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누구를 애태워 죽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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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누구를 애태워 죽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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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누구를 애태워 죽이려고
2022.09.16.
“저번에 분명히, 제가 사람을 데리고 오면 제 편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데리고 올 아가가 있는 게야?”
홍진은 내일 저녁에 있을 강선 아트 센터 자선 행사의 호스트 자리를 부관장에게 맡긴 것이 못내 아쉬웠다. 최근의 몸 상태와 초대한 대상의 연령을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데 어제 오후, 태서가 따로 초대장 두 장을 요청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예정에 없던 인원 두 명을 더해도 괜찮을지 물어 오는 부관장에게 급히 추가 초대장을 만들어 보내라고 지시를 내렸다.
저에게 말이 들어올 것을 알면서도 초대장 두 장을 추가로 부탁하다니, 그간 알아 온 손자답지 않았다. 하지만 홍진은 숨기는 것 없이 당당한 태서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그 속내가, 그리고 함께 올 이가 궁금해서 부관장에게 행사장에서 태서의 곁에 누가 있는지 잘 살피라고 말해 둔 참이었다.
“할아버님께서 남겨 주신 제 몫, 마저 받고 싶습니다. 조만간 정리해 주세요.”
“세금 떼이기 싫다고 나보고 가지고 있으라더니, 왜 갑자기.”
“데리고 올 아가, 이왕이면 곱게 데리고 오려고요.”
“허…….”
임홍진 여사가 헛웃음을 짓다가 찻잔을 들었다.
태서의 할아버지인 강선일이 태서의 아버지인 강신재 회장 모르게 태서 앞으로 남겨 놓은 돈이 꽤 있었다. 태서는 그중 일부를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때 받아 갔다.
그 돈으로 뭘 어쨌는지, 임홍진 여사는 굳이 묻지 않았다. 허투루 쓸 녀석은 아니었으니 필요한 곳에 썼겠거니 했다. 그런데 지금 그때 남겨 놓은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네 녀석이 돈이 부족하지는 않을 텐데?”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고 싶습니다.”
저 능글능글한 표정은 죽은 남편을 조금 닮은 것도 같다. 임홍진 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의 주둥이를 매만졌다.
“태서야.”
“네.”
손자를 생각하면 그저 미안하고 딱하기만 했다. 의지할 어른 없이 저 혼자 잘 자라 준 태서를 보는 임홍진 여사의 눈빛에 회한이 가득했다.
아들인 강신재는 젊은 날에 일찍 마음을 닫았다. 그리고 정략결혼 상대인 유정하와 억지로 결혼하여 태서를 낳았다.
그 후 각기 다른 여자에게서 자식을 넷이나 더 보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그 누구의 남편 역할도, 그 누구의 아버지 역할도 한 적이 없었다.
아들이 그렇게 된 것에는 자신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임홍진 여사는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후회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손자인 태서만큼은 그저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기를 바랐다.
“마음을 얻는 것이 먼저다.”
“알고 있습니다.”
번듯하게 자란 손자였지만 늘 마음이 쓰였다. 그도 그럴 것이 타지에서 제 아비의 무관심과 제 어미의 학대 속에 죽을 뻔한 손자였다.
뒤늦게 알고 손을 썼을 때는 이미 온전히 품어 주기엔 늦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아이는 좀처럼 곁을 내어 주지 않았다.
이만큼 잘 자라 준 건 다 강태서 스스로의 힘이었다. 그러니 할미랍시고 함부로 태서의 앞을 막아설 수는 없다. 어떻든 힘을 보태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할미는 그저 구경이나 하랴?”
“네.”
임홍진 여사가 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준비하마.”
곧게 잘 자라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아이의 손을 잡으며, 임홍진 여사가 태서 뒤쪽의 액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편에게는 미안하지만, 현양 건설의 조성환 회장과의 약속을 지켜 달라던 유언은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 * *
그곳은 정륜동의 가장 안쪽, 높은 곳에 있었다. 고만고만한 주택 사이에 자리 잡은 건물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겨울이어서 아쉬웠다. 봄부터 가을까지 담쟁이넝쿨이 싱그럽게 빛날 것이 분명한 붉은 담이 이어진 곳이었다.
