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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와요, 나한테 (22/123)


#22. 와요, 나한테
2022.09.13.


참다못해 먼저 자리를 만들었다. 대놓고 내 시야에 들어오라고 판을 깔아 준 것이다.

사실은 덫이었다. 조사 결과 윤재인은 친구 이름을 빌려 요가원을 열고 오피스텔마저 친구의 어머니 이름으로 계약해서 살고 있었다.

이유는 뻔했다. 조대훈에게 자신이 한국에 와 있음을 숨기려는 것이다.

그러니 태서의 초대는 윤재인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않고 거절할 만한 자리였다. 하지만 재인이 태서를 욕심낸다면 참석 여부를 두고 고민할 것이다.

태서가 긴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토독, 두드렸다. 가늘게 뜬 눈에 며칠 전에 보았던 재인의 붉게 물든 뺨이 아른거렸다.


“봅시다.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접근했던 건지. 그리고 어디까지 용기를 낼 건지.”

재인이 용기를 낸다면 재인의 계획이 무엇이든 함께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태서는 재인을 초대했다.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내 주기를 바랐다. 그만큼 자신을 욕심내 주기를 바랐다.

그 욕심에 어떤 목적이 있다고 하든지 상관없었다. 윤재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재인이 원한다면 기꺼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 줄 수 있었다.


“겁내지 말고 와요, 나한테.”

태서가 재인이 있을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며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물론 그는 윤재인의 수단으로만 머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강태서가 어떤 사람인가.

그녀를 사로잡으면 될 일이다. 윤재인 스스로 제 영역에 발을 들이기만 한다면.


“재미있네.”

태서가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며 일어섰다. 슬랙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반듯하게 선 그의 넓은 등과 어깨 부분의 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시작이 어떻든, 윤재인의 마지막 목적이 강태서가 되도록 하는 것.

내일을 기다리는 태서는 제가 떠올린 신년 목표를 되씹으며 재인이 욕심쟁이이기를 바랐다.

* * *



“무슨 일이시죠?”

재인은 요가원 상담실에 마주 앉은 남자를 날 선 표정으로 응시했다.

머리가 복잡해서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몸이라도 움직일까 싶어서 홀로 아침 일찍 <요가 만다라>에 출근한 재인은 잠긴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아버지뻘 되는 남자가 누구인지, 재인은 잘 알고 있었다. 한국에 들어온 것을 숨기려고 나름 노력했지만, 그들은 재인을 이렇게나 쉽게 찾아냈다.


“여기 계시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왜요. 내가 뭘 어쨌는데요. 나는 한국에서 살면 안 되나요?”

조대훈의 비서실장이 별말 없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은 봉투였다. 재인이 헛웃음을 흘리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자꾸 같은 자리에서 자신에게 봉투를 들이미는 사람을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 우스웠다.


“미국으로 돌아가시죠.”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내일 출발하는 시카고행 항공권이었다.


“…….”

재인이 도톰한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나 빨리 들킬 줄은 몰랐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알아챈 것일까.

재인이 알기로는 조대훈은 자신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따로 사람을 붙여 두지도 않았다. 그건 감시할 대상도 못 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우습게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일 돌아가시는 것으로 알고 말씀 전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 주십시오.”

재인은 남자가 놓고 간 명함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긴 생각 끝에 명함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 상화가 들어왔다.


“우리 재인이, 일찍 왔네?”

“응.”

“내 새끼, 아침은 먹었누?”

“상화야.”

“응.”

“나 오늘 오후 수업 좀 빠질게.”

“잉? 갑자기? 무슨 일 있어?”

상화를 향해 입꼬리를 올려 보인 재인이 명함 대신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테이블 한쪽에 두었던 다른 명함을 집어 들었다.


“윤재인입니다.”

다분히 사무적인 말투에 상화가 눈치를 살피고는 상담실 문을 닫고 나갔다.


“초대에 응하겠습니다.”

잠시 말이 없던 재인이 조금 전 조대훈의 비서가 두고 간 명함을 들어 응시했다.


“오늘 당장 도와주셔야겠어요. 옷은 물론 화장과 헤어를 도와주실 분도 필요합니다.”

명함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는 재인의 손길에 주저는 없었다.


 

* * *

재인이 심호흡하며 두 팔과 기립근에 힘을 실었다. 천천히 기울어지던 재인의 몸이 어느새 거꾸로 꼿꼿하게 섰다.


“후우…….”

단전에 힘을 모으고 숨을 골랐다. 잡생각이 길어져 봐야 좋을 것이 없다.

초대에 응할지 말지, 고민이 길어지던 차에 조대훈의 비서가 나타난 것은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빠르게 결정을 내리도록 쐐기를 박아 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들킨 것, 고민할 이유가 사라졌다. 무기력하게 쫓겨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목적을 이루려면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니 강태서라는 남자가 내민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하기에는 준비된 것이 전혀 없었다. 단둘이 만나는 자리가 아니다. 사람들의 눈이 집중될 자리였다.

재인은 돈 있는 것들이 어떻게 놀고 떠들어 대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어설프게 꾸며 봤자 비웃음만 살 것이다.

이왕 마음먹은 것, 재인은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밥 시키려는데, 점심 안 먹고 나가? 선화 씨랑 나는 뚝배기 불고기 시키려는데.”

“아니, 먹어야지. 나는 돌솥비빔밥 시켜 줘.”

긴장한 탓에 소화가 잘될 리 없지만, 굶어 봤자 손해다. 조금이라도 먹어야 했다. 오후부터 당장 몇 벌이나 되는 옷을 갈아입고 분주히 움직이며 준비를 해야 할 텐데, 밥심이 곧 체력이었다.

