 감수하면서 조합 측 요구 조건 다 들어줄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어차피 둘 중 하나로 선택할 거, 지나친 경쟁은 출혈만 커집니다.”
“그럼…….”
“좀 더 지켜봅시다.”
“하지만 본부장님, 소문에는 이미 현양 측에서…….”
현양 건설이 조합원 측에 돈을 쏟아붓고 있다고는 하지만, 강선 건설의 브랜드 이미지가 훨씬 좋았다. 거기다 규모가 다른 탓에 자금력과 기술력도 차이가 났고, 디자인 역시 달랐다.
화려하고 웅장한 이미지를 추구한 현양 건설과 세련되면서도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시 여긴 강선 건설의 지향점은 극명하게 달랐다.
나이대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현양 건설의 디자인과는 다르게 강선 건설의 디자인은 세대를 아울러 호감도가 높았다.
그래서 조금만 조합원들 비위를 맞춰 주면 최종 입찰받는 것은 강선 건설이 될 가능성이 컸다. 태서 역시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태서는 조합원 측의 비위를 맞춰 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이야 뻔했다. 현양 건설처럼 조금만 더 부드럽게 굴 것, 그러면서 동시에 조합원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것.
“올해가 가기 전에 어떻게든 방향을 결정하고 싶다는 뜻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프로는 프로답게 굴어야죠. 우리는 할 만큼 했습니다. 더 이상의 양보는 없습니다.”
“하지만 본부장님, 서두르지 않으면 늦습니다. 현양 건설 측에서는 이미 수차례 각 재건축 조합장들과 만나서…….”
“돈 뿌려 댔겠죠. 지금 우리도 그러자는 겁니까?”
“아니, 제 말은…….”
“제대로 된 대책도 없이 그저 돈이나 써 대자고 회의 요청한 겁니까? 회삿돈은 쓰기에 부담이 없나 봅니다? 대답해 보세요.”
태서의 매서운 지적에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삽시간에 조용해진 회의장 안, 그의 눈빛만이 홀로 형형했다.
화미 아파트 관련하여 태서가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내놓은 답은 하나였다. 그것을 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제 마음의 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게 될까. 지금 태서는 그것을 놓고 고민 중이었다.
사실은 이미 어느 한쪽으로 확실하게 기운 상태였다. 하지만 회의에 참여한 사람들이 제가 내린 결론을 무리 없이 받아들이기 힘들 터다. 그래서 그는 지금 때를 살피며 제 마음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또다시 생각나는 건.
윤재인.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에 힘을 준 태서의 시선이 흘끗, 손목의 시계를 향했다. 오전 열한 시 사십이 분.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도 여덟 시간 넘게 남아 있었다.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기대감에 초조함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재인이 초대에 응할지, 응하지 않을지는 알 수 없는 태서로서는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
태서가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
윤재인이 보고 싶었다.
* * *
강선 아트 센터의 입구에 선 재인이 무릎길이의 이브닝드레스 자락을 잡아 팽팽하게 당겼다.
“후우…….”
숨을 고르며 이미 지나쳐 온 아트 센터 정원의 시계를 뒤돌아보았다. 여덟 시에 시작하는 행사였지만, 재인이 도착한 것은 30분이 지난 여덟 시 반이었다. 일부러 늦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헤어와 메이크업을 담당한 사람은 재인을 만나자마자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고는 모처럼 만난 뮤즈를 붙잡고 예술혼을 불태웠다. 너무나 진지하게 영혼을 갈아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의 귀에 재촉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 바람에 시간이 늦어지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딱 적당한 시각에 도착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이왕 모습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는데, 최대한 극적으로 나타나야 했다. 모두의 주목을 받아야 했으니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지금 입장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가자, 윤재인. 겁먹을 것 없어.”
재인이 아트 센터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강태서를 떠올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가 저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강태서는 재인의 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새하얀 계단참에 올라선 그녀가 마침내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