“여기, 맞지……?”
주소를 몇 번이나 확인한 뒤 벨을 누르자마자 사람이 나왔다.
푸근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 여성은 재인의 이름을 물은 뒤 미소 지었다. 안내받아 들어선 정원의 안쪽에는 특이하게도 커다란 실외 암벽 등반 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잘 관리된 정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인이 새하얗게 빛나는 건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전체적으로 새하얀 단층집은 모던하게 디자인되어 깔끔했다. 딱 한 군데, 커다란 창가에 연노랑 포인트를 준 외관이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예쁘다.”
이런 곳에 산다면 매일 아침 웃으며 눈을 뜰 것만 같다. 예쁜 아가와 신혼부부가 살 것만 같은 집을 한참 바라보던 재인의 고개가 기울었다.
“제가 제대로 찾아온 게 맞나요?”
“네. 아주 잘 찾아오셨습니다.”
싱긋이 웃는 중년 여성을 따라 새하얀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재인은 포근함이 폴폴 풍기는 거실 분위기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아…….”
높은 층고를 가득 채운 햇살을 품은 거실은 따뜻했다.
연노랑 러그가 푹신하게 깔린 곳에 암갈색의 고양이가 배를 내놓고 누워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는 위아래로 연결된 계단이 언뜻 보였다.
크림빛 소파와 마주 보는 벽을 따라 길게 매입 설치된 알코올 난로를 보니 재인은 이 집의 밤 모습도 궁금해졌다.
“혹시 집주인분이신가요?”
“아닙니다. 집주인분은 따로 계세요. 이용하시는 분께서 편히 사용하실 수 있도록 개인 주택을 빌려 잠시 매장처럼 꾸몄습니다. 저는 편의를 도우려는 것뿐이에요.”
“아…….”
집이 주는 느낌에 빠져 있다가 보니 집주인이 궁금해졌다. 분위기로 볼 때 제 또래의 감각 있는 여성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사람이 누구든 친해지고 싶었다. 그만큼 재인의 마음에 쏙 드는 집이었다.
“여기서 먼저 고르시면 됩니다. 그 후에는 피부 케어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할 모양이었다. 재인은 푸근한 중년 여성이 이끄는 거실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옷 여러 벌과 가방, 구두, 액세서리를 늘어놓은 자리 앞에 늘씬한 여성이 서 있었다. 여자는 자신을 퍼스널 쇼퍼라고 소개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안쪽에 방이 있습니다. 입어 보시고 결정해 주시면 바로 수선 들어가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불러 주세요.”
“네.”
이제 시작이었다. 재인이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 * *
“네. 오늘 일정 끝나는 대로 빠르게 정리 부탁드립니다. 헤어와 메이크업 역시 내일 그곳에서 할 겁니다.”
장 실장이 김 여사와의 통화를 마친 후 아름다운 정원을 둘러보았다. 임홍진 여사와 얘기 중인 태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급하게 재인이 편하게 준비할 장소를 섭외하던 장 실장은 오늘 늦게까지 비어 있을 태서의 집 2층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연류동 본가를 오래도록 관리해 온 한 실장에게 연락했고, 장 실장이 책임지겠다는 말에 한 실장은 조심스럽게 이 비밀에 동참해 주었다.
강태서의 집을 함부로 외부인에게 내어 주다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독단으로 처리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아직 세상에 저를 드러내는 것을 원치 않는 재인이 청담동 숍 주변으로 다니다가 괜한 사람과 마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뭐 어쩌겠어. 급한데 방법이 없는걸.”
정말 급한데 어쩌란 말인가. 장 실장은 그저 무슨 일이 있어도 윤재인이 자신의 초대에 응하도록, 그리고 초대에 응한다면 편안하게 준비할 수 있도록 도우라던 태서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 상사의 허락도 없이 상사의 집을 이용한 것은 합당했다. 따져 묻거든 일의 우선순위를 지키느라 그랬음을 피력하면 될 일이다.