어차피 오래 입고 있어야 할 옷, 끼니를 거르고 옷을 맞춘들 불편하기만 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아마 오늘 재인은 강태서라는 남자의 카드를 일, 이천만 원 정도는 우습게 긁으리라.

파트너가 되기를 급하게 요청한 남자는 강태서였다. 그러니 이 요구는 합당했다. 굳이 겸손 떨며 도움을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 만약 제가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몰랐다면 모를까.

장 실장이 직접 와서 준비를 돕겠다고 했지만, 재인은 거절했다.


“아뇨. 제가 들러야 할 곳에 전화만 걸어 주세요. 기사님도 필요 없습니다. 퍼스널 쇼퍼가 이것저것 들고 오셔 봤자 요가원도 그렇고, 제가 사는 집도 그렇고……. 마땅치 않아요. 제가 움직일게요. 그게 편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침 일찍 전화해서 초대에 응하겠다고 한 것이 의외였는지, 침착한 모습만 보이던 비서는 조금 들뜬 것 같았다.

분명히 강태서에게도 연락이 닿았을 텐데, 따로 전달받은 말은 없었다. 장 실장에게 듣기로는 내일 저녁, 준비를 마친 재인이 직접 강선 아트 센터로 오면 된다고 했다.

그건 좀 의외였다. 보통 파트너라면 에스코트를 해서 데려가는 게 일반적일 텐데. 강태서는 마치 재인에게 스스로 다가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재인은 장 실장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다만, 제가 초대에 응했다는 건 태서 씨에게 전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강태서 본부장님의 비서실 소속인 만큼 전달 사항을 빠뜨릴 수는 없습니다.”


“제 마음이 바뀔 수도 있어서요.”


“……네?”


“일단 시간이 촉박한 만큼 준비는 하겠습니다만, 결정 내리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결정권은 저에게 있다고, 태서 씨는 그저 기다리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까지 신중해지고 싶었다. 신중함을 기하려는 여러 이유 중에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 제삼자인 강태서를 끌어들이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다.

자신을 초대한 강태서라는 남자의 의도가 무엇이든, 지금 재인은 그를 이용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돌아설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태서에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혹시 장 실장님의 도움을 받아 준비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태서 씨가 알게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제 선에서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장소 섭외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오전 첫 수업을 끝냈을 때, 재인은 장 실장에게 들러야 할 곳의 주소를 메시지로 전달받았다.

헤어와 메이크업은 내일 한다고 쳐도, 옷과 피부 관리 등은 당장 오늘부터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보내 준 주소는 단 한 곳이었다.

급히 준비하느라 뭘 빼먹은 건 아닐까.

궁금함에 검색창에 주소를 입력해 봤지만, 정륜동 주택가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상호는 나오지 않았다.


“밥 왔다. 먹으러 와!”

“응, 갈게!”

재인이 몸을 바로 하고 요가 매트를 구석으로 치웠다.


“밥 먹고 바로 가는 거야? 재인이 너, 그 볼일 있다는 거.”

“응.”

“진짜, 나중에 다 말해 주기야?”

“알겠어.”

“도움 필요하면 말하구.”

“그래. 말만 들어도 힘이 난다.”

“으이그.”

상화의 곁에서 배달 온 음식의 포장을 뜯으면서도 재인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예전에 조대훈의 집에 머물던 때, 행사가 있기 몇 주 전에는 늘 청담동의 숍에서 퍼스널 쇼퍼가 집으로 왔었다.

그런데 정륜동이라니. 정륜동은 서울에서도 단출하고 고적하기로 유명한 동네였다.

의심할 필요는 없다. 세월이 흘렀고, 그사이 돈 있는 자들의 취향이 어느 쪽으로 향했는지 재인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재인은 슥슥, 야무지게 밥을 비벼 입에 넣고 꼭꼭 씹었다.

* * *



“아직 연락 없습니까.”

질문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장 실장은 태서가 연락을 기다리는 대상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그녀는 대답 대신에 조금은 안타깝다는 듯 웃어 보였다.

재인이 부탁한 대로 장 실장은 태서에게 오전에 재인이 초대를 수락하는 전화를 해 왔음을 전달하지 않았다.

상사인 강태서가 말하기를 결정권자는 윤재인이라고 했다. 자신은 그저 기다리겠다고 했으니 지금 갑은 태서가 아닌 재인이었다.

그리고 중간 전달자 입장에서 말을 바꾸어 전달하느니 확실해질 때까지 입을 다무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밤새 잠도 못 잤습니다.”

“혈색 좋으십니다.”

“그러게요. 너무 좋아 보이나 봅니다. 사람이 좀 피곤해 보여야 아침 일찍 안 불러낼 텐데 말이죠.”

태서는 아침 일찍 연류동 본가로 와서 아버지이자 강선 그룹의 총수인 강신재 회장과 독대를 마쳤다. 그리고 지금은 임홍진 여사에게 향하는 중이었다.


“……오겠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부담되는 자리이니만큼 고민이 길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

긴 한숨을 내쉰 태서가 어깨를 쭉 펼친 후 댓돌 위에 신발을 벗어 두고 들마루로 올라섰다.

고래 등 같은 기와를 얹은 커다란 한옥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웠다. 북한산을 배경으로 지어진 이 집은 고즈넉하고도 예스러운 동시에 현대적인 인테리어와 어우러져 세련됐다.

하지만 태서는 이곳이 거북했다. 좋은 기억이라고는 없으니 당연했다.


“저 왔습니다.”

“그래.”

대답과 함께 미닫이 장지문이 열렸다. 요 며칠 전보다도 훨씬 안정되어 보이는 임홍진 여사가 소파에 앉아 태서를 맞이했다.


“부탁할 게 있다고?”

“네, 할머님.”

“말해 봐.”

태서가 저를 향하는 인자한 눈빛을 마주하고는 올곧게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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