“원래 2층에는 잘 안 가신다고 하니까.”
강태서의 성격이나 하는 것을 보면 생활감 없이 덩그러니 가구 몇 점만 놓인, 소위 말하는 ‘광공의 집’에서 살 것만 같다.
하지만 강태서는 의외로 혼자 살 집에 공을 들였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개인적으로 집을 알아보고 대대적인 공사를 해서 원하는 집을 꾸몄다.
평소 눈여겨보고 있던 건축가에게 의뢰한 것을 시작으로 인테리어 업체는 물론, 자재와 가구, 조명과 자잘한 소품까지 모두 직접 골랐다. 장 실장은 그가 왜 그렇게나 집에 집착하는지 알 수 없었다.
“참 독특하시단 말이야.”
부족한 거라고는 없이 자랐을 것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금수저 중의 금수저 강태서는 가끔 금수저답지 않게 구는 것이 여러모로 이상했다.
지상 2층, 지하 1층, 총 3층짜리인 그 집은 조금 독특했다. 태서가 주로 출입구로 이용하는 주차장 문은 1층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현관에서 이어지는 2층에서 생각할 때 1층은 지하실처럼 여겨지는 곳이었다.
대지의 경사로 인해 반대쪽에서 볼 때는 1층도 지하가 아닌 지상에 모습을 갖추고 있었지만, 잘 살피지 않으면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장 실장 역시 태서의 일 때문에 처음 그 집에 갔을 때는 깜짝 놀랐다.
1층에도 꽤 넓은 주차장과 정원이 있는데 2층 현관 앞으로도 너른 정원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태서는 집돌이였다. 주말에는 집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고양이에게 2층을 통째로 내어 준 태서는 1층의 방 한 칸에 온갖 운동 기구를 갖춰 놓고 주로 1층에서 지냈다.
지하실에는 널찍한 수영장이 있었고, 실내에서도 클라이밍 트레이닝을 할 수 있도록 기다란 한쪽 벽면을 통째로 꾸며 놓았다. 정원에도 실외용 암벽 등반 기구와 농구 골대를 설치해 놓은 것은 물론이었다.
“운동 못 해서 한이 서린 사람도 아니고…….”
“그거 내 얘기입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장 실장이 뒤돌았다. 일을 벌여 놓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생각에 잠겨 태서가 나온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네.”
태서가 쿡,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회사로 돌아가면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였다.
“운동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장 실장 퍼스널 트레이너가 별로라면서요.”
“네, 좀……. 저랑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참에 요가 배워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화미 아파트 근처면 회사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
“……네?”
차 문을 열던 장 실장의 고개가 기울었다. 태서는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차의 뒷좌석에 올라앉으며 싱긋이 웃어 보였다.
“한 달 꽉 채워 출석 체크하면 요가 매트도 좋은 거 준다던데요.”
“지금 저보고 윤재인 씨가 강사로 있는 곳에 등록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가고 싶은데, 난 거기 가면 요가는 안 하고 강사만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아서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감시나 뭐 그런 게 필요해서는 아닙니다. 그냥, 지인 소개라고 해 두죠.”
“……예?”
“매출 좀 올려 주고 싶어서 그럽니다. 한 비서랑 같이 등록하는 걸 추천합니다. 요가, 좋은 운동이잖아요.”
장 실장은 실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이 남자, 의외로 나중에 지독한 애처가가 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 윤재인에 관한 보고서는 이제 필요 없습니다. 지난번에 부탁드린 주안 엔터 정재훈에 대한 것만 부탁드립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직접 알아 가고 싶어져서요. 설렘이 부족하달까. 스포당하는 기분 별로입니다. 그리 떳떳한 행동도 아니고.”
장 실장은 미간을 찡그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상사는 윤재인에게 정말 제대로 푹 빠져 버린 모양이다.
“그래서, 연락은?”
“……아직입니다.”
“하, 정말. 누구를 애태워 죽이려고 그러나……. 출발합시다.”
태서와 장 실장을 태운 검정 세단이 가파른 내리막길을 매끄럽게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